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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05)화 (105/154)

제105화

고요한 캐리지 속, 바깥에서 마차를 이끄는 말발굽 소리가 다각다각 울려 퍼졌다.

나는 건너편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연신 흘깃거렸다.

“항상 대공자님께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함께해 주신 덕에, 이제는 안 계시면 섭섭할 지경입니다.”

“그렇습니까.”

“아무렴요, 저희 딸도 대공자님과 함께 놀러 가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렇지, 미아?”

“네, 네?”

왜 갑자기 저한테 폭탄을 토스하시나요, 아버지!

우리는 지금 말 한마디도 제대로 안 나누고 있는,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이란 말입니다!

“아니, 뭐어…….”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서 또르르 눈동자를 굴려 유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스틴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즉시 시선을 모로 돌려 차창 밖을 응시했다.

이거 봐라. 또 눈을 피하네?

“…….”

“…….”

아무 말 없이 유스틴을 빤히 바라보다 눈길을 돌리자, 이번에는 유스틴 쪽에서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내가 홱 눈동자를 굴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창 밖을 응시하는 게 아닌가.

‘이게 뭐 하자는 짓이야.’

너도, 나도 이런 유치한 눈싸움을 할 시기는 지난 것 같은데.

나는 하는 수 없이 푹 한숨을 내쉬고서 먼저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시선이 너무 열렬해 차마 무시할 수가 없어서요.”

“그게 무슨……!”

동시에 유스틴의 은빛 눈동자가 일순 내게 향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생긋 눈을 접어 웃었다.

“오, 이제 저랑 눈 마주칠 생각을 좀 하셨나 봐요.”

잡았다, 요놈.

“……피한 적 없습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거, 대공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유스틴이 몸을 움찔거리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안 어울리는구만.’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던 그 에버딘 가문의 대공자는 어디 가고, 저 쭈뼛쟁이만 남았나 몰라.

나는 또 한 번 길게 숨을 내뱉고서 말을 이었다.

“저희가 지난번에 의견 대립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어색해질 정도는 아닌 것 같거든요. 대공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나가자. 유스틴도 그걸 원할 테고.

“언제까지고 계속 이렇게 지낼 생각은 아닐 테니, 이만 원래 그랬던 것처럼 서로 대하는 거 어때요?”

나름대로 같이 축제 구경까지 왔는데, 괜히 분위기 흐릴 일 있나.

방긋 웃으면서 말하니, 유스틴의 은빛 눈동자가 한순간 희미하게 흐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유스틴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흩뿌리고서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당신에게 폐를 끼쳤군요. 미안합니다.”

“아니, 딱히 사과받으려는 건 아니었는데요.”

“마땅히 용서를 구해야 했던 일이니까요. 특히 지난번엔 제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던 것 같아,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앗, 넵…….”

확실히 그땐 유스틴답지 않게 유난히 감정적으로 굴기는 했지.

그런데도 맞는 말만 했다는 점이 조금 웃기지만.

“당신이 곤란해지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했습니다.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그 일은 정말로 괜찮아요. 솔직히 대공자님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뭐.”

게다가 이렇게 사과한다고 해서 이미 각자의 사정이 있는 마당에 의견이 합치될 리도 없고.

‘이런 건 그냥 묻고 넘어갑시다.’

원래 친구 사이에 정치 얘기는 하는 거 아니랬어.

“그래도 대공자님이 우려할 일은 없을 거예요. 저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고, 아이에게 양해도 구했으니까요.”

그래도 일단 안심은 시켜 주는 게 맞겠다는 생각에 덧붙여 말하자, 유스틴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곧바로 얼굴을 굳힌 탓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뒤이어 그가 또 한 번 오만상을 찌푸리며 사과를 건넸다.

아니, 그 이야기는 이만 됐다니까.

평소에는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질색하던 사람이?

“뭐어, 정 미안하면 이번에 새로 설립하려는 후원 재단 공동 대표로 대공자님 이름 올리게 해 주시든가요.”

