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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61)화 (61/154)

제61화

[내가 널 왜 그 절벽에서 밀쳤는지, 정녕 몰라서 이러는 것이냐?]

[…….]

[내가 검에 찔리는 순간에도, 그 고통을 견디며 신음 하나 내뱉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스, 스승님.]

[너는 지금 내가 쥐여 준 적도 없는 죄책감에 빠져 이 스승의 선택을, 용기를 욕보이고 있는 거다.]

[저는, 저는…….]

[너는 지금 대체 누구의 망령을 붙들고 있는 것이냐?]

다그치듯 내뱉은 말에, 특유의 맑고 옅은 눈동자 아래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몇 번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다가,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앞에서 온화하면서도 늘 한 점 흔들림 없이 미소 짓던 ‘성황’이 아닌, 한 ‘소년’이 되어.

유일한 버팀목으로 여겼을 스승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마냥 어린아이처럼 엉엉 오열했다.

나는 내내 그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고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어쩌면 그가 가장 듣고 싶었을, 하지만 끝내 듣지 못한 그 말을.

[나는 너를 살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남기는 전언.

[너를 해치려다 죽은 자들도, 너를 살리려다 스러진 자들도.]

어떤 발언조차 할 수 없는 떠난 자 대신, 곧 떠날 자가 행하는 월권.

[너의 죄가 아니다.]

당사자가 아니기에 마주할 수 있는 객관성이자.

동시에 이미 죽음을 겪어 보았기에 알 수 있는, 떠난 이가 남은 이에게 늘 남기고팠던 뒤늦은 유언.

[네 잘못이 아니야.]

깨닫는 건 언제나 남은 자의 몫이다.

* * *

다음 날 오후.

“알지?”

지크프리트 씨가 내 목에 걸린 마정석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황 독대도 벌써 세 번째인데, 지크프리트 씨는 매번 새롭게 경계한단 말이야.

뭐, 그게 좋은 거지만.

“금방 다녀올게요.”

나는 지크프리트 씨에게 살살 손 인사를 해 준 후, 안내인에게도 슬쩍 눈인사하고서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몸 상태가 악화한 바람에 수능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성적표 기다리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검사 결과를 듣기 전 병원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기분 같기도 하고.

아무튼, 상당히 긴장됐다.

“안녕하세요, 성하.”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리 와 앉으세요.”

곧이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성황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았다.

그의 표정은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완연한 반가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꿀잠 주무신 모양인데.’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아니긴 하지만, 어쩐지 눈 밑 그늘도 살짝 옅어진 기분이고.

혹시나 이번에도 허탕일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 보이셔요.”

나는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연스럽게 말꼬를 텄다.

요 며칠 연속으로 만나서 그런 건지, 꿈에서 소년 같은 모습을 마주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가 조금 편하게 느껴진 덕이었다.

“내내 붙들고 있던 근심이 해결되어 그런가 봐요.”

그 역시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격식 없는 미소를 띤 채 응수했다. 나는 그를 따라 미소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어떻게, 무역 협상이 원하시는 대로 잘 풀리셨나 봐요.”

“하하, 제 마음에 차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요. 그쪽에서 그렇게 두지 않을 테지만요.”

“아하하.”

편해졌다고 생각했던 거 취소.

나는 순식간에 뒤바뀐 그의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성황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온화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으니, 이번 협상은 우선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물러서려 해요.”

“대공자님께서 들으면 반가워하실 소식이네요.”

공식적으로 나는 이번 협상과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지만,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을 테니.

나중에 유스틴한테 생색 좀 내도 되지 않을까?

‘이제는 벗겨 먹을 것도 없지만.’

재력도 넘치겠다, 굳이 사업을 더 늘릴 마음도 없겠다.

그냥 몇 번 놀리기만 해야지.

“사담은 이쯤 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유스틴 에버딘이 내게 보여 줄 반응을 떠올리던 사이, 성황이 산뜻하게 내 주의를 환기했다.

나는 곧바로 잡념을 몰아내고서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성하의 안색을 직접 마주하니, 작은 기대를 품게 되네요. 이번에는 약재의 효과가 저번보다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그런 기대요.”

이내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동시에 성황이 눈을 살짝 찡그려 웃고서 내 말을 받았다.

“그럼요, 효능이 아주 훌륭하더군요. 심지어 이번에는 제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어요.”

역시나, 스승에게 증오당한다는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 기억을 삭제하고 있던 거군.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듣던 중 정말 반가운 이야기네요. 제 처방이 성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이에요.”

“이번에 레이디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비단 약재뿐만이 아니라, 상담……에서도 말이에요. 당신이 이야기했던 대로, 제 악몽은 역시 그들과 연관되어 있더군요.”

