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농담이야. 그렇게 볼 것까진 없잖아.”
곧이어 그가 한 손으로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성의 주인과 계약을 맺은 게 있어서 정말로 괜찮아요. 러셀 경도 가만히만 계시면 전혀! 위험하지 않을 거고요.”
“알았어.”
“마음 같아선 저도 연약한 러셀 경을 곁에서 지켜 드리고 싶지만, 제가 안 가면 그게 러셀 경께 더 위험할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네요…….”
“알았으니까 그만해.”
아직 놀릴 거 한참 남았는데, 그렇게 간청하시니 어쩔 수 없군.
이후로 나는 얌전히 지크프리트 씨에게 안긴 채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창고에서부터 따로 움직이는 게 효율은 더 높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길을 잘못 들었다가 봉변당할까 걱정된 까닭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지크프리트 씨한테 안겨 있으니까 그렇게 체력이 달리는 것도 아니고.
“빨리 다녀와. 곧 너 약 먹을 시간이야.”
응접실에 다다르자, 그가 나를 아래로 내려 주며 당부하듯 말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시로 방긋 웃어 보였다.
“저도 아픈 건 싫으니까요. 금방 다녀올게요.”
사실 귀가 시간은 내가 아니라 어르신이 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 * *
그렇게 서서히 터 오르는 동을 뒤로하며 바지런히 걸음을 옮긴 결과, 나는 곧 빨간 점으로 표시된 지점에 도착했다.
‘이건 그냥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창고를 가로막고 있던 문도 화려한 편에 속했으나, 그조차도 지금 내 눈앞의 문보다는 덜했다.
대리석 위로 화려하게 양각된 금장식은 세월의 흔적이 무색하게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내 키의 몇십 배는 되어 보일 정도로 크고 거대하니, 저 문만 떼어 가더라도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을 터.
하나 이 문에서는 감히 손을 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건드리면 안 될 것만 같은 본능적인 위압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실례하겠습니다.”
뒤이어 아까처럼 손을 가져다 대자,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육중한 굉음과 함께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는 그 안으로 잽싸게 몸을 밀어 넣었다가 이내 드러난 풍경에 덜컥 걸음을 멈췄다.
인간의 손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높은 창문 새로 서서히 여명의 빛이 차올랐다.
그리하여 어렴풋이 드러난 실내를, 정확히는 내 시야를 가득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드래곤…….”
와이번을 보고 드래곤이라 했던 마법사가 이 모습을 본다면, 그는 절대로 두 개체를 착각할 수 없을 터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몸 전체를 빈틈없이 감싼 검은 비늘은 그 어떤 검으로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거대하고, 웅장했다.
이곳에 있던 그 어떤 것보다도.
‘지크프리트 씨가 왔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서서히 찾아드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닌, 손 하나 까딱 잘못하는 순간 끝이라는 본능적인 압박감이 온몸을 둘러쌌다.
지크프리트 씨의 살기를 맞대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아예 움직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저 드래곤에게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면, 그 상태에서 여기에 발을 들였다면.
나는 이 순간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인데…….”
옛날에는 저런 존재가 몇씩이나 존재했다는 소리잖아.
그중 하나가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 먹었다가는 제국이고 뭐고 폭삭 망했을 텐데.
‘그나저나 왜 부른 거지?’
자기 자고 있는 모습 구경하고 가라고 부른 건 아닐 텐데.
규칙적으로 내뱉어지는 숨결을 피해 슬쩍 발을 물린 순간이었다.
“왜, 새삼 이 몸의 위대함을 느끼기라도 했느냐?”
불현듯 귓가에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그대로 왁 소리를 내지르고서 제자리에서 펄쩍 날뛰었다.
아오, 깜짝이야. 혀 깨물 뻔했네!
“꽤 늦었구나.”
천천히 뒤돌아 눈동자를 위로 굴리자, 특유의 서늘한 금빛 눈동자가 장난스레 휘어졌다. 내 반응이 어지간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는 동시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르신, 제발요……!”
가뜩이나 심장도 약한데, 이러다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고.
“이미 본체도 제정신으로 마주하고 있으면서 엄살 부리기는.”
그가 한쪽 입꼬리를 시원스레 끌어 올리며 말을 건넸다. 나는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좌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건 분명 어르신의 본체일 텐데, 내 앞에 또 어르신이 있네……?
