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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63)화 (63/154)

제63화

지크프리트 씨가 말을 꺼내다 말고 제 머리를 거칠게 쑤석거렸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해 보였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괜스레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려 화원에 핀 꽃을 바라보았다.

여러 빛깔로 아름답게 피어난 백일홍이, 이제는 제법 후덥지근해진 바람이.

덧없이 흘러가는 높은 구름이 어쩐지 찬란하게 느껴져서.

“슬슬 여름이네요.”

나는 해맑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하늘보다 더 짙고 푸른 눈동자를 허공에 고정하고서 잔잔히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래, 여름이네.”

눈에 띄게 낮아진 그 목소리를, 나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내게 향한 동정심을.

나는 이번에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 * *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전생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은 이번 생에서도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눈 깜짝할 사이 늦봄의 바람은 청량함의 대명사, ‘여름’을 몰고 오고야 말았고.

나는 시시각각 올라가는 온도에 마른 물고기처럼 온몸을 파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옛날엔 열이 오를 때마다 오한이 들어 더운 줄도 모르고 지냈는데.’

성분이 센 해열 진통제를 먹으니 열이 잘 오르지 않게 됐단 말이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약을 먹는다고 몸 상태가 나아지지는 건 또 아니니까, 그냥 나쁘기만 한 걸지도.]

새파란 호수 아래에 발을 담그고서 중얼거리려니, 매미 소리를 귀 기울여 듣던 루스가 주섬주섬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앉아, 루스. 이번에는 물에 빠지지 말고.”

“이, 이제는 안 그래요.]

뒤이어 루스가 빨개진 뺨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주섬주섬 옆자리에 앉아 내 행동을 따라 했다.

나는 그에게 예쁘게 잘린 수박 한 조각을 내밀었다.

이런다고 딱히 시원함이 느껴지진 않지만, 기분이라도 내야지.

[마음 같아서는 이런 호수가 아니라 그냥 설산으로 데려가고 싶었는데.]

[서, 설산에요?]

[아냐, 루스. 그냥 해 본 말이야. 날이 너무 더워서.]

[밖은 여름이구나…….]

내 말에 루스가 두어 번 속눈썹을 팔랑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서 그는 제 손에 들린 수박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여름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고 배웠어요, 미에나.]

느릿하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나한테 말해 주려는 건가. 그렇다면 또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지.

나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내걸고서 루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지내는 곳에서도 귀를 기울이면 비가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작은 소리지만, 이곳은 아주 조용하거든요.]

[…….]

[옛날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소리만 들었어요.]

어린아이 특유의 맑고 순진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내 심장을 후볐다.

[이제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으니까,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어서…….]

창밖의 세상을 마주한 적 없는 소년이 꿈을 꾸듯 말을 이었다.

[미에나의 말대로 점점 알아 가는 게 많아질수록 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제가 어떤 환경에 있는지 하나둘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어 순수함 깃든 푸른 눈동자가 나를 담아내고서 둥글게 휘어졌다.

나는 그를 꽉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내리누르며 물었다.

[그때마다 무슨 생각을 해?]

[어어…….]

내 질문에 루스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어물거렸다.

‘역시 이번에도.’

예상했던 상황에, 나는 가만히 턱에 손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루스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제 감정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는 스스로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말하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나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할 땐 더더욱.’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어도 ‘다 괜찮아요’, 좋냐 나쁘냐를 물어도 언제나 어미는 ‘―것 같아요’.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설령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더더욱 명확하고 올바르게 표현해야 했다.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휘둘리거나, 참아 왔던 게 터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현실에서 루스는 제 감정이나 생각, 하다못해 무엇을 배웠는지조차 표현할 수 없으니.

꿈속에서라도 계속 그를 부추겨 주는 게 좋겠지.

[괜찮아, 루스. 여기서는 뭐든 말해도 좋아. 네 생각을 이야기할 때는 머뭇거리지 마.]

[내 생각…….]

[화가 났다거나, 슬펐다거나. 아니면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든가.]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북돋아 주려니, 곧 루스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그렇구나.]

[응?]

동시에 나는 순간적으로 얼빠진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화, 화가 나지 않았어요. 슬프지도 않았어요. 그냥, 그냥……. 나는 여기 갇힌 거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뒤이어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저는 그래도 잠도 잘 자고, 똑같긴 하지만 항상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까. 심심하기는 해도, 그래도…….]

