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이런 꼴로 손님을 대접하다니, 면목이 없군요.”
점잖으면서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는 목소리가 방 안을 수놓았다.
솔직히 나도 살면서 반대의 상황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상황을 떼고 봐도 내게는 이상한 꼴도 아닌지라.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다시피 앉은 반스 남작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며칠 동안 영양 섭취를 제대로 못 하셨으니 당연히 쉬셔야지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주치의 말로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생명이 아주 위독했을 거라더군요. 그저 조금 긴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는데, 잠에서 깨지 않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었다니…….”
“그래도 다행이네요.”
다들 생각했던 것보다는 멀쩡한 것 같아서.
나는 다음 말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키고서 또 한 번 해맑게 미소 지었다.
잠을 자는 동안은 대사가 느려지기라도 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꿈은 결국 뇌의 활동을 의미하니, 에너지 소모가 없진 않았을 텐데.
겨울잠을 자는 원리라고 봐도 되려나? 그거랑은 살짝 차이가 있으니, 세미 겨울잠?
‘가만 보면 이 세계도 참 신기하단 말이지.’
이게 바로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관? 짱인데.
그래도 목 잘리고 병 걸리면 죽는다는 점에서는 모두 평등하지만.
“꿈에서 깨기 전에 레이디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사이 반스 남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택 2층 왼쪽 끝방,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앞으로 드릴 이야기를 위해서라도, 제 능력을 믿게 해 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그의 말대로 반스 남작의 꿈이 무너지기 바로 직전, 나는 그에게 나를 찾을 수 있도록 간단히 말을 건넸었더란다.
사실 내가 직접 얼굴을 비치기만 해도 얼추 상황 파악은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직접 나를 찾아오는 게 신빙성이 높으니까.’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정말로 꿈속에서 봤던 사람이 꿈에서 들은 장소에 있으니 믿지 않을 겨를이 없지요.”
곧이어 그가 내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희 일가를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이곳을 여행지로 고르지 않았다면,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이 모든 상황을 겪었어도, 최종적으로 지크프리트 씨가 저주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마음이 조금 찝찝할지언정 결국 지나쳤을 테니까.
“운명인 거지요.”
곧이어 반스 남작이 나를 따라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 미소를 눈에 담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음. 제멋대로 구해 놓고서 제가 먼저 은혜를 논하기는 염치없지만요. 정 감사하시다면 제가 저주를 풀었다는 사실은 함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반스 남작에게야 직접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능력을 밝힐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래도 불특정 다수에게 들키기엔 귀찮은 능력이라.
그래서 일부러 반스 남작을 제외한 다른 일가족에게는 떠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을 생각이고.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에 반스 남작이 곧바로 확답했다. 나는 배시시 미소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짜잔, 여기까지는 서론이었습니다.
“그치만 갑자기 동시에 깨어났다고 하시면 믿지 않는 사람이 생길 수 있으니까,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오.”
그리고 이게 본론이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카타르타에 아론이라는 주술사가 있는데, 이번 일은 그분의 덕으로 두면 어떨까 해요. 그분도 대충 제 사정은 알고 계시니, 남작님께서 따로 설명해 주시면 아마 수긍해 주실 거예요.”
사실 수긍할지 말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결국 제 손자를 위해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폭탄 돌리기도 아니고, 이렇게 냅다 넘겨 버려서 죄송합니다!
“아론이라면……, 그 노인 말입니까?”
“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남작님께 이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지나갔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레이디가 한 일을 다른 사람의 덕으로 두는 건…….”
“공치사는요, 오히려 그쪽에 일을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한걸요. 그리고 이건 영지민 보호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그 집 손자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더라고요.”
내 말에 반스 남작의 표정이 일순 뒤바뀌었다. 나는 그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말했다.
“카타르타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잖아요.”
“…….”
“음, 여기서부터는 저희 둘이서만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다들 괜찮으신가요?”
이제 꿈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저흰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내 말에 그간 잠자코 대화를 경청하던 부모님과 유스틴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반스 남작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에버딘 대공자께서 레이디께 푹 빠져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예? 예에…….”
갑자기?
대체 우리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예상치 못한 말에 떨떠름하게 반응하려니, 반스 남작이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리고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뒤이어 마주한 건 조금 전과는 달리 진중한 눈빛이었다.
나 역시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남작님께서는 카타르타의 영지민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시죠.”
“네, 그렇습니다.”
“동시에 남작님께서 영주로 있는 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요.”
내 말에 반스 남작이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리깔고서 침음을 삼켰다.
음, 아무래도 민감한 주제긴 하지.
말을 고르는 편이 좋으려나.
‘아니야, 여기선 직설적으로 가자.’
