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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90)화 (90/154)

제90화

“아우……, 머리야.”

수면제 먹고 잠자면 꼭 일어나서 머리가 아프더라.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손을 끙끙 들어 올려 머리에 가져다 댄 후, 몇 번 더 천천히 속눈썹을 팔랑였다.

그러자 희미하게만 보였던 얼굴이 이내 선명히 내 시야에 들어찼다.

“미에나, 정신이 듭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어요?”

“대공자님……?”

분명 나는 모두 지크프리트 씨 곁에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다른 사람은 여기 없는 것 같은데.

“당신의 상태를 살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할 것 같아, 내가 이곳에 오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내 표정을 읽은 양, 유스틴이 길게 숨을 내쉬고서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내어놓았다.

나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나요? 꿈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다섯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오, 의외로 빨리 깼네요.”

하긴, 지크프리트 씨와 빅토리아 씨가 결혼하기도 전에 꿈을 빠져나왔으니.

“의외로?”

내 말이 뭐가 그리 아니꼬웠는지, 유스틴이 은빛 눈동자를 흉흉히 빛내며 되물었다.

“그럼 당신은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까?”

“어……, 완전히 깨울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하루쯤? 아니면 금방 나왔을 테지만요…….”

“그렇게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그러고서는 이보다 더 분할 수 없다는 듯 입술까지 꾹 깨무는 게 아닌가.

나는 잠이 싹 달아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유스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뭐야, 왜 이래. 네가 내 아빠야?

‘아니지. 저럴 만하지.’

막말로 나였어도 유스틴이 갑자기 의식불명 상태를 자처하면 당장 당황해서 멱살을 잡았겠구나.

나는 이해한다는 듯 배시시 미소 지은 후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어찌 됐든 잘 풀렸잖아요. 나름의 수확도 있었고요. 그보다는 러셀 경의 상태를 먼저 살펴보고 싶은데, 같이 갈래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문간에서 퍽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긴 뭘 가. 내가 오면 되는데.”

“러셀 경!”

“둘 다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정말로 다행이야…….”

문 옆에 비스듬히 선 지크프리트 씨 옆으로, 부모님과 티나가 들어오며 제각각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역시 유스틴과 같이 이제야 한시름 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좀 길게 자나 싶었더니만. 그걸 못 참고 깨워 대니.”

그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직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혼자 쉬게 놔둘까 봐요?”

나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가볍게 되받아쳤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깨워 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니케를 볼 낯이 없었을 거야.”

지크프리트 씨가 장난기를 거두고서 진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는 괜스레 간질거리는 마음에 볼을 긁적이며 웃음을 흘렸다.

“아니, 뭐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헤헤…….”

“그리고 꿈에서 본 건―”

“제가 꿈에서 뭘 봤나요? 잘 모르겠네.”

에이,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아서 다 비밀 보장 서비스해 드린다니까.

이번에는 내 쪽에서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지크프리트 씨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따라 밝고 후련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퍽 듣기에 좋은 소리였다.

* * *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난 후.

나는 유스틴에게 지크프리트 씨의 꿈을 토대로 추측한 내용을 빠짐없이 늘어놓았다.

물론 그 추측의 결론은…….

“그래서, 반스 가문의 사람들을 깨우러 가겠다고요.”

“네, 어쨌든 해결법은 이제 알았으니까요.”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으니 변수는 아직 존재하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해결책은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무렴 드래곤이 준 능력인데.’

능력의 출중함이야 어르신의 방어 결계만 봐도 알 수 있지.

“너라면 당연히 그러겠다고 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조금 의외네.”

지크프리트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쓰러졌을 땐 굳이 살리려고 들지 않았잖아.”

“그야 마담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으니까요.”

게다가 그건 치명상이었다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 말에 두 사람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시인했다.

“맞아요. 그때 그렇게 공격이 반사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처음 계획대로 마담을 생포하려고 했을 거예요.”

어찌 됐든 내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잖아.

아무래도 찝찝하다고.

“근데 그건 지금과는 별개의 일이잖아요. 반스 남작은 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선대의 저주를 받은 거라면서요.”

여기서 연좌제가 웬 말이냐.

그것도 선대의 죄를 자기가 짊어지고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한테!

