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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52)화 (52/154)

제52화

“전 이제 아가씨가 외출하신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요.”

그날 저녁, 티나가 내게 이불을 덮어 주며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나는 이불에 파묻혀 눈만 내민 채로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뭘 주워 오실까, 어떤 사람과 엮이려고 이러시는 걸까.”

“헤헤.”

“웃을 때가 아니에요, 아가씨. 마님께서도 화가 많이 나셨다고요.”

기껏 요양을 보내 놨더니 또 뭔가를 잔뜩 가져왔다면서요.

티나가 짐짓 엄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힐난보다는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엄마한테 계속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러셀 경이 같이 가 줘서 별로 힘들지는 않았는데.”

“대신 ‘그’ 러셀 경이 며칠 만에 홀쭉해지셨죠.”

“그건 잠을 안 자서 그래. 제대로 자는 걸 본 적이 없어.”

“아가씨도 마찬가지고요.”

“티 났어?”

마차에서 충분히 자서 안 들킬 줄 알았는데.

내 말에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다시금 이불 안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갔다.

“아버지는 별말 안 하셨는데.”

잔뜩 당황하긴 하셨지만.

이게 다 뭐냐고도 물으셨고, 어디서 난 거냐고도 물어보셨고.

그렇지만 결국에는 별다른 잔소리 없이 ‘수고 많았다’라는 말과 함께 나를 부드럽게 안아 주셨다.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달라고 했던,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아가씨, 그건…….”

“응?”

“아니에요, 피곤하셨을 텐데 푹 주무세요.”

이내 티나가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사실 리처드 8세 타고 다닌 덕에 그렇게까지 피곤하지는 않은데.

나는 티나가 떠난 후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인 침실 천장을 바라보며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일단은 조금 자 볼까.

* * *

“잠이 안 와.”

큰일 났네. 마차에서 너무 많이 잤나 봐.

나는 몇 시간째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들면 루스 꿈에 들어가 볼까 했는데, 오늘따라 잠이 안 오네.

오랜만에 내 방 침대에 누웠으니 더 잠이 잘 와야 하는데.

‘어쩌는 게 좋으려나.’

양을 500마리쯤 세었는데도 잠들지 못할 정도면 진짜 안 졸린 건데.

나는 계속해서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주섬주섬 침대를 벗어났다.

이럴 땐 역시 밤 산책이지.

물론 침실 밖으로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 씨가 날 잡으러 올 테지만.

‘어라?’

예상과는 달리, 내가 침실을 빠져나가 몇 발자국이나 걸어갔는데도 지크프리트 씨는 내 앞에 나타나기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자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인 일인데.

나는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근래 사용인이 다시 늘어나면서 잘 느끼지 못했던 고요가 퍽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휑 비어 있는 장식장 윗면이 제법 익숙했다.

가산이 기울면서 하나둘 팔기 시작한 골동품들, 그렇게 제자리를 잃고 사라진 물건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 사들일 수 있겠지만, 부모님 성격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걸 살 돈으로 나를 더 챙기시려고 하겠지.

‘레어에 있는 골동품 중에서 몇 점 정도 들여다 놓을까.’

예쁜 거 많던데.

이런저런 생각을 흘리며 도둑고양이처럼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으려니,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쪽은 응접실인데…….’

그대로 홀린 듯 궤도를 바꿔 불빛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던 찰나였다.

그 순간, 반대쪽에서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순간 몸을 휙 돌려 벽면에 밀착했다.

본능적으로 숨어 버렸네. 하지만 이 김에 누구인지 염탐해 볼까.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나, 자네.”

곧이어 응접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였구나. 하지만 아빠는 원래 칼같이 취침하던 사람인데.

“형님?”

이어 흘러나온 음성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지크프리트 씨의 것이었다.

“형님이야말로 왜 아직도 안 주무시고?”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다 보니 벌써 이 시간이 되어 버렸지 뭔가.”

“여간한 일이 아니기는 했죠.”

지크프리트 씨의 말에 아버지가 작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어쩐지 조금 막혀 있는 듯해 보였다.

“포도주 한잔할 텐가?”

이내 다시금 아버지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포도주는커녕 변변한 맥주도 못 마실 정도로 힘들었었는데, 새삼 그새 많이 바뀌긴 했구나.

어쩐지 뿌듯한걸.

“전 포도주보다는 맥주가 더 좋은데요.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당분간 술은 마시지 않으려 합니다.”

“…….”

