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루스의 꿈, 황제, 마정석이 박힌 샹들리에, 화려한 복도.
메뉴는 같으나 언제나 양질이었던 식사, 늘 루스의 곁을 지키던 얼굴 없는 사용인들.
짧은 찰나, 내 머릿속에 지금까지 이리저리 흩어진 채 축적되어 있던 온갖 정보들이 끝없이 재조립되며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황제가 굳이 지금, 나를 황궁으로 불러들인 이유.
유스틴이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며, 내게 아무것도 티 내지 말라고 했던 이유.
루스를 찾는 일을 그만두면 안 되겠냐고, 그렇게 간절하게 물은 이유.
‘루스를 가둔 사람이 황제여서.’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제국의 황제이기 때문에.
“한미한 소녀를 어찌 아시고 이렇게 직접 황궁에 초대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곧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표정은 자연스럽게 두자.’
지금은 일부러 겁먹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선 오히려 겁먹는 게 당연한 거야.’
누구든 황제를 처음 독대하면 겁을 먹기 마련이니까, 이상할 건 없어.
“한미하다니, 에버딘 대공자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어.”
곧이어 황제가 다정스레 눈꼬리를 휘며 받아쳤다.
눈꼬리가 휘어지는 모습이, 미소 짓는 저 얼굴이. 루스와 너무나도 닮아 보여서.
‘티 내지 마.’
나는 곧바로 쑥스러운 척 시선을 떨어트리고서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몰래 깨물었다.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차지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내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돼.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티를 내서는 안 돼.
“그래, 그대와 에버딘 대공자가 어떻게 만났다고 했었지?”
이윽고 황제가 웃음기 담긴 어조로 질문했다.
제 조카의 사랑 이야기를 캐묻는 삼촌처럼 다정하면서도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막힘 없이 대답을 꺼냈다.
“어, 어머니께서 에버딘 대공 저에서 잠깐 시녀로 근무하셨던 적이 있는데, 그때 대공자님께서 제가 앓는 병과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고 하여 어울리는 처방을 몇 가지 추천해 드리다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지. 그대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시두스 가문이 온 열과 성을 다했다는 소식은 내 들어서 알고 있어.”
나 때문에 가문이 망할 뻔했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은 거겠지.
“무슨 이유에서든 영지를 파는 귀족은 흔치 않아서 말이야.”
“아, 아하하…….”
“그래, 하여 지금 그대의 몸은 많이 나아졌는가? 대공자도 제법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던데.”
“적어도 이렇게 폐하를 알현하러 올 만큼은 건강하답니다.”
“하하! 그래. 내가 갑자기 불러서 그대도, 그대의 가문도 불만이 많겠어. 미안하네.”
내 말에 황제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선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불쾌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즐거운 목소리였다.
“이해해 주게나. 그대에 대한 소문이 워낙 무성해야 말이지. 하여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어 그랬어.”
이윽고 그가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서 온화하게 말했다.
루스와 지독히 비슷하면서도 끝내 닮지 않은 그 눈빛에, 순간 속 안쪽에서부터 역한 구토감이 밀려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손끝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손발이 저렸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제 소문……, 말인가요?”
밀려오는 고통을 저편으로 쑤셔 넣으며 묻자, 그가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을 띤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마담 아페르타에 관한 사건이라거나.”
초장부터 센 걸 들고 오시는군.
“하마터면 그녀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다지. 그 일은 참 유감이야. 뒤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었을 줄이야.”
그가 진심으로 안됐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동시에 내 직감이 외쳤다.
그는 알고 있었을 거야. 알면서도 묵인했을 거야.
‘마담 아페르타가 차고 있던 펜던트도 황제가 그녀에게 직접 내린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 펜던트에서 드래곤의 사념이 나올 리 없으니.
“그러고 보면 리넥스의 성황도 솜니움에 머무는 동안 종종 자네를 별궁에 초청했었지.”
그사이 황제가 이번에는 다른 주제를 꺼내 왔다.
이게 왜 안 나오나 했지.