“유체 이탈?”
“멀리 나갈 수도, 오래 유지할 수도 없지만.”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토닥였다. 영혼인 까닭인지 별다른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전에 갑작스레 꿈에서 쫓겨난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구나.
나는 곧바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서 그를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아무튼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덕분에 큰 도움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뒤이어 나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위쪽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굴러떨어졌다.
“새삼스럽게?”
“어르신께 선물을 잔뜩 받았으니 이 정도 인사는 당연히 드려야죠.”
미물이라도 예의는 알고 있답니다.
다시 상체를 펴 슬쩍 위쪽을 살피려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툭 말을 내뱉었다.
“실제로 마주하니 더 지독하구나.”
뭐가요? 제 성격이요?
“네 안을 휘도는 그 힘 말이다. 터지기 직전처럼 보이는데, 어찌 그리 걸어 다닐 수 있는 게냐?”
이번에는 그가 허리를 굽혀 나를 살피며 부연했다. 나는 슬쩍 치켜세웠던 눈썹을 원상 복구하며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아, 난 또.
“진통제를 꾸준히 복용하고 있어서요. 약 기운이 도는 동안엔 그래도 괜찮아요.”
“보통 독한 약을 쓰지 않고서야 네겐 진통제도 소용없을 텐데.”
“그래서 꼬박꼬박 챙겨 먹어요.”
저번에 한 번 안 챙겨 먹었다가 쓰러진 전적이 있어서.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하니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 독한 것을 매번 먹으니 몸이 남아날 리가. 꼴을 보니 식사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은데. 아니, 못 하는 거겠지. 그게 부작용일 테니.”
“그거야 약 복용 전에도 항상 그랬는걸요, 뭘 새삼스럽게.”
어르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자, 그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웠다.
“당장 고통을 못 느낀다고 몸을 함부로 쓰다간 얼마 없는 생명만 더 축내게 될 터. 모르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여러 사람 돌아가면서 잔소리를 듣네요……. 일 끝나면 쉴 거예요. 진통제 말고도 다른 약들도 같이 먹고 있고요.”
“그래, 그래야지.”
이번에는 내 대답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어르신이 다시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고서 그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로 얼굴을 바짝 붙여 내 눈동자를 관찰하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 내 너를 살리러 갈 때까지 버틸 것 아니냐.”
고작 한 뼘보다 더 벌어진 거리에서, 여명이 담긴 황금빛 눈동자가 샐쭉하게 휘어졌다.
여전히 자신이 저를 살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태도였다.
그 모습이 조금은 오만해 보이는 동시에, 자꾸만 기묘한 기대감을 품게 만들어서.
나는 와이번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이곳에 올 때까지 가슴 한편에 쌓아 뒀던 궁금증을 툭 드러냈다.
“지금 살려 주실 순 없는 건가요?”
“지금?”
내 말에 그가 눈을 살짝 치뜨며 되물었다. 나는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황급히 덧붙여 말했다.
“사실 오면서 조금 생각해 봤거든요. 리처드 8세……, 와이번 등에 걸려 있던 마법이 대단하던데요. 이런 마법은 들어 본 적 없을 정도로요.”
“당연히 들어 본 적 없겠지. 이건 보통 인간은 쓸 수 없는 마법이니.”
저 ‘보통 인간’의 기준이 우리에게는 대마법사 정도겠지.
나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 대단한 마법이면 당장 완치는 불가능하더라도 현상 유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르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이제는 이렇게 제가 직접 올 수도 있게 되기도 했고요.”
“흐음.”
“다짜고짜 심장을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솔직히 완벽히 낫는 건 바라지도 않고요.”
저도 그 정도의 염치는 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제게 심장을 주시면 어르신이 죽는다든가…….”
“내 의지로 건네는 건 괜찮다. 이 몸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아.”
“앗, 그거 다행이네요.”
자꾸 심장을 준다고 하길래 살짝 걱정했는데.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선지급으로 주신다면 안 도망가고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이래 보여도 제가 성실과 신뢰의 아이콘입니다.
물론 최근에 성국 관련해서 조금 사기 아닌 사기를 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고객의 의뢰를 완수하기 위함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런 무지막지한 존재를 등쳐 먹을 배짱도 없고.’
그런 배짱이 있으면 그분은 세계를 지배하셔야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