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설령 네가 본 게 사실이라고 해도, 손님이 알아차릴 만큼 허술하게 가둬 놨을 것 같지는 않은데.”
“당연하죠, 저는 그저 집 구조만 슬쩍 살펴보려는 거예요.”
혹시나 루스가 보여 줬던 기억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루스가 겪은 일과 꿈에서 본 상황이 자꾸만 겹쳐 보인단 말이지.’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어젯밤 꿈에서 들은 마담 아페르타의 목소리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만 가지고 단정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목소리도 바뀌기 마련이니.’
물론 수법이 다른 만큼 루스가 그곳에 잡혀 있을 확률은 낮았으나, 그래도 직접 살펴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겸사겸사 꿈에서 본 배경과 저택의 모습이 일치하는지도 살피고.
“위험한 행동은 안 할 거예요. 이번엔 그냥 잠시 이야기만 나눌 거니까…….”
그렇게 튀어 나가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나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순식간에 뛰쳐나간 지크프리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 씨가 누군가의 손목을 붙들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절 두고 함부로 행동하지 마세요, 러셀 경.”
“아까부터 계속 이 주변을 맴돌았는데 어떡해. 게다가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영 수상해 보이잖아.”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그가 붙잡은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보다 살짝 더 큰 키, 지크프리트 씨에게 잡힌 가느다란 손목.
“아무리 봐도 제 또래처럼 보이는데요…….”
“숙련된 암살자는 원래 네 나이 때도 활동해.”
“아니, 그건 그렇지만…….”
사람이 떨고 있잖아. 지크프리트 씨한테 잡히고도 안 떠는 사람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게다가 떠는 모습이 꼭…….’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곧바로 지크프리트 씨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이 사람 신분은 제가 보증하니 그 손 놔주세요, 러셀 경.”
“응? 신분을 어떻게 보증해?”
“그야 어제도 만난 분이시니까요.”
그러고서 나는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을 향해 상냥히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여기서 또 뵙네요, 레이디 에카르트.”
“레이디 에카르트?”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깜짝 놀란 얼굴로 붙잡은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키 차이 때문에 그가 볼 수 있는 건 로브를 뒤집어쓴 작은 머리통뿐이었지만.
클레어 에카르트는 지크프리트 씨에게 손을 붙잡힌 채 잠깐 낑낑거리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다른 손으로 주춤주춤 로브를 벗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시두스…….”
“이런, 미안하다! 진짜 미안!”
동시에 지크프리트 씨가 더없이 당황한 얼굴로 클레어를 붙잡고 있던 손을 거둬들였다.
거의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는데.
아까는 어린애라도 암살자로 활동할 수 있다면서 그렇게 살벌하게 굴어 놓고, 평범한 아이인 걸 알자마자 저렇게 안절부절못한단 말이야?
“둘 중 하나만 해요, 러셀 경. 언제는 암살자로 의심하더니?”
키득거리며 지크프리트 씨를 놀리자, 그가 손을 들었다 놨다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거야 아까는 살기가…….”
나는 곧바로 뒷말을 깨닫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는 우리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클레어 에카르트의 살기를 느꼈으니,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지.
다만 클레어의 살기는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바로 저 저택을 향한 것일 터.
‘게다가 변변한 호위도 없이.’
그래도 에카르트 남작 가문이라면 제 여식의 바깥 외출에 대동할 호위쯤은 손쉽게 고용할 수 있을 텐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위화감에 슬며시 고개를 기울인 순간이었다.
“저, 레이디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로…….”
클레어 에카르트가 지크프리트 씨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지그시 누르며 내게 물었다.
그 손목은 어떠한 흔적도 없이 새하얀 살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씨가 꽤 거칠게 손목을 잡아당겼으니 분명 빨갛게 부어 있어야 하는 게 맞는데.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네.’
나는 흘리듯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재빨리 들어 올리고서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마담 아페르타를 만나기 위해서죠.”
“어, 어째서……?”
“으음, 솔직히 말해서 제가 레이디께 개인적인 이유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오…….”
여기서 냉큼 대답하면 이상하겠지.
살짝 당혹스러운 듯이 말하자, 클레어가 나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캐, 캐물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저는 그냥 레이디가 걱정이 되어서…….”
꿈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하여간 착하기도 하지. 나는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레이디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걱정하실 건 없어요. 최근에 후원 사업에 관심이 생겼는데, 관련해서 마담 아페르타께 여쭤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후원 사업이라면 에버딘 대공가도 유명하지 않나요? 레이디라면…….”