짧게 판단을 마친 나는 다시금 쐐기를 박았다.
“남작님께서는 스스로를 죄인의 아들로 구분 짓고 계시니까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제 꿈에 오래 있지도 않으셨을 텐데,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걸 알아채셨군요.”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반스 남작이 허탈하게 웃으며 혼잣말하듯 말을 꺼냈다.
오랜 수면 탓에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 속에 깃든 건 그만큼이나 깊고 진한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자신을 꿰뚫어 보았다는 데에서 온 게 아닌, 아주 오래전부터 그 스스로 지니고 있던 수치심.
“사실 저는 이게 신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누군가 장난질을 친 건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루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듯 일부러 음률을 담아 나긋나긋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사람들 꿈은 또 어찌나 제각각인지, 사실 이렇게 모두를 깨우기 전까지는 모든 게 불확실했어요. 그렇지만 딱 하나.”
“…….”
“이 꿈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붙잡아 놓는가.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겠더라고요.”
꿈 주인이 가장 바라는 것, 이 순간 가장 욕망하는 것.
“남작님의 꿈은, 언뜻 보기엔 영지민이 남작님과 함께 행복했으면 하는 욕망처럼 보였지만. 조금 들여다보니 다른 점을 알겠더라고요.”
“…….”
“영지민에게 사랑받는 건,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건 선대의 반스 남작이었어요.”
결국 그는 미래를 바꾸기를 택하는 대신, 과거를 탓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영지민들에게 살갑게 대했으면 어땠을까. 그들을 백성으로서 대했다면 어땠을까.’ 하며.
자신이 바꿀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제가 보기에 남작님은 그 풍경을 직접 만드실 수 있어요.”
내 말에 반스 남작의 낯빛이 착잡하게 물들었다.
그러고서 그는 몇 번이고 한숨을 푹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 아니, 저희 가문은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벌을 받을 거라 내심 예상했을 정도로요.”
“하지만 남작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잖아요.”
“방관도 죄가 됩니다. 저는 아버지가 수탈을 일삼는 모습을 보고도 방관했어요.”
그가 단호히 부정했다. 나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였다.
물론 방관도 가해긴 하지.
‘근데 어린애가 당장 뭘 할 수 있었겠어. 유스틴도 아니고.’
또래와는 달리 어린아이와 성인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해서, 힘없는 아이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설령 그의 죄가 맞다 하더라도.
“흘러간 과거를 두고 후회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어요, 남작님.”
나는 이번에도 빙빙 돌려 말하는 대신, 정직하게 직구를 던졌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네. 영지민들은 오랜 시간 고통받아 왔으니 단숨에 마음이 풀리지는 않겠죠.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죄책감을 느끼는 만큼, 더더욱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포기하지 마세요, 남작님.”
이제 와 죄를 포장하려고 하는 위선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떠하랴.
위선도 쌓이면 그건 결국 선이다.
설령 그들이 끝내 남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한 일이 흐려지는 건 아니다.
“미안한 만큼 행복하게 만들어 주자고요.”
그렇게 계속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가 꾼 꿈속의 풍경이 현실에서도 펼쳐질 수 있겠지.
* * *
굳이 따지자면 나의 주된 업무는 상담을 나누는 데에서 끝났기 때문에, 이후의 솔루션은 모두 유스틴에게 떠넘겼다.
반스 남작이 잠들어 있던 동안 통치의 공백이 주로 느껴진 부분과 경비대의 개편, 조세 개편과 복지 정책 등등.
떠나기 전 마주했던 반스 남작의 표정으로 보건대, 유스틴의 솔루션이 제법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뭐, 아무튼.
“이제 진짜 제대로 쉴 수 있겠네요!”
그래도 여행 이틀 차에 온전한 자유를 얻다니, 선방했다!
반스 남작 저택에서 나온 후 신난 목소리로 외치자, 모두 고개를 설설 내젓고서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여행 한 번도 이리 쉽게 가질 못하니, 새삼 네가 얼마나 범상치 않은 아이인지 알겠구나.”
“남은 여행은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솔직히 저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빨리 해결하기를 바랄 뿐이죠.”
“다들 평가가 너무 박하시네.”
내가 일부러 사건을 좇은 거면 또 몰라. 사건이 일부러 날 따라오는 걸 어떡하라고?
“그래도 이제는…….”
나름대로 항변을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콜록, 쿨럭!”
미처 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입에서 밭은기침이 새어 나왔다.
나는 무심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늬 하나 없이 하얘야 정상인 손수건.
하지만 그 중앙에는 떨어진 장미 꽃잎처럼 붉은 자국이 짙게 흩뿌려져 있었다.
나의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