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허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 같은 감탄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눈앞의 인외 존재를 바라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자 어르신이 살기등등한 황금빛 눈동자를 내게 고정한 채 물었다.
“하여 찾은 게 나란 말이냐?”
어차피 죽일 마음도 없으시면서 또 저렇게 쳐다보시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시선에, 나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서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어르신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능력이 출중한 분이신걸요.”
“내 본체를 눈앞에 두고도 나를 사람이라 칭하다니.”
“어르신은 제가 아는 존재 중 가장 능력이 출중한 분이신걸요.”
단어 하나만 수정한 문장을 그대로 다시 읊은 뒤 눈썹을 으쓱이자, 그가 덩달아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쨌든 시정했으면 됐지, 뭐.
나는 그의 반응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서 잠깐 다른 길로 빠졌던 본론을 다시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사……, 존재는 어르신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특히나 그 소원 마법. 그거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요, 헤헤…….”
“해서 내게 필요치 않은 미물을 찾는 데 일조해 달라?”
여전히 무언가 못마땅한 듯한 기색의 눈동자가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고서 그는 곧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네 소원 마법 알기를 무슨 앉아서 수프 마시기처럼 하는구나.”
나는 이번에도 헤헤 웃음을 흘리며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저는 앉아서 수프 마시기도 어려워하는 걸요, 어르신.
게다가 최근부터는 슬슬 약에 내성도 생기기 시작해서, 이전처럼 다시 속이 자주 뒤집힌단 말이지.
“이것만 도와주시면 그다음부터는 세계수 찾기에만 집중할게요. 이 아이를 구하지 않고서는 일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아무리 김 리처드 8세가 있다지만, 루스를 두고 멀리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양심에 찔렸다.
루스는 내가 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반갑다고 했지만, 그럴수록 얼마 없는 양심이 더 콕콕 아파져 온단 말이지.
이번에는 짐짓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어르신이 눈매를 슬쩍 누그러뜨리고서 말을 건넸다.
“나의 부탁은 천천히 해도 괜찮대도. 내 그 정도로 인내심이 부족하지는 않단다.”
“어르신한테서 얻어먹은 게 얼마인데, 그걸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어요. 원래 이런 건 최대한 빨리 청산하는 게 좋다고요.”
게다가 내 몸 상태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지면, 그때는 정말 찾고 싶어도 찾으러 갈 수 없을 테니까.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그나마 몸 상태가 괜찮은 지금 최대한 발품 팔아야지.
모른 척 입 씻고 넘어가기엔 너무 많이 얻어먹었어.
“너.”
그 순간, 이전과는 사뭇 서늘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붙잡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르신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조금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이전까지는 가짜로 짜증 난 척했던 거라면, 지금은 진짜로 언짢은 듯한…….
“내 너를 살려 주겠다고 한 약조를 믿지 않는구나.”
뒤이어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러나 황금빛 눈동자는 날카롭게 굳힌 채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제야 아, 하고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자기 능력을 못 믿는다고 여겨 불쾌해진 거구나.
“어르신의 능력을 못 믿는 게 아니에요.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하여간 입바른 소리는 잘하지.”
“헤헤. 근데 진짜예요. 어르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나는 바닥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괜한 기대하기 싫어서 그래요.”
“…….”
“어르신이 절 살려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어르신 탓이 아닌데도 원망하게 될 것 같아서요.”
내 몸 상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기대를 지니게 되면 나중에 가서 어쩔 수 없이 내게 희망을 건넨 사람을 원망하게 되더라.
그네 잘못이 아닌데도.
그들도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도.
“어차피 죽게 될 운명이라면 좋은 감정만 가지고 떠나고 싶어요. 이미 제게 많은 걸 베풀어 주신 은인께 배신감을 느끼고 싶지도 않고.”
더 큰 절망을 맛보고 싶지도 않고.
“음, 그러니까 결국에는 어르신께서 진짜로 절 살릴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믿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루스에게 ‘내가 하루빨리 널 그곳에서 빼내 주겠다’라고 직접 말해 주지 못한 이유도 결국은 이 때문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희망은 그저 괴로울 뿐이니까.