예상했던 대답이기는 하지만, 열두 살이 후원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한 것쯤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바쁜 분께 어떻게 매번 폐를 끼칠 수 있겠어요. 안 그래도 항상 도움만 받는걸요.”
“앗…….”
“그리고 언제까지고 에버딘 대공가의 이름을 빌려 살 수는 없잖아요. 제힘으로 무언가를 해 볼 줄도 알아야죠.”
“맞, 맞는 말씀이세요…….”
물 흐르듯 이어진 말과 싱그럽게 이어진 미소에, 클레어 에카르트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표정 관리 특훈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는군.
나는 그 기세를 틈타 자연스럽게 물었다.
“레이디께서는 어쩐 일로 이쪽에 오셨을까요? 호위가 보이지 않는데, 혹 댁이 이 근처이신가요?”
내 물음에 클레어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가.
“그으, 네, 저택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이에요……. 엄청 가깝지는 않지만……. 그리고 호위는 원래 대동하지 않는 펴, 편이고…….”
이번에도 더듬거리며 우물쭈물 답을 내어놓았다.
보아하니 거짓말을 할까 말까 잠깐 고민했던 것 같은데, 결국에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한 모양이네.
하긴, 저 성격상 거짓말은 정말 못 할 것 같긴 해.
‘어쨌든 클레어 에카르트의 저택이 이 근처란 말이지.’
그렇다면 루스도 이 근처에 있을 가능성 역시 덩달아 커지는군.
혹시 정말로 이 저택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세상사가 이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는 건 알지만…….’
클레어 에카르트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준 채, 한편으로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찰나였다.
“잠시.”
별안간 지크프리트 씨가 내 어깨를 톡톡 치더니, 눈짓으로 어느 골목길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선 클레어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레이디?”
“네, 네에. 다녀오세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쯤, 지크프리트 씨가 걸음을 멈추고서 입을 열었다.
“저 애, 아무래도 수상해. 가까이에 저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여기에서 알짱대는 건데? 그것도 호위 하나 없이.”
“아까는 안절부절못하시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게다가 너는 못 느꼈을지 몰라도, 아까는 멀리서도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니까.”
그거 아니었으면 나도 구태여 어린애를 건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지크프리트 씨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입가에서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서 말을 건넸다.
“러셀 경이 보시기에 레이디 에카르트의 살기가 저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나요?”
“그건…….”
“저는 저한테 향하는 살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리거든요.”
그녀의 분노가 향한 대상은 내가 아니다. 물론 내가 그녀의 행동을 막아서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레이디는 저를 해치지 않아요.”
내가 막을 생각 없다는데 무슨 상관이겠어.
확신이 담긴 발언에, 지크프리트 씨의 눈매가 살며시 가늘어졌다.
“너 뭔가 알고 있는 얼굴이다? 설마 들어갔다는 꿈이…….”
“허억, 호위도 없는 어린 레이디를 이 시간까지 혼자 세워 두다니! 에구머니나, 세상에 이런 일이!”
“어휴, 그래, 더 안 물어보고 그냥 조용히 따르겠습니다. 됐지?”
“에헤헤. 러셀 경은 역시 배려심이 넘친다니까.”
짐짓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러셀 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서 작게 턱짓했다.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일이면 바로 말해 줘야 한다.”
“그럼, 당연하죠.”
나는 등 뒤로 따라붙은 걱정 섞인 당부를 마음에 새긴 후, 클레어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부탁대로 그곳에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기다렸다기보다는 차라리 저택 안의 동태를 살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만.
“죄송해요, 레이디. 오래 기다리셨죠?”
작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주의를 끌자, 그제야 그녀가 저택에서 시선을 떼고서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앗,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이번에도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운을 뗐다.
“그래서, 레이디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로 오셨을까요?”
오는 질문이 있으면 가는 질문도 있어야지. 나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단다.
“그게…….”
내 말에 클레어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나는 짐짓 곤란한 듯 입술을 오므리며 덧붙였다.
“혹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곧이어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고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실은 이곳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레이디께서 제게 하려던 말과 연관된 건가요?”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재차 물었다. 동시에 클레어의 녹색 눈동자가 놀라움과 당황으로 가득 차 이리저리 흔들렸다.
갑자기 정곡을 찌르고 다가오니 놀랄 만도 하지.
‘그래도 물러설 생각은 없지만.’
클레어 에카르트가 굳이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이유는 뭘까.
어쩌면 그녀는 내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만약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럼 같이 들어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