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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49)화 (49/154)

제49화

이건 오지 말라고 표시해 놓은 걸까, 아니면 꼭 오라고 표시해 놓은 걸까.

나는 유달리 새빨간 점이 찍힌 곳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은 없다고 했었으니, 아마 꼭 오라는 표시일 것 같은데.

‘그런데 동행인은 또 별개라며.’

우리 지크프리트 씨 그래도 나름 착하게 살았을……걸?

괜히 내 곁에서 안 떨어지겠답시고 여기까지 같이 갔다가 큰일 나면 어떡해?

‘여긴 건들지 말자.’

딱 보니 점이 찍힌 부분이 바로 어르신이 있는 공간인 것 같은데, 어르신 성격에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을 용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엔 나한테도 살기를 뿜어낼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러셀 경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빨간 점이 찍힌 곳에는 가면 안 돼요. 아셨죠?”

자못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지크프리트 씨가 대단히 유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가라고 해도 안 갈 거야…….”

“좋은 생각이에요.”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힘 좋은 사람들은 머리 대신 몸을 쓰는 타입이라 대책 없이 돌아다니기 마련이던데.

당신은 공포 영화 클리셰를 깨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겠군요.

“우선 그럼 창고라고 표시된 부분부터 차근차근 살펴봐요.”

어쨌든 지도도 얻었겠다, 이제는 움직일 일만 남았으니 지체할 이유는 없다.

나는 곧바로 지도를 반으로 접어 손에 들고서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밤에 먹고 잔 약 기운이 아직 떨어지지 않을 때 많이 움직여 둬야지.

지크프리트 씨가 상비약을 챙겨 놓기는 했겠지만, 그건 효과가 일시적이니까.

‘아프기 전에 돌아가는 게 최고지.’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곧이어 우리는 지도에 표시된 첫 번째 창고에 도착했다.

“지도 없었으면 한참 헤맬 뻔했네. 무슨 성이 이렇게 커? 문도 크고, 복도도 무지막지하게 넓고.”

내내 주위를 경계하며 내 뒤를 따르던 지크프리트 씨는 창고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불평 같은 감탄을 토해 냈다.

나야 어르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지만, 확실히 일반 사람이 보기엔 이 성은 지나치게 넓고 높은 감이 있었다.

방뿐만 아니라 복도와 문도.

“무지막지하게 크네요.”

아마 어르신의 본체 사이즈에 맞춰 건축된 거겠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어르신의 본모습을 상상하는 동시에, 슬며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는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키가 작아서 손잡이가 안 닿아요, 러셀 경. 제가 열기에는 너무 무거워 보이고요.”

“허.”

“그러니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형님 내외한테서 이런 애가 나왔다는 게 안 믿기네…….”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는 몇 번 헛웃음을 내뱉었다가, 이내 손잡이를 붙잡고 열심히 문을 당겼다.

하지만 거칠게 성을 내는 팔의 근육이 무색하게, 창고의 문은 옴짝달싹하지 않은 채 견고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거 힘으로 여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몇 번을 더 시도한 끝에, 지크프리트 씨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힘으로 열리지 않는 거라면 역시 마법인가. 하지만 나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데.

그렇다고 어르신이 괜히 날 놀려 먹으려는 건 아닐 테고.

혹시…….

“잠시만요.”

불현듯 어느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직후, 뒤로 물렸던 발을 내디뎌 다시금 문 앞에 섰다.

그러고서 나는 조심스레 창고의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동시에 손이 맞닿은 부분에 환한 빛이 응집되더니.

“……!”

묘한 색채를 띤 빛은 이윽고 정교하게 세공된 장식을 따라 줄기줄기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뒤덮인 성당 아래 서 있는 것처럼 퍽 황홀한 광경이었다.

이내 한참을 오색찬란하게 뻗어 가던 빛이 천장 끝까지 닿은 순간, 줄곧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벌어졌다.

“아, 역시 손잡이는 속임수였네요.”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어 보이며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허탈한 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역시 손잡이는 속임수였네요? 알았으면 미리 말 좀 해 줘라.”

“저도 러셀 경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한 거라서요. 헤헤.”

“어휴, 저 웃음이 뭐라고.”

저럴 땐 꼭 제 부모를 닮았어.

작게 중얼거린 지크프리트 씨는 이내 내게 다시 손수건을 돌려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가면 갈수록 내가 필요 없어지는 기분인데.”

“그렇지 않아요, 러셀 경.”

당신이 없으면 이 계획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걸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젓고서 활짝 열린 창고 문 안을 가리켰다.

“자, 이게 모두 우리가 옮겨야 할 보물들이랍니다.”

