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내 제안에 클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서 부연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하시니, 같이 방문하면 어떨까 해서요.”
“어, 하지만 사전에 접견 요청도 하지 않고 무작정 만날 수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설마 그런 거 하나 생각하지 않고 냅다 아픈 몸뚱어리를 끌고 왔을까 봐.
나는 품 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클레어 에카르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이거라면 아무리 갑작스러운 손님이라도 들여보내 줄 테니까요.”
“아……!”
카드의 정체를 확인한 클레어는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거라면 괜찮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진짜로 가 볼까.’
아, 잠깐 그전에.
“저, 레이디 에카르트.”
곧이어 나는 더없이 순수한 미소를 띠고서 클레어 에카르트에게 질문했다.
“혹시 거짓말 잘하세요?”
* * *
“주인님께서 아직 외출에서 돌아오시지 않아, 잠시 이곳에 앉아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중후한 낯의 집사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말을 건넸다.
처음 저택의 문을 두드렸을 때 보였던 경계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이걸 가능케 해 준 마법의 아이템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유스틴이 오늘 아침 마담 아페르타의 주소와 함께 동봉해 준 기적의 추천서 되시겠다.
사업적 연고 짱! 에버딘 가문의 이름값 최고!
“우와아, 저택이 참 크네요……!”
나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자그맣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흘긋거렸다.
분명 안 그랬던 애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겠지.
‘나한테 생각이 다 있다고.’
저거 봐. 지크프리트 씨는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쟤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하는 표정으로 서 있잖아.
“저희 저택은 세 사람이 사는데도 이거보다 작은데, 이 저택에는 마담 아페르타께서만 사시는 거죠? 헉,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었을까요오?”
“레, 레이디…….”
“괜찮습니다. 주인님의 부군께서 돌아가신 후 줄곧 혼자 사셨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까요.”
곧이어 집사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대답 속에는 제 주인에 대한 경외감과 자부심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그보다, ‘주인님의 부군’이라니.
‘아페르타 가문을 섬기던 사람이 아니군.’
마담 아페르타가 남편 사후 새로 들인 집사겠지. 게다가 클레어가 그를 보고도 딱히 동요하지 않는 기색인 걸 봐서는, 꿈 이후에 고용된 사람인 것 같고.
“주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겁니다. 특별히 선호하시는 찻잎이 있으십니까?”
“저는 단 거면 뭐든 좋아요!”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하려니, 이번에는 지크프리트 씨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클레어 에카르트 역시 안 그래도 소 눈망울 같은 눈동자를 더더욱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곧이어 집사가 다과를 가지러 응접실을 떠나고, 잠시 우리끼리 남아 있게 되자.
나는 지크프리트 씨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고갯짓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들 보지 마세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레이디, 이건 대체…….”
“안 그래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인데, 괜히 경계심을 높일 필요는 없잖아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귀여운 아이한테는 경계를 늦추게 되는 편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인상을 심어 줘야 앞으로의 계획에도 도움이 될 테고.
“스스로 귀엽다고 말한 거야?”
“적어도 지크프리트 씨보다는 훨씬 귀엽지 않을까요오?”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툭 말을 내뱉었다.
“나는 가끔 네가 존경스러워.”
“네, 저도 제가 존경스러워요.”
어쩌다 이런 일까지 휘말려서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서 옆에 앉은 클레어 에카르트를 살폈다.
그녀는 어느 새부턴가 응접실의 어느 한 곳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나는 그 녹색 눈동자에 담긴 고통과 초조함을 발견하고서, 그녀의 손등 위에 살며시 손을 포갰다.
“저는 레이디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말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레이디?”
“너무 동요치 마세요.”
“…….”
“사소한 게임 하나 하는 데에도 필요한 게 바로 자기가 쥔 카드를 감추는 일이잖아요.”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고.
카드를 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클레어 에카르트, 당신이니.
“이겨야죠, 우리.”
물론 나도 표정을 잘 숨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요즘엔 나름 특훈까지 했다고.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 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점차로 옅어지기 시작했다.
대신에 들어찬 것은 결의였다.
“네. 이겨야죠.”
“이왕이면 이긴 후에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도 좀 해 주시고.”
“앗, 네…….”
마지막 대답이 좀 작은데?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큼. 크흠.”
그보다 한발 앞서, 지크프리트 씨가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라 귀한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 바깥에서부터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클레어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가 이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극히 일부분만 마주한 거라 정확한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바로 진정할 수 있다니.
이 사람도 어지간한 배포가 아닌걸.
