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온 세상의 증오가 한데 섞인 것 같은 진득하고 처절한 고함은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너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이를 듣고 있노라면 나조차도 가슴이 선득해지는데, 하물며 당사자는 어떨까.
나는 행렬의 끝에서 정신없이 달음박질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둔 3세, 라그나르는 손을 들어 제 귀를 막은 채로 위태롭게 땅을 박차고 있었다.
[“크윽……!]
당연히 제대로 된 달리기 자세가 아니었던 터라, 그는 얼마 못 가 제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라그나르―!]
뒤이어 중년 남성과 더불어 끈질기게 성황을 쫓아오던 사람들이 그에게로 쇄도한 순간.
쿠구궁!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서서히 쪼개진다 싶더니, 곧 꿈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성황의 무의식이 참지 못하고 그를 강제로 깨우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개판이네.’
저 정도 악몽이면 깨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지만.
나는 그가 꿈에서 완전히 깨기 직전, 가까이 있던 문고리를 잡아당겨 꿈에서 냉큼 빠져나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하게 빛나고 있던 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슬아슬했네.]
문 근처에 있지 않았더라면 나도 꼼짝없이 같이 깰 뻔했어. 요즘 같은 시기에 수면이 얼마나 중요한데.
나는 그대로 사라진 문 앞에 털썩 주저앉고서 팔 위에 턱을 괴었다.
이 세계에서 좀비물 같은 꿈을 마주하다니, 상상도 못 했는걸.
‘좀비보다는 망령에 더 가까운 형태기는 했지만.’
나는 성황에게 끈질기게 달려들던 사람들을 떠올리고서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내가 그 꿈의 당사자였으면 지금쯤 베개에 식은땀이 흥건했을 거야.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아무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조금 감이 잡히기는 하는데.’
성황을 쫓아다녔던 사람들은 제쳐 두고서라도, 그에게 가장 충격으로 남은 건 단연 그 중년의 남성일 터였다.
거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걸 보면 아마 현실에서도 그 정도로 믿고 따랐던 사람이었을 터였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자기를 증오한다며 달려들면 아무래도 충격이 크겠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단정할 수는 없지.]
자세한 내막을 듣지 않는 이상, 이 부분은 내 자의적인 판단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가 이 꿈에 들어온 이상 성황은 일어난 후에도 이번 꿈을 기억할 수 있을 터였다.
‘이야기를 나눠 봤을 때는 꽤 머리가 좋아 보였는데.’
그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면 꿈의 내용을 직시하고 알아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악몽을 꾸는 원인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의뢰는 완수하는 셈인데.
대충 내가 보낸 처방 덕분이라고 얼버무릴 수도 있고.
[그렇게 넘어가면 좋겠다.]
나는 상체를 뒤로 벌러덩 젖히고서 깜깜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 * *
“잘 기억나지 않네요.”
인생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요즘따라 더 강하게 느끼고 있기는 했어. 올해에 특히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삼재인가?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아예, 단 하나도요?”
나는 성황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보통은 꿈에서 나를 발견하지는 못해도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도는 생생하게 기억했단 말이야.
‘이게 바로 귀납법의 오류인가.’
그렇다면 내 능력의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데.
“아, 그래도 이번에는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성황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고서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가에게……, 쫓겼던 것 같군요. 그것도 꽤 많은 수였습니다.”
“그거 말고는 뭐 더 기억나는 게 없으신가요?”
“예. 그 뒤로는…….”
그가 저조차도 답답하다는 듯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흐렸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 할 일인걸요.”
“그래도 아예 기억이 나지 않았던 예전과 비교하면 상당한 발전입니다. 약재의 조합법이 처음 접해 보는 종류던데, 확실히 도움이 되는군요.”
“에헤헤,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알아서 오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능청스럽게 미소 짓는 한편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조금이나마 기억이 난다는 걸 보면, ‘내가 들어간 꿈의 주인은 해당 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라는 명제가 아예 거짓은 아니라는 건데.
‘만약 성황의 무의식이 일부러 기억을 삭제하고 있는 거라면?’
사고의 기억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뇌에서 그 기억을 아예 삭제하는 것처럼.
만일 그렇다면, 내가 꿈의 내용을 한 번 뒤바꾸는 것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터였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닌, 일시적인 겉핥기에 불과하니까.