설령 진짜로 그렇게 된다고 해도, 기다리는 시간이 그 아이에게는 너무나 지난할 테니까.
말을 끝마치자, 어르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나를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한 시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너는.”
어르신이 묘한 눈빛을 띤 채 느른하게 입을 열었다.
“네 전생의 양육자가 그립지는 않으냐?”
“예……?”
무슨 알고리즘으로 그 질문이 튀어나온 거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려니, 어르신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또 한 번 눈썹을 치켰다.
그 모습이 퍽 위압 넘쳐, 나는 얼떨결에 대답을 늘어놓았다.
“어, 솔직히 다시 태어나고 처음 몇 년 동안은 좀 많이 보고 싶기는 했었죠……?”
“그래 봤자 고작 몇 년 아니냐.”
“고작 몇 년이라니요. 하물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요.”
하긴, 드래곤의 기준에서 10년은 정말 눈 깜빡할 새긴 하겠다만.
이제는 기억조차 흐려진 이전 생의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겠어요, 어차피 다시 만날 수도 없는데. 만나지 못할 사람을 붙잡고 평생 그리워하느니, 인정하고 잊는 게 낫죠.”
완전히 잊었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였다. 분명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이 내게 주었던 애정과 추억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 거에 연연하면 힘들어서 못 살아요. 게다가 이번 생의 저는 ‘미에나 시두스’인걸요. 저를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도 계시고.”
그러니 이전 기억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겨 두고, 나는 새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
“그럼 만약 네가 죽어 다음 생을 살게 되면, 너는 이전 생에서 지녔던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살아가겠구나.”
“당연하죠, 삶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이건 사실 꽤 오래전에 결론을 내린 문제였다.
이번 생은 이번 생에 충실할 것.
아무리 그전에 행복한 삶을 살았대도, 새로 맞이한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괜히 과거를 헤집어 더 큰 고통을 얻느니, 현재를 살아가는 게 나았다.
“……이제 알겠구나.”
내 말에 어르신이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본디 욕심이 많아.”
“음, 요즘 그 이야기 진짜 많이 듣는 것 같아요.”
딱히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적은 없는데.
“특히나 네 욕심은 꽤 이상한 쪽으로 발달해 있어. 내 너 같은 괴짜는 마주한 적이 없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세상에 저만큼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
“제가 생각해도 염치없는 발언이었네요. 정정할게요.”
그래도 그렇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낼 필요는 없잖아.
괜히 뚜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으려니, 그가 사르르 눈꼬리를 휘며 말을 이었다.
“네 욕심은 오로지 타인에게 향해 있어. 네 것에 대한 욕심은 네 새끼발톱만 한 정도인 것 같구나. 그마저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잘라 버리고, 쥐고 있던 것이라도 망설임 없이 던져 버리지.”
“앗, 그런가요…….”
남이 해 주는 내 캐릭터 해석이라 그런가, 상당히 재밌는데.
어쩐지 심리 테스트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니, 그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서 기다랗게 비음을 흘렸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이, 눈꼬리도 길게 늘이고서.
“그래.”
그가 이내 결론을 내린 듯 확정적으로 말을 꺼냈다.
“본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모르니, 그거라도 붙잡고 살아가며 대리 만족하는 거지.”
“…….”
“제 가진 것은 쉽게 포기하면서도, 남을 돕는 일은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한 녀석을 세상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이윽고 그가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휘며 질문했다. 나는 퉁명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뭐 어떡해.
나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는걸.
가질 수 없는 걸 가지겠다고 떼를 쓸 나이는 지났다. 솔직히 그럴 기력도 없었다.
“욕하지 마세요. 전 그래도 저한테 불리한 일은 안 한다고요. 뭐든 저한테 이득이 될 일만…….”
“네 주위 인간들에게 이득이 될 만한 일만 골라 하는 거지.”
“아무튼, 그게 그거죠.”
“지금까진 너를 챙겨 주는 인간만이 네 주위에 남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혹여라도 그중 하나가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하면 어쩔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