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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57)화 (57/154)

제57화

아니, 여기서 난데없이 자기 비밀을 늘어놓는다고?

충격으로 몇 번 입술을 어물거리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입 밖으로 말 같은 문장을 내뱉을 수 있었다.

“아니, 그, 제게 이런 것까지 밝히셔도 되는 건가요……?”

아까는 내가 솜니움 제국민이라 안 된다며. 황제한테 일러바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며?

내가 황제 대신 돈을 숭상한다고 한 말에 홀라당 넘어갈 정도로 허술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당신.

그 정도로 허술하면 대체 성황 노릇 어떻게 해?

“이를 먼저 밝히지 않으면 레이디는 제가 당신의 존재를 알고 이곳에 부른 이유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곧이어 그가 한 점 스스럼없이 말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조심성 없는 태도였다.

“아니, 그래도…….”

“차후 드릴 부탁을 위해서는 꺼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어요.”

말을 마친 성황이 눈꼬리를 반절로 접어 웃었다. 나는 애꿎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침음을 삼켰다.

그래서 지크프리트 씨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거였구나. 비밀을 들을 사람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령 그렇다고 해도 타국의 사람에게 함부로 알릴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리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고는 해도, 나한테 이런 부담 지우지 마.

감당 못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그래도 짧은 생이 더 짧아진단 말이야.

“하하, 지금 저를 걱정해 주는 건가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황은 그저 사람 좋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애써 진정시키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게. 댁이 해야 마땅한 걱정을 왜 내가 하고 있을까…….

“그리 걱정할 것 없어요. 비록 마법은 걸리지 않았지만, 다른 카드가 쥐어졌으니까요.”

“다른 카드라고 하심은…….”

“저도 당신의 비밀을 한 가지 알게 되었으니, 당신의 호의를 사려면 응당 제 비밀 하나쯤은 알려 줘야 하지 않겠어요?”

옅은 물빛의 눈동자가 빈틈없이 휘어지며 부드러운 궤도를 그렸다.

나는 그와는 대조되게 눈을 한껏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제 비밀이요?”

과거를 엿볼 수 있다더니, 역시 내가 외교 사절단 꿈에 침입해 가짜 신탁을 뿌린 걸 알아 버린 걸까.

그렇다면 지금 자기 비밀을 말해 준 것도 결국에는 ‘후후, 제 비밀을 알아 버렸으니 어쩔 수 없군요. 기밀 유지를 위해 죽일 수밖에.’의 연장선인 걸까?

‘망했다. 진짜 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스틴이 그딴 제안을 했을 때 그냥 거절하는 건데.

‘하다못해 어르신을 먼저 만나기만 했어도……!’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를 후회하는 사이.

“요컨대.”

그가 영겁 같은 찰나를 거쳐 내 비밀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초월자의 계약자라는 사실 말이에요.”

“……?”

나는 그대로 모든 사고를 멈추고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꿈 이야기가 아니잖아?

갑자기 초월자의 계약자라는 영 생뚱맞은…….

“아.”

설마 내가 꿈속에서 어르신과 영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역시 제 예상이 맞나 보군요.”

이런 내 반응을 멋대로 해석했는지,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확신했다.

나는 구태여 그의 말에 토를 달 생각 대신, ‘그걸 알아채다니’ 따위의 눈빛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안 들켰나 보군.

그렇다면 입 다물고 있자.

“리넥스의 성황은 세습제가 아닌 선출제인 만큼, 각 대의 성황은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죠. 그중엔 당연히 강대한 마력도 포함되어 있고요. 비단 마력뿐만이 아니라, 이 능력도 마찬가지랍니다.”

이윽고 그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부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 능력이 닿지 않는 상대는 제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어요. 드래곤의 계약자라고 알려진 솜니움 초대 황제의 직계 일족.”

“…….”

“그런데 방금 막 하나가 더 추가되었네요.”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었다.

그의 능력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체내에 쌓인 마력은 일반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생각했죠. 어떠한 연유로든, 초월자와 계약을 맺은 게 아닐까.”

“그리고 방금의 제 반응으로 확신하신 거군요.”

“바로 그거예요.”

그가 내 말을 냉큼 받아들이고서 방싯방싯 미소 지었다. 소년이라고 해도 믿음직한 맑은 미소였다.

그 내용은 전혀 순진하지 않았지만.

‘드래곤의 계약자라니.’

초월자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거의 다 맞힌 게 아닌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내가 드래곤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점을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이 사실을 어르신한테 알리면 어떻게든 처리해 주실 것 같긴 하지만.

‘그럼 정말 전쟁이다.’

이건 안 될 일이지. 당장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자.

일단은 부탁을 들어 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말해야지.

“그러니 공평하게 비밀 하나씩 나눠 가졌다 볼 수 있겠죠.”

