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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04)화 (104/154)

제104화

그러고서 그는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것 또한 마스터께서 부탁하신 겁니다만, 어찌 됐든 이번 건 특히 제 노력이 들어가는 거니 제게도 감사의 마음을 가져 주십시오.”

“아, 네…….”

이제는 대놓고 생색을 내는구나.

근데 대체 무슨 노력?

“저, 그런데―”

괜히 궁금해지는 마음에 입을 연 순간이었다.

“조용히 해 주십시오. 감정 잡는 데 방해됩니다.”

그가 여전히 눈을 질끈 감은 채 단호하게 내 말을 막았다.

나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뭘 하려고 하는데 감정까지 잡아?

“슬픈, 슬픈 기억……, 마스터께서 나만 두고 깊은 잠에 빠지셨을 때……. 그런 형벌을 받으면 계약을 파기해 주든가……. 나까지 묶여서 이 거지 같은 세계를 떠나지도 못하고…….”

그가 진실로 고통스러운 듯 몇 번 자그맣게 말을 중얼거리려니, 곧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툭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됐군요.”

그러고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번쩍 뜨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담았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슬며시 입술을 오므렸다.

이 인외도 역시 제정신은 아니야.

“가지십시오.”

“아, 이걸요…….”

죄송하지만 저한테 그런 취미는 없는데요.

“그 떨떠름한 표정은 뭡니까? 이래 보여도 제 눈물은 만병을 고칠 수 있는, 인간들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보배 중의 보배인데요.”

“너무 좋아서 떨떠름했던 거죠.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유, 그런 거면 미리 말을 해 주셨어야죠, 선생님!

나는 황급히 만면에 미소를 흩뿌리며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병을 건넸다가.

“그전에.”

짧은 단어와 함께 내 손에 거의 닿을 뻔한 유리병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혹시라도 제 능력을 깎아내릴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지금 당신의 몸 상태로는 본래의 효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헤헤, 괜찮아요. 어차피 그럴 것 같았거든요.”

“아니, 어차피 그럴 것 같았다뇨?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내 말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서 되물었다.

언제는 효능 없을 거라며…….

나는 입술을 어색하게 말아 올린 후 곧바로 말을 수습했다.

“어르신께 제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이 정도면 드래곤의 심장이 있어야만 한다던데요.”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남자가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순순히 인정했다.

“어쨌든 지금 당신의 몸 상태라면, 아마 하루 정도는 보통 인간처럼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오, 생각보다 성능이 좋네요.”

“시간이 흐르면 효능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만요.”

“그래도 감사해요, 헤헤.”

“그나저나 이곳은 정말……, 환자가 지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환경이군요. 공기가 깨끗하지 않아 상당히 불쾌합니다.”

어르신께서 요청한 건 모두 전달했는지, 이윽고 그가 고개를 홰홰 돌리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되게 맑은 건데.

노란 별 지구의 황사&미세먼지 크로스 공격을 안 받아 봤군.

“마음 같아선 레어에서 요양하라고 권하고 싶지만, 저는 애 돌보기는 딱 질색이라서요.”

“어차피 출입 금지령도 받은걸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이 불쾌한 땅에 발을 디딘 거고요.”

뒤이어 남자는 입술을 빼죽 내민 채 몇 마디 더 투덜거리다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깍듯하게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필요한 건 모두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마스터를 위해서라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죠.”

“앗, 다시 한번 감―”

사합니다…….

나는 순식간에 사라진 남자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올 때도 마음대로더니, 가는 것도 순식간이네.

그나저나 이건 언제 다 옮기지?

* * *

시두스 저택을 한차례 훑고 지나간 소란 아닌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잦아들었다.

쌓인 보화가 모두 얼마인지 살펴보려다 잠깐 현기증이 인 탓에 휘청였더니, 그 길로 저택 사람들이 나를 침실에 가둬 버린 탓이었다.

‘그러고선 휴식을 방해하지 않겠다며 소리 하나 안 내고 조용히 옮기기 시작했지.’

하여간 다들 호들갑스럽단 말이야.

갑자기 일어난 소동 때문에 자기들도 정신없을 텐데.

“조금 이따 어르신한테 감사 인사 건네러 가야지.”

루스를 만나야 하니까 오래는 못 머물겠지만.

나는 자그마한 유리병을 손안에 굴리다 말고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몸을 뉘었다.

‘이건 정령의 눈물인 거겠지.’

정령의 눈물.

예전에 플라네타륨에서 이에 대한 기록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깊은 숲속, 혹은 호수에 사는 정령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전설의 영약.

