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눈이 상당히……, 부었군요.”
내 앞에 앉아 있던 유스틴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 말도 벌써 다섯 번째였다.
처음은 티나, 두 번째는 지크프리트 씨, 세 번째는 어머니, 네 번째는 아버지.
돌림노래도 다섯 번까지는 안 한다.
“저녁 늦게 뭐 먹고 자서 그래요.”
“저녁 늦게 무언가를 먹었다고요? 당신이?”
“아, 변명을 잘못 골랐네.”
이러니 아무도 안 믿지.
내 말에 유스틴이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늘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슬쩍 눈을 가리며 쏟아지는 시선을 막았다.
“이런 사소한 건 더 신경 쓰지 마세요, 대공자님. 지금 이야기할 건 그게 아니잖아요.”
내 눈이 부었든 안 부었든, 사업 이야기하는 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니.
“알겠습니다.”
유스틴 역시 더 캐물을 생각은 없었는지, 이내 내게서 눈길을 떼고서 깔끔하게 화제를 돌렸다.
“우선, 보내 주신 내용물은 모두 잘 확인하여 분류해 뒀습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할 것 같더군요.”
“혹시 부족하면 말씀해 주세요. 물론 자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 드리겠지만.”
“허투루 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투명하게 빛나는 은색의 눈동자가 다시금 내게 닿았다.
“이번에도 자금의 출처는 밝힐 생각이 없는 거겠죠.”
“뭘, 새삼. 제 능력 덕분이죠.”
“이 정도의 보물이 땅에 묻혀 있으면 말이 새어 나오기 마련인데.”
“에이, 누가 요즘 보물을 땅속에서 찾아요.”
따지고 보면 저번 보물도 땅속이 아니라 샘 속에서 찾은 건데.
‘게다가 이 보물들은 말이 새어 나올 구석이 없거든.’
말을 마치고서 해사하게 미소 짓자, 유스틴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나는 곧바로 내 현재 상태를 상기하고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찌그러진 두부 같았겠군.
“아무튼, 자금 조달 외의 세부 업무는 대공자님께 부탁 좀 드릴게요. 저는 사업에는 문외한이라.”
그렇다고 해서 현황 보고를 대충 넘기지는 않을 거지만.
내 말에 유스틴이 예상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심지어 조금은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듣던 중 다행인 이야기군요. 국외까지 간다고 할까 봐 내심 마음 졸였는데.”
“에이, 아무리 저라도 그렇게 멀리까지는 안 가죠.”
“그렇습니까.”
특유의 서늘한 눈동자가 짧은 이채를 띤 채 나를 흔들림 없이 직시했다.
그 순간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쩐지 유스틴이 내 비밀 중 하나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하지만 꽤 가능성 있는…….
“최근 별장 주변에 번개가 내리쳤다는 보고가 몇 번 올라왔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흐린 날도 아닌, 맑은 날씨에.”
“…….”
“그것도 특정한 시간대마다.”
잠시 말을 멈춘 유스틴이 변명해 보라는 듯 방긋 미소 지었다.
나는 그를 따라 생긋 웃으며 남몰래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아, 그 천둥 번개 알죠. 저도 자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어쨌든 일단은 모르쇠 작전이다.
나는 얼굴 근육을 자연스럽게 풀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던가요? 헤헤.”
“…….”
“헤, 헤헤…….”
헤휴, 젠장.
다 알고 떠보는 놈을 무슨 수로 속이랴.
“안 들키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외에 더 알아챈 이는 없을 겁니다. 애초에 제게 들어온 보고도 ‘최근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레이디 시두스께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까 걱정스럽다’가 전부였으니까요.”
“그런 단순한 보고를 대공자님께서는 왜 하필 저와 연관 지으신 걸까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 말고는 제국 안에서 기상천외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더 떠오르지 않던걸요.”
뒤이어 그가 나긋하게 웃는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와이번이 날아오를 때 천둥 벼락이 내려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당신은 일전에 와이번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고요.”
“책에서는 그런 내용 찾아볼 수 없었는데. 애초에 그런 전설은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예요?”
“최근에 관련해서 찾아볼 게 있던 김에 겸사겸사 알아봤습니다.”
그게 겸사겸사 알아볼 수 있는 거였냐고.
