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사래만 설설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만남, 개인적인 부탁에 불과하여 거창한 것을 드릴 수는 없지만, 당신은 제 은인이니 고작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것도 수지에 맞지 않죠.”
“아니, 자꾸 그렇게 절 치켜세우시면…….”
“하여 무엇이든 제게 부탁한다면, 개인적으로나마 능력이 닿는 데까지 성심껏 당신을 도울게요. 몇 번이 되든지요.”
어, 잠깐.
그건 조금 괜찮은 것 같기도.
결국 나는 몇 번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사실 은인이니 뭐니, 제게는 조금 많이 거창하게 느껴지거든요.”
그것도 성황의 은인이라니. 너무 무거워서 깔릴 것 같다고.
“그러니까, 으음, 은인 이런 거보다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는 어떠신가요?”
개인적인 관계에 동료는 너무 딱딱하고.
“예를 들면 친우라든가…….”
조심스레 제안하자, 성황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나는 그 즉시 말을 정정했다.
“앗, 그, 제가 너무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제가 어려서…….”
“……하하, 아뇨. 친교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싫은 게 아니라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이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친우, 친우라……. 네, 좋아요. 친우.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러고서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단어를 되뇌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친우로서 내게 하고 싶은 첫 부탁은 무엇일까요? 저번에 보니 내게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이던데.”
“에헤헤, 들켰군요…….”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판이 깔렸으니 할 일을 해야지.
“친우로서 하나만 부탁하자면…….”
나는 곧바로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바로 유스틴이 내게 보내 주었던 국외 은행 관련 재무제표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들고 다녔지.
“제가 지금 추진 중인 개인적인 사업이에요, 성하.”
나는 재무제표를 성황의 앞에 슬쩍 놓아주고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귀하의 국가에 국외 은행을 설립할 수 있도록 힘 좀 써 주십시오.
동시에 그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미묘해졌다.
“분명 아까 친우로서의 부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뒤이어 그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긍정했다.
“네, 친우의 부탁.”
나랑 내 친구는 맨날 이러고 논단다.
* * *
내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성심껏 도와주겠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는지, 그는 내 사업 계획을 상당히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솔직히 리넥스에도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으니, 굳이 뒤로 뺄 이유도 없었지만.
‘그래도 듣는 자세가 달라지니까.’
친밀도를 쌓지 않은 상태에서 냅다 사업 계획을 들이밀면 일단 거부감이 들기 마련.
나는 그 지점을 ‘친구의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타파했다.
남은 건 이제 유스틴의 몫이었다.
성황의 반응을 봐서는 잘 안 될 리가 없겠지만.
“어쩐지 들어가기 전보다 신수가 더 훤해 보인다?”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응접실 밖으로 나오자, 지크프리트 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맑게 미소 지어 보이고서 자연스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신수가 훤해 보이겠지.
성황이라는 뒷배경도 얻고, 사업도 거의 성사해 놨는데.
그 과정에서 내 능력이 들킬 뻔……,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들켰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저택으로 돌아가면 오랜만에 디저트라도 좀 챙겨 먹을까 봐요.”
“그렇게 기분이 좋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집에 가면 일단 유스틴한테 연락을 넣고, 티나한테 속이 편한 디저트를 부탁하고.
오랜만에 어머니랑 다과를 먹어도 좋겠다. 그러면 아버지가 자기도 함께 껴 달라며 찾아오겠지.
저택에 도착하면 아마 평소처럼 볕 좋은 오후가 될 테니…….
“그러고 보면 성하께서는 항상 비슷한 시간에 절 부르셨네요.”
시간을 따지다 보니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무슨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는 듯 말했다.
“당연히 이 시간이 비는 시간이라 그러지 않을까. 이외에는 협상이니 뭐니 바쁠 거 아니야. 들어 보니까 리넥스 사제들은 여기서도 새벽 기도를 한다던데.”
“엄청난 신앙심이네요…….”
그리고 나는 그런 독실한 신자를 상대로 사기를 쳤고, 그 신자의 우두머리인 성황은 내 불경을 그냥 넘어가 주고.
