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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75)화 (75/154)

제75화

아니, 이 저택 사람들은 다들 ‘소리 안 내고 걷기’ 특강 같은 걸 받나?

왜 다들 기척도 없이 뒤에서 나타나고 난리야!

‘일단 침착하자.’

비록 돌봐야 할 인원이 내 예상보다 많아지기는 했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도망갈 수는 없어.’

내 몸 상태야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 역시 오래 갇혀 있던 탓인지 걸음이 그리 빠르지 않았다.

괜히 등을 돌려 도망가다가 약점을 노출하느니, 여기서 클레어나 지크프리트 씨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손을 뻗어 아이들을 내 등 뒤로 보낸 후, 평소와 같이 미소 지으며 마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마담. 오늘은 마중을 나오지 않아 길을 헤매고 있던 참이었어요.”

“어머, 그랬나요. 분명 제가 하인에게 레이디를 제 연구실로 정중히 모시라고 했는데 말이에요.”

마담 아페르타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사근사근 말을 건넸다.

“그런데 왜 레이디가 이곳에, 그것도 이 아이들과 함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이 시기 아이들은 다 호기심이 강하잖아요.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죠, 하하.”

“마치 자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화법이군요. 제가 여태까지 마주했던 레이디와는 꽤 괴리가 있는데…….”

곧이어 그녀가 타오르는 듯 붉은 눈동자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이게 바로 레이디의 본모습인 거겠지요. 정말 흥미로워요.”

아유, 눈빛 봐. 두 번 흥미롭다가는 사람 죽이겠네.

나는 마담을 따라 덩달아 눈꼬리를 휘며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숨길 이유가 뭐 있나 싶어서요. 그런데 그렇게 놀라지 않으시네요.”

말투를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역시 제 연기가 어색했나요? 그랬다면 어느 부분이 어색했는지 알려 주실래요? 나중에 보완하려고요.”

일부러 도발하듯 내뱉은 말에, 마담이 여전히 담담하고 우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연기는 무척이나 훌륭했습니다. 저도 이렇게 레이디를 직접 마주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요. 다만…….”

“다만?”

“전부터 조금 의아했을 뿐이에요.”

곧이어 그녀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덧붙였다.

“에버딘 대공자가 이런 철없고 멍청한 아이를 약혼자로 삼을 정도로 취향이 독특하진 않을 텐데, 하고.”

“아하하, 예리하시네요.”

그 이유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군.

“그리고 또.”

유스틴 에버딘의 여자 취향에 대해 잠깐 생각하는 사이, 마담 아페르타가 흐트러진 주의를 제게 집중시키며 짧게 끊어 말했다.

“욕망이 담긴 눈동자는 쉬이 숨겨지지 않는 편이라서요.”

“…….”

“당신도, 당신이 데려온 그 아이도. 바라는 게 있어 보이던데.”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뱀처럼 느릿하게 몸을 훑고 지나간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찔 굳으려는 몸을 애써 이완하며 배시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눈빛까지 숨기는 게 좋다는 이야기군요, 감사해요. 이제야 좀 제대로 된 조언을 듣네요.”

“별말씀을.”

“그래서 더더욱 이상하네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으면, 사람인 이상 조금은 사리는 게 정상인데.”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굴 줄이야.

짐짓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마담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레이디가 그러는 것처럼 저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요.”

“우와, 대단하셔라.”

물론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현재 나는 유스틴의 약혼자 자리를 꿰차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걸 무시하고 제 계획을 밀고 나갈 정도의 믿는 구석이라.

‘설마 황제인가?’

그러면 살짝 골치 아파지는데.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가져간다면 아무리 황제라도 마담의 죄를 덮어 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당신이 이런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저도 굳이 건드리려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추측을 이어 나가던 찰나, 마담 아페르타가 눈꼬리를 요염하게 휘고서 다시금 주의를 환기했다.

그러고서 그녀는 어느덧 내 곁에 서 있는 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잭과는 대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걸까요? 저 아이가 이렇게 나서서 남을 도울 줄은 미처 몰랐는데. 그것도 내 심복을 해치면서까지.”

마치 제 철없는 자식을 나무라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온화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달큼한지, 심지어 애정이 깃들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심복을 해치면서까지’라니.

내가 잭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내 옆에 선 잭을 흘깃거렸다.

“저는…….”

그는 여전히 미간을 한껏 좁힌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어쩐지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는 것 같은데.

이 사람 괜찮은 거 맞나?

“이렇게 떼까지 쓰고.”

마담 아페르타의 입가에 피어오른 미소가 한층 짙어지자, 잭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지난한 고통을 애써 감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흐윽…….”

