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그의 말을 제때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몇 번 곱씹고서야 툭 말을 내뱉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성황이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
“제대로 들었습니다.”
“진짜로 저를?”
“예, 당신을.”
“왜요?”
내 말에 유스틴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곧바로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작게 탄식했다.
이유를 모른다고 했었지, 참.
“성황이 저를 콕 집어 지목한 건가요? 제 이름을 말했다거나.”
“이름을 말한 건 아니지만, ‘레이디 시두스’를 만나고 싶다고 한 건 사실입니다.”
“아, 저네요.”
우리 가문에서 ‘레이디 시두스’라고 불릴 사람은 이제 나 말고 없으니까. 나는 덩달아 미간을 좁혔다.
왜 하필, 어떻게 나를 알고 지목한 거지?
설마…….
“저희가 성국 상대로 사기 쳤던 게 들킨 건 아니겠죠? 그럼 진짜 큰일 나는데.”
그냥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제대로 X 되는 거다.
게다가 나만 X 되는 것도 아니다. 신성한 성국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게 들키면 아무리 솜니움이라도 질책을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성국이 먼저 갑질을 시전했다는 사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겠지.
“어차피 죽을 거 이왕이면 사지 온전하게 죽고 싶거든요…….”
“그 짧은 사이에 대체 어디까지 상상한 겁니까?”
작게 중얼거리자, 유스틴이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고서 그는 손가락 끝으로 머리 옆쪽을 슬슬 문지르며 부언했다.
“그쪽에서 사기……, 계획을 눈치챈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이미 모든 게 파투 났겠죠.”
“으음…….”
“게다가 정말로 모든 걸 알아챘다면 당신과 저는 여기 이렇게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조차 없었을 겁니다. 지금쯤 신성 모독으로 체포당해 성국으로 이송되고 있었을 테죠.”
“그런 위험한 일을 저한테 잘도 시키셨네요.”
그때는 안 들킬 자신이 있어서 냉큼 수락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완전 위험한 일이었잖아.
새삼스레 어깨를 잘게 떨며 중얼거리자, 유스틴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말고 내게 시선을 던졌다.
“만일 그랬더라면. 아니, 만약 그러더라도.”
그러고서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게 말을 건넸다.
“일의 책임은 제가 질 겁니다.”
어린아이의 포부처럼 허무맹랑하면서도 꽤 진중한 발언에, 나는 반사적으로 툭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봤자 서로 사이좋게 처형당할 뿐일 텐데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그러자 유스틴 역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서 응수했다.
하여간 누가 귀족 아니랄까 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네.
“나쁘지 않기는 뭐가 나쁘지 않아요. 한 사람 죽을 거 두 사람이 죽는 건데. 대공자님도 가만 보면 가끔 이상하다니까.”
“당신만 하겠습니까.”
곧이어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표정을 굳히며 대꾸했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서늘한 얼굴에, 나는 몰래 코웃음을 흘리고서 다시금 주의를 환기했다.
“아무튼. 그게 아니라면 왜 하필 저를, 그것도 무슨 이유로 만나고자 하는 걸까요?”
가뜩이나 아직 나는 수면 위로 드러난 적 없는 사람인데.
물론 보는 눈이 있는 이상 시두스 가문과 에버딘 가문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는 사실까지는 숨길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기껏해야 내가 유스틴과 예사로운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 정도에서 그쳤을 터였다.
그런데 타국의 사람, 그것도 성황이 이런 사교계 가십거리에 관심을 기울일 리 없잖아.
‘뭐, 에버딘 가문의 대소사라면 조금 궁금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에버딘 가문이 저희 가문과 본격적으로 사업 제휴를 맺었다는 사실은 아직 새어 나가지 않은 거, 맞죠?”
“예,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죠…….”
국외 은행 관련해서도 아직 착수 단계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에버딘 가문에서 대부분 도맡아 하니까.
특히나 그 중심에 내가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수 없을 테고.
“저 역시도 그 부분이 의문입니다. 당신에 관한 정보는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통제광 녀석이 본인 성격과 한 치의 오차 없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계속 그래라. 나도 그게 편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조금 진행해 봤는데, 별다른 수확은 없었습니다.”
그사이 유스틴이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조사요?”
“성황 선출에 영향을 주는 요인 중에 특별한 능력이 포함되는지, 혹은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지닌 능력에 관한 문헌 정보 같은…….”
이내 그가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동시에 이번에는 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아하.”
어디서 와이번에 대한 정보를 얻어 왔나 했더니, 황실 도서관을 뒤진 거였구나. 이거 완전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잖아.
운 좋은 자식. 그것만 아니었으면 완전범죄가 될 수 있었는데.
아니, 그보다는.
“언제는 신 안 믿는다면서요.”
이윽고 유스틴을 쿡쿡 찌르는 듯 은근하게 물으니, 그가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안 믿습니다. 정확히는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신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편이고요.”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신이 없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네.
그러고 보면 내가 어르신과 같은 존재가 있냐고 물었을 때, 그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