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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95)화 (95/154)

제95화

“사실 저는 당신이 한 달 정도는 계속 여행 다닐 줄 알았습니다만.”

푸르르게 펼쳐진 창공 위, 유스틴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얌전히 빵을 받아먹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주일도 안 돼서 돌아간다고 하니 의외네요.”

“원한다면 며칠 더 머물러도 된단다, 미아. 어차피 나는 하는 일도 별로 없잖니.”

“그래, 아가. 어디 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뭐든 말해 보렴.”

“저는 아가씨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요.”

유스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티나가 차례로 말을 보탰다.

우리 리처드 8세의 등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이렇게 자연스레 한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다니, 아닌 척하면서도 다들 익숙해졌나 보군.

나는 시야 아래로 솜사탕처럼 퍼진 구름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각자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아버지께서도 저 대신 사업 확장하시느라 바쁘실 테고, 특히나 대공자님은…….”

루스 찾느라 일이 두 배일 텐데?

보고받고 지시 내리고 하려면 이렇게 유유자적 여행을 즐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무언의 압박을 담아 유스틴을 지그시 바라보려니, 그가 곧 나와 시선을 맞추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니, 그냥요.”

나는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생긋 미소 지었다.

일부러 선심 써서 도와준다는 사람한테 독촉하면 안 되지. 물론 이 순간에도 우리 강아지는 내가 자기를 찾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이번에 저택으로 돌아가면 며칠 동안 푹 쉬십시오. 나중에 찾아와서 확인해 볼 겁니다.”

방싯방싯 웃는 루스의 얼굴을 상기하는 사이, 유스틴이 다시금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곧바로 하던 생각을 멈추고서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꽤 오래 안 볼 사람처럼 이야기하시네요?”

독촉하면 안 된다고 방금 막 생각해 놓고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우리 사이에 청산 못한 일이 하나 남아 있지 않아?

“그야 당신 말처럼 저는 돌아가면 한동안 바빠질 테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유스틴은 당연하다는 듯 하나둘 이유를 읊기 시작했다.

“일전에 카타르타 영지에서 있었던 사건에 관한 보고도 해야 하고, 전서구로 주고받은 업무도 다시 정리해 처리해야 하고.”

“…….”

“무엇보다 황도에 도착하는 대로 조속히 황궁으로 오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서요.”

“어우, 그럼 가셔야지.”

내가 바쁜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었네.

화들짝 놀라 얄미움의 눈초리를 거두니, 유스틴이 입꼬리를 아주 살짝 빼 당겨 웃었다.

내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제법 웃긴 모양이었다.

‘아니, 하지만 황제의 명인데.’

그런 걸 받았으면 빨리빨리 말하고 돌아가자고 했어야지, 지금까지 말을 안 하고 있었단 말이야?

“혹시 제가 눈치 없이 대공자님의 목숨줄을 실시간으로 잘라 먹고 있는 건 아니겠죠……?”

“폐하께서도 제가 여행을 갔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유스틴의 눈동자가 짧은 순간 침전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비치는 편이 더 안전할 테고요.”

“오…….”

뭔가 방금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것 같은데.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려니, 유스틴이 이번에도 옅게 미소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제가 없는 동안 당신은 여독 회복에 집중하고 있으세요.”

“헤헤, 네.”

그건 굳이 말 안 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책임지고 챙길 것 같은데.

나는 각오하라는 듯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지크프리트 씨를 애써 무시하며 웃음을 흘렸다.

유스틴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담담히 덧붙였다.

“저는 당신을 오래 보고 싶으니까요.”

* * *

……라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어르신을 뵙고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헤헤헤.”

적적하실까 봐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나는 허리를 잔뜩 숙인 채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는 어르신을 향해 사근사근 말을 건넸다.

어째 어르신은 볼 때마다 화가 나 있으신 것 같단 말이야.

이번에는 딱히 어르신의 방어 결계를 사용해야 했던 일도 없는데.

“그래서 그 무리한 몸으로 예까지 왔단 소리냐?”

곧이어 그가 날 선 음성으로 권태로이 말을 내뱉었다.

아하, 그게 문제였군.

“무리라뇨. 돌아온 후에 이틀 동안은 얌전히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는걸요.”

“…….”

“여행 다니는 내내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리처드 8세……, 와이번을 타고 다녀서 체력 소모도 적었어요. 오히려 먹기는 더 잘 먹었고요.”

진짠데, 반박의 여지 없이 완전 힐링 여행 그 자체였는데!

나는 일부러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서 말했다. 조금이라도 내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본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이 깜찍한 것아.”

그가 여전히 불퉁한 목소리로 핀잔하듯 입을 열었다.

흠, 이것도 안 통하는군.

나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헤헤, 그보다 어르신. 제가 여행 다니는 내내 들르는 곳마다 틈틈이 위그드라실을 찾으려고 했는데 말예요, 글쎄. 흔적도 없더라고요.”

저 그래도 약속 잊지 않고 이렇게 노력하고 있답니다.

이런 제가 기특하지 않나요? 뭔가 능력 하나 더 주고 싶지 않나요?