으응, 그야 내가 당신 꿈에 직접 들어가 봤으니까.

“어쨌든 덕분에 원인도 명확하게 알았고, 또 나름대로 깨달음도 얻었어요. 내일이 되어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아마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나게 될 것 같아요.”

결국에는 제 마음가짐의 문제였다며, 성황이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를 축하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이것도 안 먹히면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역시 나다. 나 최고!’

그렇게 스스로 칭찬하며 자존감 높이기 타임에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말이죠.”

그 순간 성황이 불길하기 그지없는 마법의 단어를 내뱉었다.

“사실 당신이 제게 적어 주신 처방이 워낙 효과가 좋아 이번에 같이 이곳에 온 사제에게 똑같은 약을 내려 주었는데, 그 아이에게는 영 효과가 없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성황의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다정스러움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다른 이가 보고 들었다면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넓구나’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그걸 괜히 남에게 먹일 리 없지.’

같은 증상은 개뿔, 아마 이 약의 효능이 뭔지 정확히 알기 위해 부하에게 따로 먹여 본 거겠지.

그 결과 수면 성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테고.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의심이라니.’

나 지금 상당히 X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약의 특성상 개인에 따라서는 듣지 않는 일도 있으니까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요.”

나는 곧바로 차분히 말을 꺼냈다.

여기서 냅다 인정하면 더 X 되기밖에 더 하랴.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일단 모르쇠 작전으로 밀고 나가야지.

말마따나 증거도 없는걸.

“지당한 말이군요. 그런데 혹시 제가 이 이야기를 했던가요?”

“무슨 이야기일까요……?”

“저희 스승님은 대신전에서도 알아주는 욕쟁이셨답니다. 한 문장에 욕이 어찌나 많이 들어가는지, 제가 그분의 말투를 닮을까 봐 당시 대신관님들이 마음을 많이 졸이셨죠.”

말을 마친 성황이 어여쁘게 두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자꾸만 처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원위치하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거 지금 내 캐릭터 해석이 틀렸다고 정정해 주는 거지?

‘아니, 근데 내가 죽은 사람 성격이 어땠는지 뭐 어떻게 아냐고.’

하다못해 솜니움 사람이면 또 몰라, 아니, 하다못해 최근에 죽은 사람이면 또 몰라!

저 바다 건너 리넥스의, 그것도 20년은 족히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의 성격을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알겠냐고.

‘그리고 솔직히 죽은 사람이 죽어서도 욕을 하겠냐!’

천하의 욕쟁이도 제 아들손주제자의 꿈에 나올 땐 격식 있고 우아하게 나오고 싶겠지!

“성하께서 성하의 스승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시니 영광스럽지만, 왜 하필 지금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살짝 당황스럽네요…….”

어쨌든 나와 유스틴의 목숨이 걸린 이상, 여기서 인정할 수는 없다.

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당황스러움을 내비쳤다.

그러자 성황이 작게 숨을 내쉬고서 따뜻하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레이디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여 이 자리에서 확실히 이야기하자면, 저는 이전의 일로 당신에게 무언가 책을 잡으려는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

“…….”

“어찌 됐든 저희 쪽에서 횡포를 부렸던 건 사실이니까요. 실제로 제가 이곳에 와 정확한 사정을 들어 보니, 저희 쪽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더군요. ‘신탁’의 내용대로, 다들 욕심이 과했어요.”

신탁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담다니, 저 사람 뇌 속에서는 이미 모든 퍼즐 조각이 맞물린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이제는 침을 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자동 응답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성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설령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비공식적으로라도 내 능력을 인정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말만 이렇게 해 놓고 함정수사였다며 나를 끌고 갈지도 모르지.

“……그저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싶었을 뿐이에요.”

결국 그도 내 모르쇠 작전에 동참하기로 했는지, 더는 추궁하지 않고 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오른 후로 내내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지난한 죄책감을 벗겨 주어서.”

“…….”

“꿈에서 깨어나 차분히 생각해 봤더니, 스승님이시라면 정말로 제게 그렇게 말씀해 주셨을 듯싶더군요. 물론 그 과정에서 오만 가지 욕이 나왔을 테지만.”

늙지 않는 성황이 여전히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여 그분께서, 저를 지키고자 했던 모든 분께서 주신 삶을, 이 생을. 이제부터라도 좀 더 자리에 걸맞게 살아 보기로 했어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전과는 달리 풍만한 생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서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 묻고 싶은 것처럼 몇 번 입술을 어물거렸다가.

끝내 여느 때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과정이 어떻든, 당신이 저를 구원해 주셨다는 점은 변하지 않으니 이에 걸맞은 대가를 드려야겠지요.”

“구원이라니, 어찌 그런…….”

무시무시한 단어를 함부로 붙이고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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