‘수면제도 듣지 않고.’
이건 극도의 공포 속에서 뇌가 강제로 주인을 깨우는 거라 수면제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지만, 악순환이 반복되면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국에는 스스로 극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성황은 이번 협상이 끝나면 리넥스로 돌아가야 하니, 내가 언제까지고 그의 꿈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어떻게 유도해야 하냐고.’
나는 끙,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 당신 꿈에 들어갔는데 당신 망령 떼에 쫓기고 있더라. 심지어 그중 한 명은 당신이 꽤 믿고 따르던 존재 같더라.
……라고 다짜고짜 말할 순 없잖아.
성황 한 명 돕겠다고 유스틴과 나의 사기 행각을 밝힐 수는 없지.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고 도망가고 싶다.’
능력을 밝히지 말고 해결하라니,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의뢰라고.
어차피 국외 은행은 유스틴이 어떻게든 해 주지 않을까…….
“레이디?”
그 순간, 성황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한껏 예민해진 상태일 텐데도, 그는 연신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 몸으로 리넥스에서 솜니움까지 오다니. 건강한 사람도 강행군으로 여길 판인데.
부분적으로는 내가 그를 부른 거나 다름없으니, 어쩐지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앓느니 죽어야지.’
이미 부탁을 받아들인 이상, 국외 은행을 위해서라도 완수하자고.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차고서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금……, 성하의 주변에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아서요.”
“뭔가가 보인다고요?”
“네, 사실 제게도 작은 능력이 있거든요. 성하의 능력만큼 거창한 건 아니지만요.”
내 말에 온화하기 그지없었던 성황의 얼굴에 자그마한 실금이 가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능청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생각해 보니 나한테 능력이 있다는 사실까지 숨길 필요는 없잖아.
‘내가 타인의 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만 밝히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니겠어?’
막말로 내 능력이 꿈에 간섭하기인지 귀신을 보는 건지 성황이 어떻게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내 과거도 못 읽는 사람인데.
“저는 기운이 허한 사람 한정으로 그 사람의 주위에 떠다니는 것들을 볼 수 있거든요. 영혼은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무의식에 박힌 뭔가를 볼 수 있어요.”
“세상에 그런 두루뭉술한 능력이 다 있군요…….”
“성하께서 지니신 그 능력도 사람에 따라서는 두루뭉술하고 터무니없는 능력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물론 내 능력은 방금 급조한 게 맞기는 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말하자, 성황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려는 듯싶었다.
백날 의심해도 이건 믿을 수밖에 없을걸.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성하의 주위에는 여러 사람이 보여요.”
“사람이라.”
“왼쪽에는 머리가 검고 푸른 눈을 가진 어린 소년인데,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져 있어요. 그리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왼쪽 뺨에 흉터가 있는 노파……, 아, 가장 많이 보이는 건 흰색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에요.”
꿈에서 보았던 사람 중 몇몇을 추려 이야기하니, 성황의 표정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가장 크게 보이는 건 금발을 하나로 단정히 묶은 중년 남성이에요. 눈썹 끝에 짧게 자상이 있네요.”
내 말에 점점 침잠하던 성황의 얼굴이 급기야 파리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건…….”
“제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말씀드릴 생각이 없었지만, 성하께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셨다고 하니 더는 숨길 수 없겠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제게 보이는 이 사람들이 성하의 악몽과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요.”
“…….”
“물론 제가 보내 드린 처방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차도가 있기는 할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문제가 무엇인지 직시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사실 처방도 뻥이야. 그러니 밑천 다 드러나기 전에 빨리 정보 좀 불어 보시죠, 성하.
“그러니 저와 상담하면서 조금 털어 내 보는 건 어떠실까요? 어차피 저희는 서로 비밀을 나눈 사이잖아요.”
나는 눈동자를 활짝 접어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방금 저는 성하께 비밀 하나를 더 말하기도 했고요.”
그러자 내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성황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응, 그럴 줄 알았어.
이상하게 힘센 늙은이들은 자기 앞에서 주눅 안 드는 당당한 인간들을 좋아하더라고.
“그래요,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으니 제 비밀도 하나 털어놔야 하겠군요.”
이윽고 그가 길게 숨을 들이켜고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