세상이 잘도 돌아가는군.
‘그런데 보통 이때가 가장 바쁠 시간 아닌가?’
점심이 훌쩍 넘은 시간인데.
나는 저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일별하며 생각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순간부터 내내 궁금했던 게 있는데.”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쯤, 돌연 지크프리트 씨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서 그는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주위를 휘휘 둘러본 후.
“네 그 능력으로, ‘그분’ 꿈에 들어가 본 적은 없어?”
이내 상체를 깊게 숙여 내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여 물었다.
나는 귓속으로 스미는 간지러움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지크프리트 씨가 말하는 ‘그분’이란 당연히 황제를 뜻하는 거겠지.
‘솔직히 궁금해할 만도.’
나는 그를 따라 부러 주위를 살펴본 척한 후, 까치발을 들어 지크프리트 씨에게 역으로 귓속말을 남겼다.
“……없는데요.”
동시에 그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진짜? 단 한 번도?”
“네, 단 한 번도.”
“왜?”
그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나는 그 얼빠진 표정에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물론 황제의 꿈에 들어가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의 수장이니만큼 내가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바로 그게 문제인 거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은 애초에 궁금해하지 말아야 한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큰일 날 수 있으니까.
정보도 상대를 알아 가며 파고 팔아야지, 괜히 특급 기밀을 알았다고 나대 봤자 목 동강 엔딩밖에 더 안 난다.
특히나 나같이 표정 못 숨기는 사람이면 더더욱.
“그 정도면 정보 길드 같은 데다가도 못 팔아요. 조금만 뒤를 캐도 금방 신원이 밝혀질 텐데. 그럴 거면 처음부터 관심을 안 두는 게 맞아요.”
괜히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겠는가.
과한 호기심은 금물이다.
내가 아무리 빛나는 꿈이라면 무조건 들어가 보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선은 지킨다고.
‘솔직히 성황의 꿈도 의뢰 아니었으면 손 안 댔을 텐데.’
같은 증상이라는 말만 안 들었으면, 아마 유스틴의 꿈도…….
“네가 그렇게 허술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름대로 내 신념을 다잡는 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또 한 번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흐렸다.
나는 일부러 눈을 과장되게 큼지막이 뜨면서 말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같이 헐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어유, 뻔뻔해. 너는 진짜 황궁 체질이다, 야.”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될 수 있다면 가늘게 살다 가고 싶다고요.”
정확히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거지만, 일단 ‘길게’는 글러 먹었으니 어쩔 수 없지.
“이미 ‘가늘게’도 실패한 것 같은데.”
“헤헤, 가끔은 진실을 외면해 주는 배려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다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뻔뻔스러운 것이 태어나서는…….”
지크프리트 씨가 자못 장난스럽게, 그렇지만 반쯤은 진심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머지 반절에 담긴 애정을 생각해, 나는 그의 발언을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오늘 이후로는 이곳에 올 일도 없겠죠? 그랬으면 좋겠는데.”
절반은 지크프리트 씨를 향한 거기는 해도, 슬슬 사람들 시선이 더 몰리기 시작했단 말이지.
이 이상 황궁에 더 드나들었다가는 황제 독대 이벤트를 피할 수 없을 듯한데.
암만 유스틴이 막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막아 주면 고맙지만, 못 막아도 원망은 안 한다.
“황제 알현은 죽어도 싫으시죠?”
“사람 불안하게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꺼내고 그래?”
내 물음에 지크프리트 씨가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다.
그 반응을 보니 죽어도 싫은 모양이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접수.
“……그래도 네가 불려 가면 어쩔 수 없지.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
곧이어 그가 여전히 잔뜩 굳은 얼굴로 비장하게 말했다.
그 결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에, 나는 이번에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라, 그건 조금 감동이네요.”
“약속했잖아. 너한테서 딱 붙어서 안 떨어질 거라고.”
“덕분에 항상 든든해요.”
저 문 너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켜 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큰 위안이 되니까.
“아무튼,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귀하신 얼굴 마주하는 것도 꽤 색다른 경험이지 않을까요?”
“직접 만나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