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손님을 맞이하는데 이런 몰골이라니, 꽤 부끄럽네요.”
따스한 봄볕 같은 목소리가 또 한 번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성황이 감히 제 얼굴을 몰골이라고 표현하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은 단어 선정 같지만. 동시에 솔직히 말해서 그보다 더 완벽한 단어는 없을 것 같았다.
‘진짜 몰골이 장난 아닌데.’
얼마나 장난 아니냐면, 진짜 장난 아니야.
심지어 나보다 더 아파 보이잖아.
“저어…….”
“일단 와서 앉으세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성황이 미소를 띠고서 제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일국의 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따스한, 그야말로 봄날의 햇볕 같은 웃음이었다.
다크서클이 그 따뜻한 햇볕을 다 가리고 있지만.
“그럼 감사히…….”
나는 그의 눈 밑으로 새까맣게 드리워진 그늘을 애써 무시하며 조심스레 착석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만 제외하자면, 리넥스의 성황은 상당히 젊고 수려한 편이었다.
지크프리트 씨나 루스의 눈동자가 짙은 바다를 연상시킨다면, 성황의 푸른 눈동자는 파란 수국을 떠올리게 했다.
희미한 분홍빛을 머금은 머리카락도 그렇고, 이목구비도 그렇고.
연차가 쌓였는데도 관리를 잘한 선배 아이돌 상이랄까.
아무튼, 정말 부드러워 보였다.
“우선 이렇게 독대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네요.”
곧이어 그가 더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굽힌 채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유스틴이나 어르신은 차라리 괜찮은데, 성황은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네.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국가적인 분쟁으로 번질 것 같단 말이지.’
첫인상 괜찮고. 저보다 한참 어린데다 신분도 낮은 여자애한테 깍듯이 대해 주고.
다른 걸 다 제쳐 두고라도 인간적인 호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호감을 반절 정도는 깎아 먹는 다크서클을 곁들인.
‘어쩐지 종이비행기가 가다 말더라니,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거였군.’
시차 적응을 제대로 못 한 걸까?
그렇다기에는 솜니움과 리넥스가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데.
“레이디?”
그 순간, 나긋한 미성이 잠깐 흐려졌던 정신을 붙잡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성황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짧은 눈 맞춤 끝에.
“……맑고 예쁜 눈이군요.”
그가 또 한 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내게 칭찬을 건넸다.
나는 이번에도 얼떨떨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뭔가 멈칫했는데.’
게다가 표정도 미묘하게 조금 전이랑 달라.
이전까지는 정말 순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언짢은 것 같기도 한…….
“꽤 갑작스러운 부름이었을 텐데도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
그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며 의중을 가늠하고 있을 즈음, 그가 나긋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나는 그제야 내가 결례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너무 빤히 쳐다봤네. 그래도 이 정도는 어린아이의 멋모르는 실수로 생각하고 넘어가 주지 않을까?
“제가 어째서 레이디를 알고 불렀는지 놀라고 궁금하겠지요.”
뒤이어 그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미안하다는 듯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서 길게 심호흡했다.
이미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끝마친 상황, 여기서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척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겠지.
“네에, 사실 조금 많이 놀랐답니다.”
이번에는 애늙은이 콘셉트다.
“다 저물어 가는 한미한 가문의, 그것도 아직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도 않은 저를 어찌 알고 부르신 걸까 하고 처음에는 믿지 못하여 몇 번이나 되물어 봤답니다.”
이 길고 정중한 발언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바로 이거였다.
너 나 대체 어떻게 알았냐?
“다 저물어 가는 한미한 가문이라니.”
이윽고 성황이 여전히 해사하게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기에는 레이디께선 에버딘 대공자와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성하께서 제게 과분한 관심을 두시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지지 않고 옅게 웃는 얼굴로 사근사근 말하려니, 곧이어 그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고선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이 부분은 대공자가 제게 직접 일러 준 거랍니다.”
그럼 다른 부분은 어떻게 안 건데.
“레이디와 만나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말이에요. 해치지 않겠노라고 맹세까지 했는데도 끝끝내 꺼림칙한 기색을 숨기지 않더군요.”
“대공자님께서…….”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던지, 레이디에게 제 부탁이 제대로 전달이나 되긴 했을지 걱정될 정도였지요.”
그가 재밌는 기억을 떠올리는 듯 이번에는 장난기 담긴 미소를 내걸고서 말했다.
나는 여전히 그를 따라 방긋 웃는 한편, 속으로는 남몰래 눈썹을 치켜세웠다.
