제108화
“곧 연극이 시작됩니다!”
그 목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호객꾼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라, 진짜 연극이 시작되려나 봐요.”
“흐흠, 그래. 가까이서 보려면 지금 출발해야겠구나.”
뒤이어 아버지가 몇 번 헛기침을 내뱉고서 내 말을 받았다.
나는 들고 있던 파이를 아버지에게 모두 건넨 후, 지크프리트 씨에게 팔을 뻗었다.
“그럼 지금 빨리 출발해요!”
가족(feat. 친구) 관람, 가 보자고!
* * *
건국제 연극은 실내가 아닌 야외 공연으로 진행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콘서트 스탠딩석’을 상상하며 나름의 마음 준비를 끝마쳤건만.
“이상하게 저희 주변으로는 사람이 잘 안 오네요.”
그냥 안 오는 것도 아니야. 심지어는 주위로 원이 그려질 정도잖아.
“누가 봐도 나 귀한 사람이다, 하는 복장을 하고 있는데 괜히 건들려고 하겠어?”
지크프리트 씨의 머리 위에 턱을 괴고 있으려니, 그가 곧 제 머리를 장난스럽게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하나로 질끈 묶은 그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반박했다.
“제가 봤을 땐 이게 다 러셀 경의 인상 때문이에요. 이런 사람한테 누가 감히 다가올 생각을 하겠어요?”
요즘엔 가뜩이나 감이 떨어진 것 같다면서 인상까지 찌푸리고 다니잖아. 당연히 사람이 피할 수밖에.
“그래도 왕년에는 내가 미남으로 소문났던 사람이거든? 고작 몇 년 지났다고 바랬을 리가 없다고.”
“솔직히 그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해요, 러셀 경.”
“아무튼 나 때문은 아니다.”
“뒤로 굴러가면서 봐도 러셀 경 때문인 듯.”
“이 녀석이?”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나를 단단히 고정하고서 장난스럽게 몸을 흔들었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속 이 상태로 있으면 주변에 민폐겠지. 비단 사람들이 주위로 안 오는 것 말고도.
‘안 그래도 커다란 사람 위에 웬 아이까지 얹어져 있으니.’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남들한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저희는 가장자리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공연 보는 데에는 지장 없을 테니까요.”
“그래, 그게 좋겠구나.”
내 말에 부모님과 유스틴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이어 모두가 가장자리에 다다른 순간, 연극이 곧 시작되려는 듯 주변의 불이 모두 꺼졌다.
연극은 처음 보는데, 과연 어떤 느낌이려나.
“건국제에서 공연하는 연극은 사실 늘 똑같습니다.”
“건국 신화를 각색한 거겠죠.”
이 제국의 문맹률은 높은 편에 속하니, 이런 식으로 건국 신화를 주입하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게 목적일 터.
‘안 봐도 뻔한 수작이지, 뭐.’
그래도 매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걸 봐선, 연출이 좋거나 퀄리티가 굉장한 거겠지.
“그래도 동화책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더 자세할 겁니다.”
그사이 유스틴이 살짝 덧붙였다.
동시에 새까맣게 점멸했던 시야 너머로 막이 오르며 밝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시작한다.”
나 역시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공연장 위를 바라봤다.
“와아아!”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공연장 아래로 흰 연기가 상서롭게 흩뿌려졌다.
그 위를 노니는 것은 당연하게도 솜니움의 수호룡이 될 하얀 드래곤이었다.
분명 수호룡의 첫 등장이니만큼 아주 화려하고, 또 멋있어야 하는데…….
‘이게 드래곤?’
객관적으로 보면 무대 위의 드래곤은 황실의 돈이 들어간 만큼 꽤 정교하다 볼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는 이미 드래곤의 본체를 직접 본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작고……, 귀엽군.’
우리 집 김 리처드 8세보다 작은 것이, 갓 태어난 모양이구나.
“어……, 옛날에 봤을 때와는 살짝 다른 느낌이구나.”
“네 와이번 그대로 세워 놔도 되겠다, 야.”
부모님과 지크프리트 씨 역시 비슷한 감상을 느낀 건지, 저마다 작게 한마디씩 보탰다.
심지어 유스틴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채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산이 그렇게 들어갔는데도 이렇게 조잡하다니, 조사가 필요하겠군요.”
아니야, 이 녀석아!
그냥 네 눈이 높아진 거야!
영문도 모른 채 감사를 받게 될 연극 기획자에게 소소한 조의를 표하는 사이,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검은 드래곤이 나타났다.
역시나 어르신의 본체와 비교하면 아이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의 장치였다.
