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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85)화 (85/154)

제85화

“꼭 유령 마을 같네요.”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린 티나가 부모님을 부축해 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구나.”

아버지 역시 조금 당황한 낯빛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보고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어째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네.

‘뭐가 이렇게 한산해?’

이 정도면 티나 말대로 정말 유령 도시 같은데.

“모두 마을 광장에 모인 걸까요?”

“그랬다면 광장 쪽이 시끌벅적했겠지.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

“이상한 일이네요…….”

티나와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아니, 내가 책에서 읽었던 거랑은 말이 다르잖아!’

여행기에서는 분명 여기가 조금 소박해도 활기찬 곳이라고 했는데?

경관이 아름답고 작은 항구도 있어 여행객들이 가끔 찾아오는, 나만 알고 싶은 여행지라고 했는데?

여행지 추천 도서는 믿는 게 아니라더니!

“노는 건 고사하더라도, 일단 묵을 곳을 찾는 것부터가…….”

급기야 지크프리트 씨마저 설설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는 다시금 말고삐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살펴보던 유스틴은…….

“다시 숲으로 돌아가죠. 혹시 모를 변수를 생각해 이외에도 여러 대안을 생각해 놨으니까요.”

한 점 동요의 기색 없이 곧바로 말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윈프리드 거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추산해 반경이 닿는 곳 중 해변이 있는 지역을 몇몇 추려 봤습니다. 아마 당신이 찾아본 곳과 비슷할 것 같지만, 우선 명단부터 확인해 보시죠.”

그러고서 언제 준비한 건지도 모를 두루마리 종이를 품 안에서 꺼내 내게 건네는 게 아닌가.

나는 물 흐르듯 이어진 유스틴의 일련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툭 말을 내뱉었다.

“대공자님, 혹시 제 여행이 잘못될 거라는 확신, 뭐 그런 걸 갖고 계셨던 건 아니죠?”

“설마 그럴 리가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준비되어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당신과 동행할 때마다 자꾸 일이 생기는 것 같아 조금 더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이번엔 정말 제 의지가 아니에요.”

누가 놀러 와서까지 사건 사고에 휩쓸리고 싶겠어. 내가 살인 사건 전문 담당 탐정도 아니고.

괜히 억울해지는 마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던 찰나였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일순,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목소리가 채 흩어지기도 전에 먼저 반응한 것은 지크프리트 씨였다.

“……!”

스르릉, 검집이 열리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검신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겨누어졌다.

이 모든 게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상황이었다.

나는 순간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다가, 검 끝에 겨누어진 사람을 확인하고서 황급히 지크프리트 씨의 팔을 잡아끌었다.

“검 거두세요, 러셀 경! 어린애잖아요!”

어린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던 사람 맞아? 왜 저번부터 애한테 자꾸 검을 겨누지?

“으잉?”

그제야 지크프리트 씨가 저조차도 깜짝 놀란 듯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보니 어린애라는 자각 없이 검부터 겨누고 본 거였군.

“이 아이한테서 수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검을 거두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러셀 경.”

이어 유스틴이 아이를 빤히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언뜻 듣기엔 아이를 두둔하는 것 같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지.

저건 수상한 점이 느껴지면 당장 처리하라는 소리야.

“아니,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내 감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면 보통은 적이니까……. 미안하다, 얘야.”

곧이어 아이를 몇 번이나 찬찬히 뜯어본 지크프리트 씨가 결국 검을 거두며 변명과 사과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아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아이는 제 목에 검이 겨눠졌다는 사실이 퍽 당황스러웠는지, 커다란 눈을 한껏 동그랗게 뜬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겁먹었네.’

이걸 어떻게 달래야 좋으려나.

“미안해. 놀라게 하거나 해치려는 건 아니었어. 많이 놀랐지? 괜찮아? 다친 데는 없니?”

우리 집 아저씨가 조금 예민해.

이번처럼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살기가 느껴졌다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격 태세부터 갖추고 그러거든.

“네, 네에…….”

내 말에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도 눈동자가 파랗네.

어쩐지 루스가 생각나는걸.

“미에나.”

바로 그때, 유스틴이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아채며 핀잔하듯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심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스를 닮아서 나도 모르게.