“안녕하세요, 마담! 저는 시두스 가문의 미에나입니다!”
나는 재빨리 클레어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응접실을 훑던 마담 아페르타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영겁 같은 찰나가 지나고.
“……소문의 레이디를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는군요. 정말 영광이에요.”
마담 아페르타가 온화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나는 부러 수줍게 미소 지으며 우물쭈물 답했다.
“저, 저야말로 그림으로만 만났던 마담을 실제로 만나서 너무 영광이에요오…….”
“제 초상화를 보셨나 보군요. 하긴, 레플리카가 꽤 돌아다녔지요.”
“헤헤, 마담께서는 실물이 훨씬 아름다우세요!”
내 말에 그녀가 싱긋 미소 지었다.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질린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헤실헤실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 자신감을 방증하듯, 그녀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초상화 속 얼굴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꿈에서 보았던 것보다는 확실히…….’
가릴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군. 나는 시선을 사선으로 비켜 마담 아페르타의 곁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마부터 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를 간신히 가리고 있는 회색 머리카락, 더없이 음울한 표정.
‘뭔가 익숙한 얼굴인데.’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옆에서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클레어의 손을 보이지 않게 살짝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드러내지 마.
“레이디 옆은…….”
마담 아페르타의 눈길 역시 나를 비껴가 클레어에게로 향했다. 나는 능숙하게 준비했던 답을 꺼냈다.
“에카르트 남작가의 영애예요. 원래는 에버딘 대공 부인의 수습 시녀로 있던 분인데, 제가 변변한 친구 하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소문대로 대공자님께서 레이디를 굉장히 아끼시나 보군요.”
이어지는 말은 없었으나, 나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벌써 대공자비로 대우받고 있는 모양이군요, 겠지.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런 이상한 소문이 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퍼진 이상 알뜰히 써먹어 줘야 인지상정 아니겠어?
“헤헤, 요즘엔 대공자님께서 워낙 바쁘셔서 거의 만나지 못하지만요. 혹 대공자님께서 제게 관심이 떨어지신 건 아닌지 걱정되어요…….”
“그럴 리가요. 그 러셀 경을 호위로 붙여 주신 것부터 남다른 애정이 엿보이는걸요.”
마담 아페르타가 타오를 듯 붉은 눈동자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프리트 씨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가 보군.’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내 옆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클레어는 마담의 곁에 선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저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클레어 에카르트 학생은 정신을 좀 차리시기를 바랍니다.
“크흠, 흠, 쿨럭, 쿨, 럭!”
나는 온 힘을 다해 기침을 내뱉고서 헤헤 미소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도 옮기는 병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소문은 이미 들었으니까요.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직접 외출하신 걸 보면 그래도 많이 호전되셨나 보네요.”
내 병 때문에 집안 망할 뻔한 거야 모를 수 없는 이야기긴 하지.
“네에, 주변에서 잘 챙겨 주신 덕분에요. 폐를 많이 끼쳤죠.”
사실 시시각각 죽어 가고 있지만.
“그래서, 레이디께서는 어쩐 일로 이곳까지 직접 걸음 하신 걸까요?”
환담은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 마담 아페르타가 곧 내 앞에 앉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저어, 다름이 아니구 마담께 조언을 청하고 싶어서요오…….”
“조언이라면?”
“그런데, 우음, 사실 이분들 앞에서 하기에는 쪼오끔……. 그치만 또 혼자 올 수는 없어서…….”
“레이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두 눈을 형형하게 뜨고 나를 불렀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대공자님께서 이 소식을 알면 저를 혼내실 것 같아서…….”
“아하.”
마담 아페르타가 이해했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고서 입을 열었다.
“잭, 두 분을 데리고 잠시 다른 곳으로 가 있으렴.”
동시에 지크프리트 씨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될 일입니다.”
“러셀 경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잔걱정이 많으시군요. 저는 화제의 주인공인 레이디를 감히 해할 만큼 간이 크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답니다.”
“그냥 조언만 들으려는 건데요, 뭘.”
나는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 씨를 안심시키는 척, 재빠르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 괜찮음. 가서. 저택 구조. 레이디 에카르트. 관찰. 저 남자도.’
“……알겠습니다.”
결국 지크프리트 씨는 뭐 씹은 얼굴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발 물러섰다.
나는 방을 빠져나가는 클레어와 지크프리트 씨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저 중에 몇 개나 제대로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믿습니다.
우리의 얼마 되지 않은 파트너십을! 신뢰 관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