‘내용에 집중하자, 내용에.’
유스틴 말대로, 여기서부턴 정말 내가 모르는 부분이네.
검은 드래곤 장난감이 흉포하게 하얀 드래곤 장난감을 공격하잖아.
거의 무슨 세상에 다시 없을 원수처럼…….
‘혹시 어르신 이야기인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순간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어르신이 수호룡을 괜히 찌꺼기라고 부른 것도 그렇고, 본체가 저렇게 까만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우리 집 드래곤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르신의 흑역사를 관람하고 있는 건가?
‘아니지, 어르신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잖아.’
저렇게 싸웠다면 수호룡이 사념까지 꺼내 가면서 어르신을 반갑게 맞이하러 나왔을 리도 없고.
애초에 이 세상에 드래곤이 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어르신이 수호룡을 찌꺼기라고 불렀던 건……, 그럴 수 있지.’
어르신은 정말 나 말고 모든 걸 싫어하시니까.
솔직히 뭐, 어르신의 흑역사라고 해도 큰 상관은 없지만.
어르신 앞에서 혹시 모를 입조심만 좀 더 하면…….
“크아악!”
그때, 검은 드래곤에게 공격당한 하얀 드래곤이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무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동시에 조잡한 장난감 드래곤 대신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무대 위로 올라와 풀썩 드러누웠다.
나는 끝없이 밀려 들어오는 인지부조화에 살며시 입술을 말았다.
아무리 봐도 그분이 저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며 눕진 않을 것 같아.
‘네 기어코 나를 물었구나, 우둔한 나의 종족아.’
따위의 말을 하며 선혈을 뿌리면 또 몰라.
“이런 곳에 어찌하여……!”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용맹하게 무대 위로 난입했다.
이 건국 신화의 주역이자 연극의 주인공인 초대 황제였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대를 꼭 살리리라!”
곧이어 그가 뚜렷한 발성과 함께 쓰러진 여인을 품에 안았다.
여기서 러브라인을 뿌린다고?
‘완전 K―드라마인데.’
이거 황실 기록을 토대로 한 거 맞아? 아니면 좀 더 각색한 건가?
‘게다가 저 배우…….’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기분이 묘하다 싶더니, 현 황제를 상당히 닮았잖아.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황제의 모습에, 나도 몰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속이 한차례 또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는 두통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나긋하게 울려 퍼지던 목소리, 나를 헤집듯 바라보던 시선이…….
“아야, 녀석아. 내 머리 빠진다.”
그 순간, 지크프리트 씨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죄송해요, 러셀 경. 그나저나 모근은 아직 좀 약하신가 봐요. 수련을 좀 더 하셔야겠는데?”
“또 또, 이상한 소리 하기는.”
그러고서 그는 내내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나를 슬며시 안아 내려 팔 위에 안착시키더니,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끝났어.”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사람이 참 세심하단 말이야.
‘심지어 그날 나랑 같이 황궁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몇 번 바르작대다가, 길게 숨을 내쉬며 두통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는 이곳에 없어. 나는 안전해.
내가 잘 숨기기만 한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을 수 있어.
“미에나, 미에나?”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감고 배우의 대사와 사람들의 환호 소리만 귀에 담으며 천천히 심호흡하던 와중,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아버지를 마주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나는구나. 몸이 좋지 않은 거니?”
“그건…….”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스트레스에 졸음까지 겹친 건가.’
나는 여전히 떨려 오는 손끝을 주먹 쥐어 가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음식을 잘못 먹은 건 더더욱 아니고, 오래 걸어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가. 다 알고 있어.”
뒤이어 아버지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 뒤, 지크프리트 씨에게서 나를 넘겨받았다.
그사이 어머니가 케이프를 내 등 위에 얹어 주고서 다정히 속삭였다.
“이 뒤는 너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란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이 뒤에 불꽃놀이를 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건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유스틴 역시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지.
안 그래도 슬슬 바람이 차가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계속 심호흡한다고 해서 상태가 나아질 것 같지도 않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다음을 위해서라도, 고집은 잠시 넣어 둘 때다.
나는 아버지의 어깨에 볼을 비비적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천천히, 내가 작은 흔들림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케이프가 너무나도 포근하고 따뜻해서일까. 아버지의 걸음이 한없이 다정해서일까.
나는 몇 번 속눈썹을 팔랑이다 말고, 이내 완전히 눈을 감았다.
잠에 빠지는 도중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왁자해야 할 골목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내 희미한 숨소리를 확인하지 않으면 못 버티겠다는 듯이.
다정하고,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