[…….]

[죄송해요, 미에나. 미에나는 항상 저한테 많은 걸 알려 주는데…….]

말을 마친 루스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사과를 건넸다.

나는 즉시 루스의 조막만 한 손을 붙잡고서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아니야, 루스. 이건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함부로 사과하면 안 돼. 정말로 잘못한 일에만 진심으로 사과해야지.]

[하지만…….]

[오히려 나는 루스가 계속해서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 줘서 고마운걸.]

몇 번을 그렇게 다독이자, 루스는 그제야 한결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호수 아래 담근 발을 천천히 움직여 물장구를 칠 때쯤이 되어서야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에게도 이미 말했듯이, 이건 루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학습된 무기력의 결과다.

‘어차피 자기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켜켜이 쌓여서,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거야.’

다른 걸 경험해 본 적이 있어야 비교를 할 텐데, 그조차도 없으니 절망도 기대도 하지 않는다.

아마 루스를 그 사육장에 가둔 놈도 이걸 노린 거겠지.

나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내가 미안해, 루스.]

내 사과가 제법 갑작스럽게 느껴졌는지, 설설 물장난하던 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차마 변명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네가 받은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네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모르지 않으면서도.’

내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 정말로 그를 찾고자 했다면 시간을 빼서라도, 무슨 술수를 쓰든 단서를 모았을 텐데도.

애초에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시작조차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이런 어중간함으로 대체 뭘 책임지겠다고…….]

급기야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내 어중간함에 치를 떨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루스가 내 손등에 손바닥을 얹고서 황급히 고개를 도리질했다.

[미에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이렇게 항상 저를 만나러 와 주잖아요. 저는 그게 정말, 정말로 기뻐요. 너무 좋아요.]

[루스…….]

[잘못하지 않은 일에 사과하면 안 된다고 방금 미에나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미에나가 제게 사과할 이유는 없어요.]

역시 내 새끼, 배워 먹은 건 착실히 응용하네…….

나는 그의 뒷머리를 쑤석거리다가 돌연 방향을 바꿔 찹쌀떡 같은 뺨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 루스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착하기도 해라.]

우리 귀여운 루스.

내가 진짜 널 꼭 그곳에서 빼내 줄게. 그러니까 너도 포기하면 안 돼. 이건 상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까.

‘혼자서는 단서를 찾기 어렵다고.’

GPS도 안 되고, 꿈 통로는 실제 거리와는 차이가 있어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고.

특히나 루스의 경우에는 문이 워낙 밝은 탓인지, 주변에 있는 문이 보이지를 않아서…….

‘뭔가 동기가 될 만한 건 없나.’

이곳을 꼭 나가야 한다는 의지가 생길 만한, 그런 동기 말이야.

내 앞의 조그마한 소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였다.

[그래도 가끔은요.]

루스가 내 손바닥에 자연스레 제 뺨을 기대며 말문을 열었다.

[어, 사실 요즘에는 자주인데요.]

특유의 맑고 깊은 눈동자를 내게 고정한 채.

[미에나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이번에도 숨이 턱 막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가 실망하기 전에 간신히 몇 마디를 내뱉었다.

[나도 너를 직접 보고 싶어, 루스.]

루스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막 세상을 알아 가는 아이에게 차마 이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내 숨이 끊어지는 한까지 너를 찾을 테지만. 내가 죽고 나서도 다른 사람이 너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안배를 해 놓을 테지만.

그래도 내가 너를 제때 찾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을 텐데.

괜한 기대감은 심어 주지 않는 게 좋지만, 이런 거로나마 밖으로 나갈 의지를 심어 줘야 하지 않나 싶고.

‘역시 내가 최대한 빨리 루스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겠네.’

내가 부탁한다면 부모님은 기꺼이 루스의 대부가 되어 주실 것이다.

게다가 ‘에버딘’이라는 뒷배가 있으니, 다른 귀족도 루스를 쉽게 건드릴 수 없겠지.

‘마침 내가 해야 할 일도 얼추 다 끝났으니까.’

이제부터는 정말로 루스 찾기에 집중해야지.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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