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우리 조금 전까지 사람 찾는 이야기 하고 있지 않았니?
그런 상황에서 냅다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금 주제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여행이라니, 지금 나올 주제는 아닌 것 같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국외 은행 설립 건이 끝나면 더는 일을 벌이지 않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당신이 직접 말했잖습니까.”
“아니, 그건 그런데…….”
치사하게 그 발언을 들고 오다니.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스틴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어차피 지금은 티파티는커녕, 당분간 혼자서는 바깥에 돌아다니지도 못할 텐데. 지금 당장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습니까.”
“분한데 반박을 못 하겠네요.”
언젠가는 저 신랄하고 객관적인 조동아리 때문에 화를 입으리라.
괜히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댓 발 내밀자, 그가 다시 한번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서 달래듯 입을 열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찾고 있으니 당신은 걱정하지 말고 쉬면 됩니다. 최근에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이제는 당신도 좀 쉬어야죠.”
“아니, 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니까요.”
말을 마친 유스틴이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평소의 효율 추구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라니. 당연한 말이긴 한데…….
“대공자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어쩐지 어색한데요.”
나는 참지 못하고 목구멍을 배회하던 말을 툭 내뱉었다.
그러자 유스틴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리깔며 담담히 대답했다.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더군요. 가문의 수식어가 ‘철혈’이니만큼 이상할 건 없지만―”
곧이어 그가 오묘하게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서 말을 이었다.
“사람인 이상 소중한 게 하나쯤은 생기기 마련이고.”
“…….”
“에버딘도 결국에는 사람인데 말이죠.”
순간, 내게 향한 시선이 어쩐지 집요하게 느껴졌다.
눈을 한 번 깜빡하자 사라질 정도로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누구한테 친구 없다고 한 소리 듣기라도 했나.’
어쩐지 요상한 기분에 몇 번씩이나 빠르게 눈을 깜빡이고 있으려니, 유스틴이 평소와 다름없는 담백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아무튼, 이제 당분간은 당신을 오가라 할 일도 없으니 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사실 대공자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기는 했는데요.”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진짜예요. 갑자기 주제가 여행으로 건너뛰어서 당황했을 뿐.”
상식적으로 미아 찾기 캠페인 하는데 ‘너는 쉬어’라고 하면 쉬려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지 않겠니.
내 말에 유스틴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틈을 타고 나름대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최근에 부모님께 제 능력에 대해서 모두 밝혔거든요. 저번에 그럴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요. 아무튼, 그때 모두 이야기하면서 루스……, 제가 찾는 아이에 관해서도 말했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두 분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서―”
“과정은 됐으니 결론을 말하세요.”
“그 아이의 꿈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휴양지로 여행 가기로 했습니다.”
하여튼 결론 참 좋아한다니까.
요청대로 부모님께서 루스의 사정을 가여워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로 약속한 부분이나, 범위가 닿을 만한 지역을 찾겠다고 열심히 꿈을 돌아다녔던 사실은 빼 드렸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괜스레 속 시원한 마음에 입가에 뿌듯한 미소를 내걸었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되는 일을.’
나는 왜 이렇게 혼자 전전긍긍하면서 세 마리 토끼를 몰래 잡으려고 했던 걸까.
“내게는 꿈에서 쉬라고 했으면서, 당신은 여행을 간 상황에서도 계속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사이 유스틴이 따지듯이 물었다.
심지어 그 뽀얀 미간 사이에는 작은 주름마저 패여 있었다.
아니, 이번엔 왜 또 갑자기 이야기가 그쪽으로 향하는 거야?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 논리라면 저 역시 한 번도 일한 적 없는 사람이 되겠군요.”
“에이, 비약이 너무 심하시네!”
자원봉사랑 일이 어떻게 같아.
물론 내가 루스를 돌보는 건 자원봉사가 아니지만.
“일이 아니고 친구랑 노는 거예요. 그 아이랑 같이 있으면 저도 즐겁고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뭘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정말로 내게는 힐링 타임이나 다름없단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잠깐 풀어졌던 유스틴의 얼굴이 다시금 뚱하게 물들었다.
왜, 뭔데. 이번에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
“……친구.”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내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유스틴이 돌연 단어 하나를 입 밖으로 꺼냈다.
나는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고서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 맞다. 얘 나 말고 친구 없지.’
그런 상황에서 ‘난 너 말고 친구 또 있지롱’이라는 재수 없는 자랑질을 늘어놔 버리다니.