“지금의 반스 남작에게는 죄가 없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어요?”

“정말로 죄를 짓지 않았는지, 몰래 부정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죠.”

“그건 이후에 조사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언제는 통치의 공백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하셨으면서?”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말하자, 유스틴이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정말로 현 반스 남작이 수탈을 일삼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그냥 내가 또 나서는 게 싫은 거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언성을 낮춰 조곤조곤 덧붙여 말했다.

“러셀 경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이 저주인지 뭔지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요. 이게 정말로 신벌인지도 알 수 없고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외면하는 게 싫어서 그래요. 이걸 빨리 해치워야 남은 여행을 후련하게 즐길 수 있을 거 아녜요.”

이대로라면 루스를 만나서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을 게 분명하다고!

“……어쩔 수 없죠. 당신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있는 대로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자, 결국 유스틴이 백기를 들었다.

좋아, 먹혀들었군.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러면 우리 다시 카타르타로 돌아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스 남작가 일원의 이름이야 금방 알아 올 수 있는데요.”

“그 일가 말고도 마을에 저주받은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번 일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도 아직 찾지 못했고요.”

물론 원인까지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 번 다시 둘러는 봐야지.

그래야 깨끗하게, 맑게, 후련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지 않겠어?

“……어차피 제가 말려도 듣지 않을 테죠.”

“감사해요, 대공자님. 헤헤, 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좋아서 따라 주는 거 아니니까.”

유스틴이 한숨을 푹 내쉬고서 나를 흘겨보다가, 이내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옅은 웃음을 흘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역시 좋은 사람이라니까.

* * *

“사람이 안 보여서 그런가, 여긴 올 때마다 소름이 돋는 것 같아요.”

티나가 스산한 거리를 둘러보며 내 귓가에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그물을 일별하며 답했다.

“저주가 풀리면 이곳도 다시 활기차지겠지.”

이 사람들은 뭐가 그리 무서워서 다 숨어 버린 건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상황인데 저주에 걸린 사람이 있는지는 어떻게 알아보려고 그러니, 미아?”

어머니가 손가락 끝으로 턱을 받치고서 물었다. 아버지 역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크프리트 씨를 깨운 이후로, 어쩐지 아빠가 나를 굉장히 부담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단 말이지.

“으음, 조금 돌아다니다 보면 어제처럼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어제 만났던 노인분께…….”

이곳에 오며 생각했던 계획을 읊어 나가던 순간이었다.

“쓸모없는 자식!”

어린아이의 새된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골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희 할아버지가 돌팔이 주술사라 저주도 못 푸는 거라며?”

“쓸모없는 주술사의 손자니까 너도 쓸모없는 자식이네!”

“평소에 우리한테 그렇게 으스댔으면서, 돌팔이 주제에.”

오, 이거 아무래도 집단 괴롭힘의 현장인 것 같은데.

“러셀 경.”

나는 곧바로 지크프리트 씨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팔을 뻗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는 내 의중을 알아챈 듯 혀를 한 번 쯧, 차고서 가볍게 나를 안아 들었다.

좋아. 현행범 체포 가 보자고.

“크흠.”

이윽고 골목 어귀에 다다른 후,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서 아이들 무리를 향해 꽥 소리를 내질렀다.

“야, 이놈들아! 할 일이 없어서 비겁하게 집단 따돌림 짓을 하냐!”

그럴 시간에 집에 가서 저주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더 해라!

“뭐야? 어떤 놈이…….”

내 도발기가 제법 멋지게 적중했는지, 곧바로 무리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어쭈, 표정이 꽤 살벌하네.

그래 봤자 내 등 뒤에 있는 아저씨의 험악함을 따라갈 순 없지만.

“……좋은 말로 할 때 애 두고 가라, 꼬맹이들아.”

때맞춰 지크프리트 씨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서 짧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잔뜩 겁에 질린 낯으로 하나둘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이, 이익…….”

“비켜! 도망가!”

친구 내버려 두고 도망가는 모습 좀 봐. 요즘 애들은 의리가 없어요.

“저기, 괜찮아?”

이내 나는 지크프리트 씨의 품에서 내려와 홀로 남은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

그러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있던 아이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응? 잠깐만.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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