하지만 나는 이 죄책감도 기회로 써먹는 악랄한 사람이지.

짐짓 새침하게 눈초리를 올리며 말하자, 유스틴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저를 공동 대표로 올리겠다고요? 시두스 가문 사업으로 놔두는 편이 평판이나 인지도에 더 도움 될 텐데요.”

“어차피 실질적인 사업은 대공자님께서 함께하실 거잖아요. 그러니 공동 대표가 맞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전체적인 구호 및 생계 지원은 물론이고, 학업이나 진로 적성 찾기도 지원해야 하는데.

거기에 최종적으로는 각지에 재단 산하 의료원이나 보육원, 학교를 세우는 게 목표니까.

“대공자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후원 재단을 장기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결국 후원금을 모금할 수밖에 없어요. 에버딘 가문의 이름이 있다면 모금은 한층 더 수월해질 테고요.”

내가 죽고 약혼이 깨지면 시두스 가문을 향한 관심은 자연히 시들해질 텐데.

내 모든 계획을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금은 필수적이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거절하셔도 되기는 해요.”

그렇대도 결국은 시두스 가문의 일이니까, 괜히 강제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지.

이윤이 남는 사업도 아니고, 하물며 우리가 진짜 약혼한 사이도 아닌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 나는 헤실헤실 미소 지으며 말을 번복했다.

그러자 유스틴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 진심으로요?”

“네. 대신 당신도 함께 이름을 올리는 조건으로요.”

“어……, 진심으로요……?”

아버지랑 계속 연락을 나눴다면 지금 내 몸 상태가 어떤지 모르지 않을 텐데.

아예 허무맹랑한 제안은 아니지만.

“당장은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괜찮기는 하겠네요. 제가 떠난 후에는 다시 부모님 이름을 올려야겠―”

“아니요.”

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스틴이 딱 잘라 말했다.

“제 조건은 딱 하나입니다. 제가 공동 대표로 있는 동안, 당신 역시 대표로 등록되는 것.”

“……왜 그렇게까지?”

“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거니까요.”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를 담아냈다.

퍽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그러니까, 이건…….

“대공자님.”

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혹시 저 좋아하세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동시에 유스틴이 인상을 왈칵 찌푸리며 단칼에 대답했다.

정말로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기가 찬 눈빛까지 띤 채였다.

“아, 오.”

나는 곧바로 내 실책을 깨닫고서 입술을 오므렸다.

맞다, 얘는 그냥 평범하게 인재에 미친 놈이었지!

“제가 실언했네요, 죄송해요.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세요.”

나는 재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보통 로맨스 소설에서 저런 대사를 하는 사람은 다 여주한테 칭칭 감겨 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소설을 하도 많이 읽었더니 이런 대참사가!’

이 정도면 거의 뭐 도끼병 말기 아니냐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 마차에 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어색한 정적이 무겁게 가라앉아 숨 한 조각 내뱉기도 어려워진 찰나.

“도착했습니다, 나리.”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마부의 목소리가 캐리지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건국제가 황도에서 열려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진짜 어색해 죽을 뻔.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만 내립시다.”

이윽고 유스틴이 용수철 튀어 오르듯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고서 그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맞잡은 손 위 피부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온기가 유난히 뜨거웠다.

분위기도 이상한데, 여기서 농담 한번 던져 볼까.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손이 따뜻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봐요.”

“지금 제가 냉정하다고 뭐라고 하는 겁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대공자님 손이 따뜻하다고요, 헤헤.”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결국 유스틴의 입에서도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좋아, 분위기 전환됐군.

뿌듯한 마음으로 그의 안내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음, 두 사람이 잠깐 잊은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불현듯 등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 들었다.

“애석하게도 이번 나들이엔 저희도……, 동행했답니다.”

처음은 아버지의 목소리, 그다음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심지어 지크프리트 씨 역시 한마디를 툭 내뱉는 게 아닌가.

“잘들 논다.”

나는 순간 삐끗할 뻔한 몸을 간신히 바로 세우고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렇게 말 안 해도 알고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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