아이고, 내가 이런 실수를!
“그, 그래서 말인데요, 대공자님!”
이 주제는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꽝, 내리쳐 그의 시선을 집중시킨 뒤 재빨리 말을 내뱉었다.
“이번 여행에 대공자님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실까요?”
“예?”
동시에 유스틴이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좋아, 화제 전환 한번 훌륭하고.
“이번 여행에 대공자님도 함께 갔으면 싶어서요. 사실 부모님과도 반쯤은 상의가 끝났고요.”
“당사자의 동의 없이 어떻게 상의를 했다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죠. 대공자님도 당분간은 급한 일 없다면서요. 저한테 직접 그렇게 말했으면서?”
“저는 당신이 부탁한 사람을 찾아야…….”
“사람을 시켜 찾고 있다면서요. 그건 결국 대공자님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소리잖아요?”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다고 결과가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급하면 바로 리처드 타고 돌아오면 되니까.
‘나 몰아간다고 즐거웠지, 요놈아.’
이번엔 네 차례다.
“사실 예전부터 계속 신경 쓰였거든요. 저한테는 항상 쉬라고 하면서, 정작 자기는 쉬지도 않고 일하고.”
“아니, 그건…….”
“그러다 저번처럼 또 병나요.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건 대공자님도 싫잖아요? 그러니 쉴 때 확실히 쉬어 줘야죠.”
이건 거절 못할걸.
“이참에 함께 재밌게 놀고, 푹 쉬고 옵시다. 친구끼리.”
마지막 단어가 내뱉어짐과 동시에, 온갖 불만을 털어 내려던 유스틴의 입이 합 다물어졌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입가에 내걸며 사르르 눈을 휘었다.
좋아, 계획대로군.
* * *
험난한 산길을 오르느라 덜컹거리는 마차 안, 기대에 찬 낭랑한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당연하게도 내 목소리였다.
“사실 전부터 바다에 꼭 가 보고 싶었어요. 그림으로밖에 본 적이 없어서,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헤헤.”
전생에서도 바다는 몇 번 못 가 보기도 했고.
루스한테 바다를 알려 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한 번 본 동해를 가져올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고.
“그쪽 바다는 무척 반짝반짝하겠죠? 파란색일지 초록색일지도 궁금해요. 아니면 에메랄드?”
여기는 아직 미세먼지도 없고, 환경오염도 심하지 않으니 더 예쁘겠지.
“저, 미에나. 다 좋은데 말이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는 동요를 흥얼거리던 찰나, 아버지가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바다로 간다면서, 왜 계속 산으로 가고 있는 거니? 게다가 멀쩡한 마부를 두고 지크더러 마차를 운전하라고 한 이유도…….”
“아, 그거.”
어린아이의 설렘과 신남으로 대충 얼버무리려 했는데, 안 넘어가는군.
이래서 눈치 빠른 어른이란.
“도착했다.”
때마침 지크프리트 씨가 마차를 멈춰 세우고서 말을 건넸다.
그러고서 그는 나를 한 번, 유스틴을 한 번, 티나를 한 번,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한 번 바라본 후.
“죄송합니다, 정말로.”
한숨을 푹 내쉬며 진심 어린 사과를 내뱉었다.
나는 의아함이 피어오른 티나와 부모님의 얼굴을 살피며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이제 슬슬 밝힐 때가 되었군.
“물론 저희는 바다에 갈 거예요.”
이내 지크프리트 씨의 품에 안겨 마차에서 내린 후, 나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마차로 이동하는 건 비효율적인데다, 체력적으로 부담도 되는 게 사실이라서요.”
“가끔 미에나가 저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두려워진다오, 부인…….”
아버지가 희게 질린 얼굴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착한 아이니까 무서워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다고 소리 지르진 마시고요. 괜히 큰 소리 냈다가 애가 놀라기라도 하면 조금…….”
“진짜 죄송합니다, 여러분.”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뒤이어 쿵쿵, 지축을 뒤흔드는 땅울림을 배경음악 삼아,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팔을 쭉 벌렸다.
“이번 여행을 도와줄 친구, 리처드 8세예요.”
동시에 나를 발견한 김 리처드 8세가 헤벌쭉 웃으며 내게 얼굴을 비볐고.
“신이시여…….”
외마디 감탄사와 함께, 아버지가 그대로 혼절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