“내 네게 빨빨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말은 귓등으로 들은 게 분명하지.”

앗, 화제 전환 실패했네.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 별거 안 했단 말이에요. 솔직히 가족 여행은 좀 봐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가 단순히 가족 여행만 다녀온 거라면 나도 뭐라 할 생각 없단다. 그런데 별 걸 안 하기는 무슨.”

곧이어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내 목과 가슴 사이에 톡 가져다 대고서 말했다.

“네 몸에 쌓인 힘을 좀 보거라.”

“힘이요?”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하루아침에 힘이 그렇게 더 쌓여?”

“잉, 제가요? 그런가요?”

나는 내 힘을 직접 가늠할 수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

‘설마 그래서 그때 각혈한 건가.’

갑작스럽게 힘이 축적되는 바람에 몸이 견디질 못한 거라든가.

하나둘 천천히 맞춰지는 퍼즐 조각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르신이 고개를 설설 내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디 설명해 보거라. 나는 너처럼 남의 영혼에 침입하는 취미는 없어, 그 안에서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하니.”

“앗.”

그게 취미의 영역으로 둘 수 있는 건가? 굳이 토 달 마음은 없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곧바로 어르신께 카타르타에서 겪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어쨌든 해결법을 알아낸 순간에 지난번에 만났던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렸던 걸 생각하면, 그 드래곤이 제게 능력을 준 게 아닐까 하는 게 제 추측인데요.”

“흥, 그거야 당연하지.”

내 말에 어르신이 곧바로 코웃음을 내뱉고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네 몸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그냥 놔뒀을 리 있겠느냐. 당장에 찢어발겼지.”

“에헤헤.”

“네 이리 망가져 올 걸 알았다면 그냥 없애 버릴 걸 그랬나 보구나.”

헉, 그건 좀.

“이렇게 유용한 능력을 없애는 건 능력을 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르신.”

줬다 빼앗기 없음! 특히 자기가 준 능력 아니면 더더욱 빼앗기 없음!

“되었다. 어차피 지금은 네 영혼에 온전히 흡수된 바람에 이 몸으로는 당장 뗄 수도 없으니.”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순간 어깨에 교차해 올려놓은 팔을 내리고서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럼 이번에는 이쪽에서 질문을 좀 던져 볼까.

“그나저나 그분께서는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딱 맞는 능력을 이리 선물해 줄 수 없는데.

“그 녀석은 미래를 관조하는 놈이니, 못 볼 것도 없겠지.”

“미래를 관조하는…….”

“그런 주제에 직접 나서길 좋아하고. 결국 그 성정에 못 이겨 사라졌으니.”

어르신의 시선이 아득히 먼 곳을 응시하듯 잠시 흐려졌다가, 이내 다시 내게 고정되고서 반항적인 눈빛으로 변모했다.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그 찌꺼기의 능력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네 것이 아닌 힘까지 이리 덕지덕지 붙여 왔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어, 잘 뗄 수는 없을까요?”

“그건 불가능하다. 네가 붙여 온 힘은 네 본래 힘과 아주 흡사해. 괜히 네 영혼까지 흔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게다.”

거기까지 말한 어르신은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한번 표정을 찌푸렸다가.

“이제부터는 정말 너와 나의 시간 싸움이 되겠구나.”

언제나처럼 내 머리 위에 커다란 손을 올리며 다정히 말을 건넸다.

“원래라면 네 숨이 멎기 전에 내가 눈을 뜨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이제는 정말로 알 수 없게 되었어. 지금부터는 네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단다.”

“와, 망했네요…….”

내가 죽기 전에 무조건 눈을 뜨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아, 그냥 내가 못 믿었던 거구나.

“네 그 사람들을 살린 것을 후회하느냐?”

그 순간, 어르신이 꿰뚫듯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나는 세로로 쭉 찢어진, 특유의 서늘한 황금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아뇨,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참 신기한 일이지.

그 일만 아니었다면 내가 확실히 살 수 있었다는데도, 아쉽다는 마음은 들지언정 후회는 되지 않았다.

“사람을 살리는 게 당연해서 그런가 봐요. 아마 저는 사실을 미리 알았어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요? 헤헤.”

“미련하기는.”

“저도 몰랐는데, 아무래도 전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봐요.”

전생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 중 반은 살기 위해 발악했으며, 다른 반은 살리기 위해 발악했다.

그러니 어쩌면 내 성격은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결과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잘 버텨 볼게요.”

최선을 다해서 버텨 보고, 안 돼도 슬퍼하지 말자.

어쨌든 나는 버틴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니까.

마음속으로 결의를 다지며 방긋 웃자, 어르신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몇 번을 봐도 참 신기하구나.”

그러고서 그는 나를 따라 눈꼬리를 휘며 달큼히 속삭였다.

“그럴수록 너를 오래 보고 싶어지니, 어쩔 수 없지.”

“…….”

“어디 한번 끝까지 버텨 보거라.”

* * *

그리고 또 며칠 뒤.

이번에는 황궁에서 나를 직접 보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황제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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