‘유스틴이 그랬다고? 내 앞에서는 딱히 그런 느낌 없었는데.’
물론 나한테 부탁하는 내내 굉장히 미안해하기는 했지만.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마차와 함께 여러 약재와 선물까지 같이 보내왔지. 국외 은행 사업 재무제표도 동봉하고.
‘재무제표만 확인하고 바로 출발해야 했지만.’
그것도 저택에 두고 올 시간이 없어 꼬깃꼬깃 품 안에 챙겨 왔더란다.
어쨌든 성황이 한 말만 따지고 보자면, 내가 오기 전에 유스틴이 이미 한바탕했다는 소리네. 제아무리 에버딘 대공가라고 해도 상당한 무례였을 텐데.
그런데도 성황은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수그려 줬단 말이지…….
“저, 성하.”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적극적으로 발언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만나고자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들을 수 있을까요?”
“아, 물론이죠.”
내 말에 성황이 산뜻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고서 그는 고개를 옆쪽으로 살며시 기울이더니.
“그전에 잠깐.”
그대로 손을 들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동시에 바람 한 점 들지 않던 응접실에 한차례 요요한 순풍이 테이블 주위를 휩쌌다.
그렇게 순식간에 들이닥친 바람은 몇 차례 내 주위를 맴돌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이게 뭐지? 공격은 아닌 듯한데.
“아, 역시.”
이내 그가 손가락 끝으로 입가를 쓸며 작게 말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방금 그건 뭔가요, 성황 폐하……?”
하지만 되돌아온 건 내 질문과는 퍽 궤가 다른 답이었다.
“레이디의 전신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군요.”
“아.”
그때 드래곤 레어에서 어르신이 내게 걸어 준 마법인가 보네.
“아마 보호 마법일 거예요.”
적어도 길 가다 넘어져 죽는 일은 없도록 해 주겠다고 걸어 준 건데.
근데 지금 이 타이밍에 그걸 묻다니, 설마 방금 정말로 나 공격하려던 건가?
“방금 건 공격 마법이 아니에요. 앞으로 나눌 이야기를 위해 한 가지 대비해 놓으려 했을 뿐이죠.”
“아하…….”
“그런데 아무래도 이 방식으로는 안 되겠군요.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그만큼 재미있어요.”
그가 천사같이 어여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행히 불쾌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으나, 그만큼 호기심이 강하게 동한 것만 같았다.
나 저 표정 알아. 어르신이 날 보고서 저런 표정을 지었어.
그리고 유스틴도…….
“힘은 더 강한 힘으로 누를 수 있듯, 마법 역시 더 강한 자의 마력으로 파훼할 수 있죠.”
곧이어 그가 한껏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제 마력으로도 파훼가 되지 않는 보호 마법이라니, 상당히 흥미롭군요. 솜니움에 이런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은 들어 본 적 없는데.”
그야 상대가 칩거 중인 드래곤이니까…….
‘간단한 보호 마법이라면서요, 어르신!’
나는 다시 한번 어르신의 ‘간단’이라는 기준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한편, 애써 어색함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보호 마법이라 특정한 조건이 없으면 발동되지 않을 것 같은데, 성황 폐하께서 제게 걸려고 하셨던 마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한 조건 제약 마법이었을 뿐이에요. 레이디가 비밀을 함구해 준다면 전혀 해가 될 게 없는.”
발설하면 혀가 잘리는 느낌의 마법이었나 보군. 그러니 보호 마법이 발동하지.
나는 성황의 부드러운 미소 이면의 서늘함을 발견하고서 입술 끝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 게 없어도, 제가 감히 성황 폐하의 말을 어떻게 함부로 옮길 수 있겠어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솜니움 제국민. 레이디는 모시는 주군이 다르니 조심할 수밖에요.”
황제한테 일러바칠까 봐 그러는 거라면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에버딘 대공자님과 친밀하다지만, 이와는 별개로 황궁과는 정말 연이 없으니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이내 나는 괜히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변을 살핀 후, 자세를 낮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주군은 인간이 아니라 이거랍니다.”
상체 아래로는 손을 살짝 들어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랗게 맞댄 채였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하하, 하.”
일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성황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디는 정말……, 솔직하네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어요. 공감되기도 하고요.”
나는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쓱 훑으며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높으신 분들은 솔직한 인간을 좋아한다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할까요.”
이윽고 웃음을 멈춘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나긋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건넸다.
“저는 사실 타인의 과거를 엿볼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