“성황께서 근래 불면증이 심하시다기에……, 대공자님께서 저를 추천해 드려 약재 조합을 알려 드릴 겸 몇 번 만나 뵌 게 전부입니다.”
“그런 거라면 대공자를 통해 전달해도 괜찮았을 텐데?”
그가 마냥 즐거운 아이처럼 계속해서 질문했다.
나는 괜히 찔린 사람처럼 한 번 침을 삼킨 후, 더듬더듬 답을 꺼냈다.
“……실은 대공자님과 함께 추진 중인 국외 은행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직접 만나 뵈었습니다.”
“그게 그대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었군.”
“그렇다기보다는, 당시 대공자님께서는 외교 일로 바쁘셨으니까요.”
숨길 수 없는 건 드러낸다.
속여야 한다면 적당한 진실을 섞어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차라리 이쪽이 나아.’
황제에게 내가 조금 기이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각인될지언정, 그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도록.
루스와 관련한 사실에는 발을 들이지 않도록.
‘루스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왜 들키면 안 되는 건데?’
찌르르 울리는 두통 너머,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목소리였다.
고통이 극대화되니 증상이 이런 식으로도 생기는 모양이네.
‘그걸 모르니까 들키면 안 되는 거야.’
욱신거리고 지끈대는 머릿속에서, 또 한 번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숨길 수밖에 없는 거야.
내가 루스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그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역시, 시두스 가문이 이리 빨리 활기를 되찾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계속되는 격통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 사이, 황제가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세요, 폐하.”
“아니야. 그리 겸손할 필요 없네. 나는 인재를 아주 좋아하거든.”
곧이어 그가 다정하게 입꼬리를 빼 당겨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크프리트 러셀, 그 아이도 그대의 가문으로 갔다고 들었어. 참 기묘한 인연이야.”
“러셀 경께서는 평소에도 부모님과 친분이 있어서…….”
“변명할 필요 없네. 그대나 그를 다그치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 그가 다시 황도로 돌아온 것도 기쁘고 말이야.”
노래하듯 운율 섞인 목소리가 고요한 알현실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가 높은 층고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내게는 여러 갈래의 속삭임이 되어 귓가를 맴돌았다.
점점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 게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하니 왜 대공자가 그대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겠어.”
“…….”
“이렇게 출중한 인재를 알게 되어 정말로 기뻐.”
시야가 기울어질 때마다 억지로 몸을 곧추세웠다. 기침이 터져 나오려고 할 때마다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저런, 아직도 몸이 좋지 않은가 보구나.”
바로 그 순간, 머리 바로 위쪽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황제를 바라보았다.
“몸도 성치 않은데 이렇게 불려 나오다니, 내 배려가 없었어.”
“폐하, 저는…….”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 보게. 푹 쉬고, 부디 쾌차하게나.”
말을 마친 그는 알현실 내부에 있는 호위를 향해 짧게 손짓했다.
동시에 그의 근처에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나를 조심스레 부축해 알현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제는 아예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아,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였지만.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상태가 형편없더라니.’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미에나?”
알현실 바깥으로 나온 건지, 이번에는 황제가 아닌 유스틴의 목소리가 귓속을 웅웅 울렸다.
나는 간신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로 몽롱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대공자님…….”
아무래도 이제는 이 정도의 약으로는 버틸 수 없나 봐요. 분명 약효가 떨어질 때는 아닌데도 이러네.
‘어쩌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일 수도 있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저, 좀…….”
이제는 정말로 한계야.
버티는 건 내 특기라지만, 이렇게 시야가 뒤섞여 버리면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집에…….”
다시 한번 세상이 무겁게 회전한다.
점차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유스틴이 나를 감싸 안고 무어라 소리 지르는 모습이 꿈처럼 펼쳐졌다.
나를 안아 든 그의 손이 떨리는 건지, 내 몸이 떨리는 건지.
“……나! ……!!”
또 그가 외치는 말들이 무슨 뜻인지는 끝내 알지 못한 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