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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86)화 (86/154)

제86화

“잠에서 깨지 않는다고요?”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나지 않는다더군요. 그러면서도 숨은 제대로 쉬고 있으니 죽은 건 아니고요.”

그렇다면 혼수상태인가? 뇌사?

하루아침에 일가 모두가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그것도 모두 동시에?

‘확실히 부자연스러운데.’

잠복기를 따져 본다고 해도 이건 이례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전염병이 아니라 신벌이다’라고 생각할 법한걸.

심지어 드래곤과 마법, 신과 기억을 읽는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니 오히려 이쪽이 더 신빙성 있는 것 같고.

‘전염되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하마터면 내가 우리 가족을 함께 골로 보낼 뻔했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억지로 무언가를 먹일 수도 없으니 조만간 굶어 죽고 말겠지요.”

내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이, 노인이 조곤조곤 말했다.

이윽고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유스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마을이 이렇게까지 조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번에도 또 비판적 질문이군.

하지만 저도 마침 그게 궁금한 찰나였으니 나이스 질문입니다, 학생.

“모두 두려운 게지요.”

유스틴의 물음에, 노인이 아이의 머리를 다시금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눈앞에서 신벌이 내리는 걸 본 데다, 언제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니 공포에 떨 수밖에요.”

“…….”

“사람인 이상 저마다 잘못한 부분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자글자글 피어난 주름 사이로 파묻히듯 드러난 눈동자가 나를 지나쳐 제 품에 안긴 아이에게 향했다.

남자아이는 소처럼 큼직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이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하긴, 사람인 이상 어떻게든 죄를 짓기 마련이지. 그게 용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아닌지로 나뉠 뿐.

“어찌 됐든 먼 곳까지 찾아온 손님을 박대할 수는 없지요. 묵을 곳이 필요하시다면 부족하나마 저의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난 후, 그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동시에 일행의 시선이 모두 내게 꽂혔다.

뭐야, 왜 다 나를 보는 건데.

최종 결정권을 이렇게 넘긴다고?

“아, 저희는…….”

나는 그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듯하네요.”

“그러시군요. 그럼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자못 미안하다는 듯 말하자, 그는 선선히 수긍하고서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두 사람의 빈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미아…….”

갑작스럽게 마주한 시선들에 당황해 입을 뻐끔거리려니 아버지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는 네가 이곳에 더 머무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아가씨의 낭만이지 않을까 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티나.”

“꽤 의외군요.”

“그러게, 진짜 의외네.”

이윽고 티나와 어머니, 그리고 유스틴과 지크프리트 씨까지 저마다 한마디씩 툭툭 내뱉었다.

나는 더더욱 어이가 없어져 입술을 옹졸하게 오므렸다.

이 사람들, 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전염병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겠지만, 전염병도 아니고 대안도 있으면 당연히 다른 곳으로 가야죠. 이런 사정을 알았는데 여기서 어떻게 기분 좋게 휴가를 보내겠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내 말에 아버지가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내 이미지가 단단히 잘못 박힌 것 같은데, 이걸 대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한담.

“혹시 몰라 명단에 적힌 지역에 모두 마차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미리 연락을 넣어 뒀으니, 당신은 가고 싶은 곳을 고르면 됩니다.”

곧이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유스틴이 내가 들고 있던 명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향해 있던 눈초리를 거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 8세를 기다리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테니, 조금 빡빡하게 움직여야겠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의 낮은 탄식 소리가 배경음처럼 허공에 울려 퍼졌다.

나는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명단을 쭉 훑어보았다.

흥, 제일 먼 곳으로 골라야지.

* * *

두 번째 여행지는 다행히 전염병도 가문의 불화도 없는 평범하고 소담한 마을이었다.

카타르타에 견줄 수 있는 아름다운 해변과 바다, 그리고 지역의 특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여관까지.

내가 생각했던, 애초에 계획했던 바로 그 여행이 틀림없건만.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와 비행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을 텐데.”

모든 일정이 끝난 저녁.

발코니에 상체를 기댄 채 철썩이는 파도를 구경하고 있으려니, 유스틴이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티나가 들여보내 줬나 보네.

“카타르타를 떠난 이후로 제대로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이유는 당연히 이거겠고.

나는 그가 건넨 약병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그사이 유스틴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껏 이 나를 끌고 왔으면 제대로 놀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는 대공자님도 계속 다른 생각에 빠져 계시지 않았나요?”

내가 알기로 너도 그 뒤로 계속 정신이 콩밭에 가 있었거든.

그래서 티나가 일부러 우리를 붙여 둔 걸 테지. 하여간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내 말에 유스틴이 손가락을 제 인중에 가져다 대며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리깔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포근한 달빛이 내려앉은 탓인지, 유스틴은 평소보다 조금 더 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통치의 공백을 인지한 이상, 그곳의 영지민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곧이어 그가 아래로 촘촘히 향해 있던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유한 분위기는 무슨.

그냥 달빛을 받은 평소의 유스틴이구나.

“하지만, 그보다는…….”

꿈속에서처럼 당장 기절시켜서 이놈을 쉬게 만들어야 하나 깊이 고민하는 사이, 유스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고서 그는 무언가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계속 신경 쓰였던 것 같습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저 없이, 하지만 어쩐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또 이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설까 봐서요.”

“엇.”

갑자기 말이 또 이렇게 튀네?

물론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으, 아무래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해결하는 게 좋잖아요. 꿈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저한테도 마땅한 방법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솔직히 대공자님이 저였어도 똑같이 생각했을 거 아니에요.”

내가 너만큼은 아니지만, 양심적으로 네 과에 가깝다는 건 인정하거든? 우리는 따지고 보면 동족이야.

“맞는 말이네요.”

이내 유스틴이 순순히 시인하고서 덧붙여 말했다.

“어째서인지 당신에게는 항상 일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곧바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대공자님을 포함해서요.”

“네, 저를 포함해서요.”

그러자 유스틴 역시 눈꼬리를 휘며 장난기 담긴 목소리로 내 말을 되뇌었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유스틴이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밤에 만난 적이 없어서 그런가. 달빛 아래에서 마주한 적은 처음이라 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저 웃음에 담긴 알 수 없는 감정이 낯선 걸까?

“아무튼.”

괜히 어색한 마음에 눈동자를 되록되록 굴리고 있으려니, 유스틴이 곧 평소와 다름없는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여행을 온 동안만이라도 푹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상념을 훌훌 벗어던지고서 방긋 미소 지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말 그대로 돌려드려도 될까요?”

내가 널 여기 왜 데려왔다고 생각하니.

“이번 여행에서는 제가 쉬면 대공자님도 쉬는 거고, 제가 일하면 대공자님은 쉬는 거예요. 아시겠죠?”

“잠깐, 마지막 말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진짜로 내가 일을 할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왕 루스의 꿈 범위에 맞춰 여행하러 온 이상, 취지에 맞춰 기껏해야 루스 보러 가는 것밖에 더 안 할 텐데.

‘게다가 살펴보러 가고 싶어도 정확한 이름을 모르니 당장은 어려워서.’

유스틴한테 물어봤자 대답 안 해 줄 게 뻔하니.

“어쨌든, 바닷가 근처는 아직 날이 선선하니 적당히 보고 푹 쉬세요.”

곧이어 유스틴이 내게서 약병을 빼앗아 들고서 몸을 돌렸다.

나는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키득거렸다.

내일은 모두의 소원대로 푹 쉬어 줄 테니, 다들 좋은 밤 되시길.

그리고 이튿날 아침.

“……러셀 경?”

지크프리트 씨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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