“우리는 여행을 왔는데, 혹시 이 근처에 머무를 만한 곳이 있을까?”

이내 나는 뻗었던 손을 원위치하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우물쭈물 말을 내뱉었다.

“원래는 저어쪽에 여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염병이 돌고 있나?”

동시에 유스틴이 나를 제 뒤로 밀어 넣은 후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전염병이라고?

“전염병이라면 마을을 봉쇄해야 하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는…….”

와이번을 타고 왔지.

봉쇄를 해 봤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걸 어떻게 막으랴.

‘어떻게 된 게 매번 이 모양이지?’

내 인생은 이미 꼬일 대로 꼬였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게 매일매일 새롭게 일이 터지지? 그것도 갑자기 올해부터?

정말 삼재인가?

“으, 아아…….”

진짜 미쳐 버리겠네!

어르신의 결계로 전염병까지 막아지나? 나는 괜찮다고 해도 티나와 가족은? 지크프리트 씨는? 유스틴은!

아니,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우선 각자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전염병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채 말을 끝마치기 전에, 이번에는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이는 얼굴에 검버섯이 여럿 피어오른 연로한 노인이었다.

“할아버지!”

내내 우리의 눈치를 보던 아이는 노인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뛰어 들어가 안겼다.

좋은 보호자가 있어서 다행이네.

“외지인이 여기까지 발을 들인 것을 보니,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나 보군요.”

곧이어 그가 우리 일행을 날카롭게 훑어보며 말을 건넸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

이건 그쪽의 문제가 아닌데도.

“전염병이 아니라면 외부인의 출입을 특별히 통제할 이유가 더 있나?”

유스틴이 여전히 날 선 태도로 질문했다.

“통치에 공백이 생겨 영지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당연히 출입을 통제할 수밖에 없지요. 그마저도 이제는 무실한 모양이지만,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전부터 관리가 부실했던 모양이네. 그렇다면 모른 척 넘어가야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까.

“전염병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아버지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를 지크프리트 씨의 곁으로 보내며 물었다. 지크프리트 씨는 자연스럽게 티나에게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내 입과 코를 막아 주었다.

노인은 나와 집요히 시선을 맞추면서도 성실하게 답을 내어놓았다.

“이건 신벌이니까요.”

“신벌?”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없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전염병은 아니고 신벌입니다, 라니.

‘이 세계 사람들은 보통 신벌과 전염성을 동일시하지 않나.’

전염병이 돌면 신이 노하셨다고 하면서 온갖 이상한 짓을 하기 마련이니까.

“신벌을 받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던 영지민 대다수는 지금까지도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동시에 신벌이 내려진 이후로, 지금까지 또 신벌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신벌이라는 걸 받은 사람이 혹시…….”

“이 영지의 주인인 반스 남작과 그 일가입니다.”

“아하.”

이번에는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깊게 팬 그의 미간 주름을 바라보며 입술을 오므렸다.

확실히 일반적인 전염병과는 그 양상이 다르긴 한데.

“선대 반스 남작은 세금을 과하게 걷거나 영지민들을 박대한 탓에, 저희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 대의 영주는 선대를 답습하진 않았지만, 배우고 자란 게 있을 테니 언제 바뀔지 모르는 노릇이지요.”

노인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설설 쓰다듬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천벌을 받아 마땅한 가문이었습니다.”

즉, 이 일을 모두 그 반스 남작 일가의 업보로 생각한다는 거군.

‘그것도 연좌제라.’

나는 판단을 마친 후 발언권을 획득하기 위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기서 하나 질문 타임!

“일가 전체가 같은 증상을 보였다면, 신벌이 아니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병이나 특정 상황에서 전염되는 병일 수도 있지 않나요? 아니면 독이라거나…….”

유전병일 수도 있고, 그 집안의 식탁에 독이든 뭐든 올라온 걸 수도 있고.

“글쎄요, 적어도 이 늙은이는 그걸 ‘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이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하지만 노인은 내 말을 가볍게 부정했다.

그걸 ‘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애초에 병이라고 말할 만한 특별한 증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내 궁금증을 읽은 건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에서 깨지 않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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