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내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제각각 묘하게 바뀌었다.
참, 가장 중요한 걸 안 말해 줬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덧붙여 말했다.
“아, 걱정하지는 마세요. 저는 저택에 있는 사람들 꿈에는 안 들어가니까요.”
프라이버시 존중해 드립니다.
괜히 들어갔다가 말 못 할 무언가를 봐 버리면 서로 어색해지잖아요.
“에버딘 대공자님이 이곳에 찾아오게 된 이유도, 그가 저를 후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결국엔 이 능력 때문이에요. 지크프리트 씨도…….”
“저 능력으로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지.”
“네에, 그렇다네요.”
그렇게까지 말해 주실 줄이야.
‘조금 쑥스러워지는데.’
나는 지크프리트 씨의 시선을 피해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천천히 그간의 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패트릭 존슨의 유산을 찾을 수 있던 이유도, 유스틴의 꿈에 들어가 그를 재우다 보니 연을 맺게 된 이야기도.
이 능력을 바탕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누구를 만났는지.
물론 부모님이라고 해서 모든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리넥스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함구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중점으로 그들의 궁금증이 풀릴 정도로만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부터 발 벗고 나섰으면 가세가 그렇게 기울 일도 없었을 테고, 어머니도 저택을 떠나 타지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내심 하고 있던 후회까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움직여서 죄송해요.”
하다못해 그전에 멈추라고 말만 했어도, 두 분을 말렸어도 고리대금까지 손대지는 않으셨을 텐데.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걸까?’
만약 내가 제때 수습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해할 수 없구나.”
그때, 내내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 단호하고 중후한 목소리에는 옅은 노기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모두 내 욕심으로 벌인 일인데, 왜 애꿎은 네가 죄책감을 가진단 말이냐.”
“하지만…….”
“네가 아프고 싶어서 아프겠느냐? 오히려 가장 힘든 건 너였을 텐데, 왜 미련하게 우리를 걱정해?”
언제나 다정했던 아버지의 눈동자는 분노와 당혹감, 그리고 나와 같은 죄책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내 딸인데, 내 자식인데 천금을 털어서라도 살리고 싶은 게 당연하잖니. 이건 우리가 선택한 일이지, 네가 강요한 게 아니야.”
어머니 역시 특유의 단단한 음성으로 핀잔하듯, 동시에 흔들리지 않은 애정을 담은 채 말을 건넸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설령 정말 가문이 무너졌어도, 그건 결코 네 잘못이 아니란다.”
“저는…….”
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는 쪽이었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저는 원래 죽을 운명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내가, 반대로 그 말을 듣게 되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가장 힘들었을 사람들한테.
지크프리트 씨도 내게 말했었다.
‘네가 아프고 싶어서 아팠겠느냐’고.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말로, 그가 건네는 위로와 부모님이 내게 해 주는 말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서…….
“내가 네게 짐을 지웠어.”
곧이어 아버지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아가. 내가 미안해…….”
“아니, 아니에요.”
당신들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우리 모두 잘못한 건 없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서로가 원치 않던 죄책감을 붙잡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살아온 걸지도 몰라요.
“제, 제가 그냥 가만있기 힘들어서 그랬던 일인데요. 그리고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정말로 즐거웠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하지만 지난 일을 붙잡으며 사과를 건네는 건 또 다른 자책을 낳는 것밖에 더 안 되는 일이라.
나는 짐짓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해맑게 입을 열었다.
“시작의 이유는 그렇다고 쳐도, 다양한 사람도 만나고 제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지금도 정말 행복해요.”
“미아…….”
“저는 지금이 제일 즐거워요. 그러니까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크프리트 씨에게 했던 말을 부모님에게 직접 전하려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혹시 내가 오랜 지병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내심 무서웠는데.
“우리에게 사실을 말해 줘서 고맙구나.”
두 분은 내 말을 단 한 글자도 허투루 듣지 않고 끝까지 경청해 주었다. 나를 존중해 주고, 이해해 줬다.
그게 너무 감사하고, 또 기뻤다.
“가끔은 꿈에 들어와 주렴. 네가 저택을 나가 있을 땐 얼굴을 보지 못하잖니.”
이윽고 한참을 내 뺨을 쓰다듬던 어머니가 가볍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말갛게 미소 지으며 자그맣게 대답했다.
“헤헤, 네에…….”
하지만 제가 어찌 두 분의 해피 타임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정말로 더는 눈을 뜰 힘도 존재치 않을 때.
그때는 꼭.
“찾아갈게요.”
“그래, 그래.”
내 말에 두 분이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내 머리며 볼을 연신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을 느끼면서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조금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라니.
“그건 그렇다 치고.”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네 말대로라면 이번 일은 결국 네가 직접 계획했다는 뜻이구나…….”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손가락이 갑작스레 내 볼을 꼬집었다.
“으에?”
잠, 잠깐만.
우리 아까까지 분위기 좋지 않았어요?
“어어이……?”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구나.”
“어아! 저 한댜!”
엄마, 저 환자예요!
* * *
신명 나게 털렸다.
그냥 털린 것도 아니고, 아주 탈탈 털렸다. 비 오는 날 먼지 날 정도로, 아주 탈탈탈.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거길 겁도 없이 쳐들어가!’
‘우와악! 러셀 경! 호위!’
‘아, 그래. 자네도 이리 좀 오게! 애가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면 옆에서 말릴 생각을 해야지! 그걸 옳다구나 하고 따라가?’
‘아니, 부인, 그게 아니고……. 형님, 좀 도와주십쇼!’
‘……더 하시오,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