이어 그가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내게 예의 바르게 대해 준다 싶더니, 이 역시 내가 ‘초월자의 계약자’라고 판단한 까닭이겠지.

나는 말아 쥐었던 주먹에 슬며시 힘을 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역시 제게 너무 많은 걸 알려 주시는 거 아닌가요, 성하. 제가 황제 폐하께 성하의 비밀은 물론 제 비밀까지 모두 고하면 어쩌시려고요.”

“하하,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비밀을 밝힐 리 없잖아요?”

내 말에 그가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전과는 달리 입 위까지 전해지지는 않은 웃음이었지만.

“황족이 아닌 초월자의 계약자를 황제가 가만둘 리 없으니까요.”

“하, 하하…….”

황가의 상징이자 권력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는 왕권신수설, 그 절대적인 상징을 다른 이가 똑같이 가지고 있으면…….

‘근데 그쪽에서 날 죽일 수 있나?’

성황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어르신의 보호 마법이 있는데.

아니지. 황제도 드래곤 계약자의 후예라고 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그쪽도 성황의 능력이 닿지 않는다며.

‘게다가 만약에 그 전설 속 드래곤이 어르신이라면…….’

그 힘이 똑같은 기원을 지니고 있다면 상황은 알 수 없어진다.

그러니 역시 입 꾹 다물고 있어야지. 처음부터 말할 생각도 없었어.

“그리고 이 정도로 나이를 먹으니, 어느 정도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서요.”

다시 한번 마음속 비밀 일기장의 잠금장치를 점검하는 사이, 성황이 온화한 낯으로 말을 건넸다.

나는 순간 허물어지려던 표정을 억지로 정돈하며 입꼬리를 빼 당겼다.

억지로 많이 쳐줘도 20대 중반 정도나 되었을 외모인데, ‘이 정도로 나이를 먹으니’라니?

당장 응접실 바깥에는 서른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철부지인 아저씨가 있는데.

“아, 저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외관의 노화 진행이 멈춰서요. 실제로는 마흔이 훨씬 넘었지요. 뭐, 그래도 최연소 성황이지만요.”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성황이 나긋나긋하게 덧붙였다.

나는 곧바로 눈동자를 아래로 데구르르 굴렸다.

어이쿠, 이쪽도 어르신이었잖아.

하마터면 실수할 뻔.

“어찌 됐든.”

이내 그가 짧게 헛기침을 내뱉고서 화제를 돌렸다.

“저는 타인과 눈을 마주치면 딱 한 번 그 사람의 과거 일부를 엿볼 수 있답니다. 단편적이지만, 동시에 제게 가장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죠.”

“아하…….”

“이 능력을 통해 에버딘 대공자의 과거를 조금 엿보았어요.”

성황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가 보인다니. 역시 내가 유스틴이랑 사기를 공모한 대목이 보였을 법한데.

‘조금 안심한다 치면 갑자기 이렇게 긴장감을 주니.’

마치 롤러코스터 위에 탄 기분으로 침을 꼴깍 삼킨 순간이었다.

“레이디께서 에버딘 대공자의 불면증을 말끔하게 치료했다고요.”

그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발언을 내뱉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번에도 두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서 입술을 오므렸다.

그걸 봤다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그러고 보면 레이디께서 처방을 적어 보낸 이후로 잠이 솔솔 오고는 했습니다. 덕분에 꿈도 꾸지 않고 숙면했지요.”

이어 성황이 유스틴의 목소리를 따라 하며 말을 읊었다.

유스틴과 처음 제대로 조우한 날, 그가 내게 건넸던 문장이었다.

“제 얼굴을 보면 알겠지만, 저는 성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자 본 적이 없어요. 가까스로 잠들어도 금방 깨기 일쑤였고요.”

“악몽을 꾸시는 건가요?”

“악몽인지조차 알 수 없어요. 아니, 분명 악몽이겠지요. 하나 꿈에서 깨면 모두 잊어버리고 말아요.”

내 질문에 성황이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한 채 불쾌한 감정만 응어리처럼 남으니, 이제는 잠을 자는 게 두려워질 정도예요. 당장은 어떻게든 버텨 보고 있지만…….”

“저런, 고통스러우시겠어요.”

하루만 제대로 잠을 못 자도 다음 날이 통째로 망가지는데.

성황 자리에 오른 이후로 단 하루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다니, 당장 이렇게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기적인 수준이었다.

이것도 아마 그 대단한 능력 때문이겠지.

내게 이렇게 도움을 청했다는 건, 그조차도 이제 한계라는 거고.

“많고 많은 과거 중 굳이 이 장면이 보인 건, 레이디가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결례인 걸 알면서도 집요하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어요.”

“…….”

“부디,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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