동시에 창고 안으로 들어오던 지크프리트 씨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걸, 다? 한 번에?”

“에이. 이걸 어떻게 다 한 번에 옮겨요. 계속 왔다 갔다 해야죠.”

“허…….”

“이제 아시겠죠? 러셀 경은 제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예요.”

어르신이 굳이 동행의 출입을 허락해 준 걸 보면 운반은 내가 직접 해야 하는 걸 텐데.

리처드 8세도 여기는 안 들어오잖아.

그러니 적어도 성 밖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지크프리트 씨가 힘낼 수밖에.

최고의 짐꾼, 추천합니다.

“다시 황도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나는 좀 더……, 네 일상을 지키는 그런 평화로운 느낌을 기대했거든……?”

그가 여전히 넋 나간 얼굴로 보물과 나를 연달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해사하게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냉큼 말을 꺼냈다.

“이 짓도 몇 번 하다 보면 일상처럼 느껴지실 거예요. 일단 오늘은 딱히 준비해 온 게 없으니까 보물이 얼마나 있는지만 살펴보고 가요. 그래야 얼마나 더 와야 할지 가늠할 수 있으니까요.”

“이 짓을 몇 번이나 더…….”

“그리고 저택으로 돌아가면 황도 근교에 리처드 8세를 들키지 않고 타고 내릴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도 알아봐야 해요.”

함께해 주실 거죠?

말을 마치고서 다시금 환하게 미소 짓자, 지크프리트 씨가 굳은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돌아가자마자 무급으로 일 안 한다고, 당장 봉급 달라고 해야겠어.”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금화 몇 개를 주워 그에게 건네며 답했다.

“원한다면 여기 있는 거 몇 개 주워 가셔도 돼요.”

거기까지 말을 몰고 가는 것도 모두 지크프리트 씨 몫이니까.

* * *

과연 지크프리트 씨가 넋을 놓을 만하게, 창고엔 금은보화가 정말 산처럼 높게 쌓여 있었다.

특히나 가끔은 마정석이나 아티팩트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것들은 순도가 상당히 높아 웬만한 금덩어리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게 진짜 노다지지.’

이런 창고가 몇 개는 더 있으니,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장 국외 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이 창고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수준이었으니까.

“으흐흐, 흐흐.”

“애가 어쩌다가…….”

잔뜩 신나 웃음을 흘리려니, 지크프리트 씨가 유감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유물은 우리 가문 소유인 걸 들키지 않게 잘 세탁해서 경매장에 내놓고, 금괴나 은괴는 팔 필요 없이 유스틴에게 넘겨 사업 자금으로 대고.

고대 주화는 녹여서 사용하거나 일부는 경매에 올려 수집가에게 비싼 값을 주고 팔아도 될 터였다.

뭐, 이건 유스틴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고.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흐흐.”

남은 돈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잘 놔뒀다가 유산으로 넘기거나, 다른 사업을 벌여 볼까. 아니면 평소에 관심 있던 분야에 손을 대는 것도 괜찮을지도.

‘죽기 전에 바지런히 옮겨 놔야지.’

이 모든 영광을, 여기 있는 모든 걸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신 어르신께 바칩니다.

어르신 짱! 최고!

나는 또다시 허공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고서 헤실헤실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

저는 받은 만큼 일하는 사람이니, 이 한 몸 불살라 위그드라실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충성!

“대충 확인했으면 이제 슬슬 돌아가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크프리트 씨가 혀를 쯧쯧 차다 말고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에 이 지도, 아까 그곳에 올려 두고 가요.”

괜히 가져갔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말을 마치고서 괜히 지도를 한 번 더 펼쳐 본 순간이었다.

“잉?”

지도에 뭔가 추가된 것 같은데.

나는 빨간 점 옆에 추가된, 휘갈겨진 글씨체의 문장을 읽어 내렸다.

<가져가고 싶으면 들렀다 가거라.>

역시 그냥 보내 주시지 않는군.

“아무래도 저 혼자 잠시 어디 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뭐?”

지크프리트 씨가 나를 안아 들다 말고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안아 올리는 폼을 보니 이젠 제법 익숙해지신 것 같군. 나는 몸을 뒤척여 가장 편안한 자세로 바꾼 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가려는 데는 아마 저만 출입 허가를 받은 곳이라 러셀 경은 대기하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처음 들렀던 방 기억하죠? 거기 계시면 될 것 같은데.”

“혼자는 좀 위험하지 않아?”

“에이, 여기서 제일 안전한 사람이 바로 저인걸요.”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아니, 너 말고 내가 위험하단 소리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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