이 상황이 무서운 건지, 내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아이들 역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게 찰싹 달라붙은 아이들을 양팔로 엉거주춤 끌어안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설마…….

“그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주인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아이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잭에게서 시선을 돌리고서 온화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걸, 꼭 한 번씩 반항한단 말이야.”

그 미소가 초상화 속에서 마주했던 모습과 똑같아,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무섭다기보단 소름 끼쳤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해 직접 그림까지 그려 가며 청혼했다는 제 남편에게도 저렇게 대했을까 싶어서.

“어쨌든, 이왕 이렇게 솔직하게 서로를 드러낸 김에, 진솔하게 거래를 요청해 볼까요.”

곧이어 마담이 핏빛 눈동자를 온전히 내게 고정하고서 말문을 열었다.

“거래요?”

“저를 홀리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당신이 제게 말해 준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이 아니었어요.”

“그거야…….”

당연하지. 적당히 진실을 섞지 않으면 속지 않을 테니까.

“레이디의 건강은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거지요? 원인은 저번에 말해 줬던 바로 그거일 테고요.”

“아야, 아픈 곳을 건드리시네요.”

가차 없기도 하셔라.

짐짓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실력 좋은 의사라고 한들, 아무리 능력 있는 치료 마법사라고 한들. 당신의 그 병을 고칠 수는 없었겠지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야 이쪽 분야를 연구하고 있으니까요.”

인간 납치 실험을 지금 ‘연구’라고 말한 거냐, 이 매드 사이언티스트야.

진심으로 경멸을 담아 노려보았는데도, 마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라면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돌고 돌아 결국 이 이야기야?

“절 찾아온 의사며 마법사도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했는데 말예요.”

그런데도 내 몸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인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저는 다릅니다. 그들은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으니까요.”

내 날 선 반응을 모두 예상했다는 듯, 마담 아페르타가 생긋생긋 웃으며 속삭이듯 본론을 꺼냈다.

“제가 연구하는 건 개인의 마력을 추출해 다른 사람에게 심는 일입니다. 잭, 저 아이가 바로 그 실험의 첫 성공작이지요.”

“그런 것치고는 성공작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것 같은데. 이미 성공한 연구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이 세계에선 반쪽짜리 결과도 성공작이라고 부르나 보지.

‘이런 사람을 지구의 대학원으로 보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연구하면 네이처는커녕 교수님 책상에도 못 올라가요.

“좋지 않은 그릇을 쓰니 그랬던 거지요. 실험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불확실한 실험에 제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끔찍한데요……. 듣자니 그 실험에 끌려가 죽은 아이들만 하더라도 이 저택을 가득 채우고도 남겠던데.”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어디서 듣긴, 너 때문에 죽은 환생자한테서 들었지.

“그럼 이렇게 할까요.”

내가 무슨 말을 들어도 현혹에 넘어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마담이 작게 콧소리를 흘리고서 말했다.

“제 실험에 동참해 준다면, 이 저택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풀어 주죠.”

“…….”

“어때요, 당신에겐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닌가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애들 목숨을 저당 잡고 나를 휘두르려 하면서, 나한테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미쳤습니까, 휴먼?

“당신이 제 제안에 응하지 않으면 그 뒤에 있는 아이들이 당신 말처럼 험한 일을 당하게 될 텐데.”

마담 아페르타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말을 꺼냈다. 등불 위로 비친 얼굴에는 아이들을 향한 희미한 연민마저 깃들어 있었다.

‘내가 아이들을 그냥 두고 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어서 저러는 거야.’

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가, 이내 깊게 심호흡하며 서서히 힘을 풀었다.

내가 아닌 다른 아이였다면, 조금이라도 어리숙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저 말에 휘둘리고 말았겠지.

‘하지만 나는 그 정도에 휘둘릴 만큼 호락호락하게 살아온 게 아니라서.’

“이건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잖아요, 마담.”

이윽고 나는 한껏 상큼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저는 저보다 뒤떨어지는 사람의 협박 따위는 듣지 않는 사람이라서.”

사람의 선한 면을 제 약점으로 휘두르는 인간의 말 따위, 내가 들을까 보냐.

“협박이라니, 제 진심을 몰라주니 조금 아쉽군요.”

명백한 도발에도 마담은 별다른 기색 없이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안타깝다는 듯 읊조렸다.

“저는 나름대로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거였는데.”

그러고서 그녀는 장미꽃 같은 눈동자를 옮겨 잭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잭, 저 아이를 잡아.”

“크윽……!”

동시에 잭이 고통에 찬 신음으로 몇 번 몸을 뒤틀더니, 곧 반절로 접었던 허리를 서서히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붉은 안광이 서려 있었다.

오, 이건 조금 좋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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