“미에나, 그 아이를 지키려면 여러모로 제정신인 편이 좋아서요.”

여기서 갑자기 내 이름이?

“그러고 보면 자네 부인은 자네가 취한 모습 보는 걸 특히 싫어했지. 취하면 밤새 연가를 부르는 게 주정이었던 것 같은데, 맞나?”

“뭐, 그 이유도 살짝 있고.”

이게 진짜구나.

나는 숨죽여 미소 지었다.

술 취하면 밤새 빅토리아 씨를 붙잡고 세레나데를 불렀다니, 그러면 싫어할 만도 하지.

“……상심이 클 텐데, 자네를 괜히 우리 곁에 묶어 두는 것 같아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야.”

곧이어 이전보다 살짝 가라앉은, 진중한 목소리가 응접실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자 여전히 장난스러운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그건 이미 저번에 충분히 설명한 것 같은데. 정말로 여기 있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요즘엔 꼬마 덕분에 정신없어서 상심할 틈도 없어요.”

“정신이 없다, 라. 확실히 요즘 그 아이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으면 정신이 조금 아득해지기는 해.”

아버지의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 허물없는 태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래서, 이번에는 내 딸과 어떤 멋진 모험을 하고 왔나?”

이전과는 달리 사뭇 날카로운 질문이 급습했다.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머금어져 있었으나, 그 내용과 질문의 의도는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내내 끌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황급히 원위치하고서 숨을 들이켰다.

내가 조금 과하기는 했어.

“에이, 모험이라니요, 형님. 그냥 요양만 조금…….”

“보통은 요양을 떠난다고 해서 돌아오는 길에 금은보화를 잔뜩 들고 오지는 않지.”

“하하하, 역시 그렇죠.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뒤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나는 이 순간 그가 하고 있을 생각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냥 확 다 말해 버려?’라고 생각하겠지. 가뜩이나 내가 부모님께 비밀로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데.

그리고 그사이, 아버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미에나가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

무척이나 담담한 음성이었다.

“형님.”

“미아가 내게 그러더구나. 앞으로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달라고.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던 거겠지.”

실제로도 그러고 있고.

나지막한 덧붙임 후, 한차례 정적이 저택을 휩쓸었다.

표정을 보지 못한 탓에, 아버지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쉬이 파악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건 아니야.’

그렇다고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도 아니고.

그래, 이건 내가 마주한 적 없는, 그가 내게 보여 준 적 없는 아버지의 일면이었다.

“……왜 알면서도 말리지 않는 겁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크프리트 씨가 덩달아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크, 자네는 미에나의 눈동자를 보고 무엇을 느꼈나?”

“…….”

“반짝이고, 호기심과 의욕이 넘치고. 여러모로 아픈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기 넘치는 눈동자지. 그렇지 않나?”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땐…….”

“그 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눈을 하고 있었어. 내 앞에서 직접 연명 치료를 멈춰 달라 요청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느릿하게 사위를 물들였다.

“아픈 아이를 쉬게 하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모르는 척 타지로 보내는 건지, 말리기는커녕 모르는 척하는 건지. 자네는 나를 내심 나쁜 아비로 생각했겠지.”

마치 부드러운 음악처럼.

“그저 그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고 싶은 것뿐이라네.”

“형님.”

“미에나는 언제나 의젓했어. 병을 앓는 동안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지. 본인이 제일 고통스러울 텐데도, 가장 힘들 텐데도 말이야.”

“…….”

“나는, 나는 그게.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너무 가여웠어.”

희미한 달빛을 오선보 삼아 이어지는 가락 속.

“그래서 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어떻게든 살리고자 했던 마음이 그 아이에게는 버거운 부담이 되는 줄도 모르고.”

부드럽게 흘러가던 음색이 끊기고, 짧고 뭉툭한 선율이 대신 자리를 채운다.

“매일, 매 순간……. 그 애가 일하지 않고 그저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네. 어떤 부모가 아픈 자식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 하겠어.”

수많은 당김음과 페르마타가 박자를 무시해 악보를 어지럽힌다.

“그래도 그게 진정 미에나가 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라도 그 애가 조금 더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면.”

설령 그러지 못해도, 남은 시간 동안 그 애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몇 년 동안이나 이기적으로 굴었어. 그러니 이제는 미아가 원하는 대로 둬야겠지. 설령 그 속에 내가 없더라도.”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나.”

마지막 말과 함께,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피날레처럼 울려 퍼졌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야곡.

아버지의 세레나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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