인간과 사랑에 빠진 정령이 연인의 병마에 눈물을 흘리다 그 효능을 알게 됐다나 뭐라나.

‘정령이 진짜 있구나.’

하긴, 드래곤도 멀쩡히 숨 쉬고 있는 마당에 정령도 당연히 있겠지.

그 정령이 드래곤을 섬기고 있는 건 제법 신기한 일이지만.

“그나저나 이건 진짜 어쩐다.”

처음엔 부모님께 넘기거나 경매에 올릴까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양심에 찔린단 말이지.

어르신은 분명 내가 쓰기를 바라서 이걸 건넨 걸 테니까.

“내가 마셔야겠다.”

나한테는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가 어디냐.

나는 유리병을 쥔 손을 가슴께에 가져다 대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야 이걸 잘 써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아니, 소문은 나면 안 되지.’

어떻게 해야 이걸 몰래 잘 써먹을 수 있으려나.

‘지금 상태’에서 하루 정도 효과가 지속되는 거면, 결국 나중에는 반나절도 못 간다는 소리일 텐데.

뭔가 지금 상태에서 써먹을 만한 곳이…….

“아, 맞아.”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다시금 눈을 번쩍 뜨고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 건국기념일이었지.”

그러고 보면 건국기념일에는 황도에서 건국제가 열리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맘때쯤엔 꼭 몸이 안 좋아서 직접 구경한 적은 없지만.

‘안 그래도 요즘 공부만 하는 루스한테 건국제 체험 정도는 시켜 줘도 되지 않을까?’

조금 더 생생한 체험을 위해서는 이곳저곳 돌아다녀서 최대한 실제에 가깝게 재현하는 게 좋겠지.

“……아니야.”

나는 괜히 팔을 몇 번 붕붕 휘두르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건국제는 굳이 이걸 안 마셔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게다가 건강한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괜히 황제의 귀에 들어가서 골치 아파질 수 있고.’

이번 건국제는 지크프리트 씨나 아버지 품에 안겨 다니지, 뭐.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금 침대에 누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당장은 어르신께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우선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이제는 늦여름조차 완전히 저물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쯤.

“이번 건국제는 직접 구경하고 싶어요.”

나는 아침 인사를 건네러 온 부모님을 마주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정하기 그지없었던 두 분의 표정이 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분명 방금 막 눈 뜨지 않았니, 미아……?”

“헤헤, 일어나자마자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오늘이 바로 말을 꺼낼 최적의 타이밍인 것 같았거든.

“이 정도면 슬슬 바깥에 얼굴 정도는 비춰도 될 것 같아서요.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슬슬 질리구…….”

“하지만 네 몸이 아직―”

“언제까지고 침실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잖아요오.”

솔직히 침실에만 있는 거 너무 질려! 심심해! 할 거 없어!

요 몇 달간 줄기차게 돌아다녀서 그런가, 예전의 그 온실 속 화초로 돌아갈 수 없단 말이다!

“제가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구우, 가족끼리 놀러 가고 싶은 건데에…….”

짐짓 볼살을 부풀리며 말꼬리를 늘이려니, 부모님의 얼굴에 묻어 있던 당황스러움이 곧 안쓰러움으로 뒤바뀌었다.

좋아, 계획대로군.

“그러고 보면 아기였을 때 이후로는 이맘때 밖에 나간 적이 없었지.”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에는 언제나 저택 안에서만 지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곧이어 아버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밖에 오래 있어야 하니, 따뜻한 옷을 준비해야겠어. 그러고 보면 며칠 전에 대공자님께서 스웬든 지방의 최상급 모피를 보내 주셨는데, 그걸로 만들면 되겠구나.”

“대공자님이요?”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랑은 간단한 안부도 안 물어보면서, 며칠 전에 모피를 보냈다고?

‘국외 은행 사업 때문에라도 꾸준히 연락하긴 해야겠지만…….’

어쨌든 계약상으로 총책임자는 나잖아. 그런데 아빠랑만 연락을?

그럴 수 있지.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이니까.

“그래, 대공자님께도 함께 가자고 한번 연락해 보는 편이 좋겠구나.”

그사이 아버지가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띠고서 말을 건넸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아버지의 눈빛을 피했다.

‘연락한다고 올 것 같지는 않은데.’

걔는 일부러 나랑 연락을 안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나랑 직접 얼굴을 맞대려고 할 리가…….

“어쩐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군요, 하하.”

없어야 하는데?

“……정말로 그렇군요.”

건국제 당일.

나는 내 앞에 서서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는 유스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유스틴은 잠시 나를 흘긋거린다 싶더니, 이내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뭐냐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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