안 그래도 리넥스 때문에 한창 바쁠 사람이, 내가 지나가듯 언급한 단어 하나를 굳이 찾아봤다고?
“뭔가 수상한데.”
“제가 당신을 더 수상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합니까?”
“어차피 대공자님께 저는 언제나 이상한 사람일 테니 그런 건 별로 신경 안 써요.”
내 말에 유스틴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화했다. 떨떠름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말끔히 정돈하더니, 늘 그렇듯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반응을 보니 제 추측이 맞은 모양이군요. 이쯤 되니 정보의 대칭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건지도 궁금해지는데요. 가령 제가 알지 못하는 당신의 능력이라든가. 그러고 보면 당신은 제게 능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준 적도 없죠.”
“그야 대공자님께서 생각하신 게 전부니까요. 이번 일도 그 연장선일 뿐이에요. 다른 능력은 없어요.”
안 그랬으면 진즉 돈 버는 데다 써먹었지.
진실의 눈빛을 하고 유스틴을 빤히 마주 보자, 그가 움찔 몸을 떨더니 또 한 번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아침에 그 아까운 얼음으로 붓기 좀 빼고 온 건데. 저렇게 반응할 정도로 심각한 몰골인가?
“……위험하지는 않은 겁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스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롭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어요.”
나는 곧바로 응수했다.
“대공자님도 리처드 8세 등에 한번 타면 못 헤어 나오실 걸요. 아, 참고로 리처드 8세는 와이번 이름이에요.”
“이제는 하다 하다 와이번에까지 이름을 붙인 겁니까?”
“당연하죠. 게다가 꽤 귀여워요. 한번 태워 드릴까요?”
물론 리처드 8세를 부르려면 근처 숲까지 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하지만 내 제안이 무색하게, 유스틴은 내 말을 듣자마자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귀엽다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을 구긴 것 같기도 하고.
“싫으면 말고요.”
우리 리처드 8세도 싫다는 사람 등에 태울 정도로 착한 애는 아니거든.
“그래도 대공자님이 리처드 8세한테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도록 잘 말해 둘게요…….”
“그거 정말 안 위험한 거 맞습니까?”
“적어도 저한텐?”
이제는 지크프리트 씨한테도 제법 살갑게 구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사실 ‘10초 이상 눈을 마주쳐도 죽이지 않는다’ 정도지만.
“그나저나 이번엔 꽤 빠르게 인정하는군요. 저번처럼 될 수 있을 때까지 부정할 줄 알았더니.”
잠깐의 침묵 끝에, 유스틴이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나는 그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답했다.
“이미 나름대로 결론 내리고 온 사람한테 숨겨 봤자 뭐 하겠어요.”
“흐음.”
“게다가 대공자님은 제 동업자기도 하고, 도움이 될 정보는 전부 공유하기로 했으니까요.”
물론 될 수 있으면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찮은 잔소리를 늘어놓을까 봐 그런 거였다.
“솔직히 대공자님이라면 비밀은 꼭 지켜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요.”
부모님이나 티나, 그리고 지크프리트 씨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내 비밀을 지켜 줄 거라는 막연한 신뢰.
그가 지금까지 내게 해 준 일을 생각하면 퍽 당연한 감정이었다.
“당신은…….”
내 말에 유스틴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말고 몇 번 입술을 어물거렸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사뭇 거리가 먼 반응이었다.
‘그야 당연하죠, 동업자잖습니까.’ 같은 말을 하면서 으스댈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저렇게 뭐 숨기고 있는 아이처럼 찔린 얼굴을……?
나는 슬며시 고개를 꺾고 물었다.
“혹시 제 정보 팔아넘기셨어요?”
“맹세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앞으로도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러자 유스틴이 단호하게 답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그렇게 죄지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적어도 숨기는 게 있는 건 분명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그의 은빛 눈동자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려니, 그의 낯빛이 더더욱 파리하게 물들었다. 흔치 않게 투명한 반응이었다
결국 유스틴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당신의 정보를 팔아넘긴 건 아닙니다. 비밀을 누설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다만……?”
“이유는 모르겠으나, 당신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부탁을 받아서요.”
이어 그가 머뭇대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리넥스의 성황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