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이 필요하신가요? (47)화 (47/154)

제47화

“끔찍해.”

“끼잉…….”

“아니, 너 말고. 너 자세히 보니까 좀 귀엽다. 착하지, 우쭈쭈쭈쭈.”

목 아래쪽을 슬슬 긁어 주자 와이번이 다시 한번 헤벌쭉 미소 지었다.

나는 그 사이로 드러난 흉포한 이빨을 애써 못 본 체하며 와이번을 이리저리 어루만졌다.

아무튼 얘까지 들키면 안 그래도 꼬인 내 인생, 마지막까지 탈탈 털리고 말 게 분명했다.

‘거기다 까딱 잘못해서 와이번이 인명 피해를 내기라도 하면 당장 죽여야 한다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반려동물을 잃은 어르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가자꾸나’ 하면서 인간들을 싹 쓸어버릴지도 몰랐다.

이야, 인류 멸망 멀리 안 간다.

“……너희 부모님은.”

그렇게 머릿속으로 솜니움 멸망 시나리오를 굴리고 있을 때쯤.

내내 말없이 서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희 부모님은 네가 이러는 거 알고 있냐?”

“에이, 당연히 모르죠. 그래서 제 능력은 두 분께 비밀로 해 달라고 한 거잖아요. 대충 돈 냄새를 맡는 능력 정도로만 알고 계세요.”

사실 이쯤이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셨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딸이 와이번 타고 드래곤 레어 털러 간다는 사실까지는 눈치 못 채셨겠지.

“말할 생각도 없고?”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또 한 번 물었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우물쭈물 답했다.

“죽기 전엔 말할지도…….”

“그렇단 말이지.”

그러고서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검 자루를 꽉 쥐더니, 이내 몸을 홱 돌리고서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러셀 경?”

“네가 안 말하겠다니 대신 내가 말해야겠다. 형님네 따님께서 온갖 이상한 짓은 다 하고 다닌다고.”

“네? 아니, 잠깐만요.”

나는 곧바로 와이번에게서 손을 떼고 지크프리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니, 내가 이렇게 매달리는데 꼼짝도 안 하네.

“러셀 경도 들으셨잖아요. 등 위에 마법 결계가 있어서 하나도 안 위험하대요. 실력 있는 마법사니까 진짜 믿어도 돼요!”

“저 괴물 위에 타는 게 어떻게 하나도 안 위험해! 저거 타고 가서는 또 뭐 할 건데!”

“돈 벌어야죠! 이번 사업 자금이 거기 있단 말이에요!”

“그놈의 돈, 돈! 어린애가 벌써부터 왜 돈타령이야!”

“그거야 저 때문에 가문이 망할 뻔했으니까 그러죠!”

질질 끌려가는 몸을 뒤로 젖히며 외치자, 지크프리트 씨가 순간 움찔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모아 뒀던 가산은 물론이고 고리대금까지 손을 대셨어요. 그마저도 제때 갚지 못해서 대금업자가 저택에 찾아올 정도였고요.”

“무슨……, 설마 형님 내외가 너한테 직접 그런 속사정까지 말했어?”

“아뇨, 하지만 모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 정도로 몰려 있었으니까.

만약 내가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넘어갔더라면, 아마 상황은 더 꼬이고 말았겠지.

“불치병을 고쳐 보겠답시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쏟아붓는데, 그래서 하루하루 집안 사정 안 좋아지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낫지도 않을 자식을 위해 다른 사람한테 쩔쩔매며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그냥 두고만 봐요.”

치기 어린 수치심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많이 자랐다. 대신에 느낀 것은 죄책감과 자책감이었다.

나만 아니었으면 평범하고 유복하게 살았을 부모님. 기울어지지 않았을 가세. 무급으로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티나.

이 모든 걸 무시하고 침대에 누워 있기에는 받은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무거웠다.

그 분위기 속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조차 답답해 숨이 막힐 정도로…….

“그걸 왜 네 탓으로 돌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 순간, 지크프리트 씨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잖아. 네가 네 병 고쳐 달라고 떼쓴 것도 아니고.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

“네가 갚아야 할 필요는 없어. 적어도 네 부모님은 네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돈을 갚기를 바라시지는 않을 거다.”

그가 제게 매달려 있던 내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며 말했다.

“갚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가만히 받아먹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내 팔을 붙잡은 그의 손을 다시 그러쥐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 때문에 망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어요? 전 못해요. 그러니까 이건 저를 위한 거기도 해요.”

“미에나.”

“저요, 그동안 계속 저택에만 있다가 이제야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요. 솔직히 몸이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온종일 저택에 갇혀 있던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요.”

나를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얻은 이 자유가 좋았다.

바람에 맞서는 대신 그 바람을 타고 흘러가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었다.

어차피 스러질 생명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다 죽고 싶고.

당장은 그게 ‘돈 벌기’일 뿐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저도 더 욕심 안 부릴 거예요. 그때는 정말로 부모님이랑 여행 같은 것도 다니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거고요.”

이 사업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시두스 가문은 옛 명성을 뛰어넘는 자산을 지니게 될 터.

애초 나의 목적은 시두스 가문의 재산을 채워 넣는 거였으니, 그때는 정말로 쉬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유스틴은 아쉬워하겠지만…….

‘사실 직접 발로 뛰지 않아도 되는 거면 사업 몇 개 정도는 더 벌여도 되긴 하지.’

아이템 구상 정도야 누워서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서 막상 네가 바라던 걸 못 하게 될 수도 있어.”

지크프리트 씨가 마른세수하며 말을 건넸다. 나는 어느새 내 뒤로 달라붙은 와이번을 쓰다듬으며 씩씩하게 화답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제 능력 아시잖아요. 자고 있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어요.”

“너는 진짜…….”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바깥으로 향해 있던 몸을 다시 빙글 돌렸다.

그러고서 그는 나와 와이번을 다시금 번갈아 바라보더니.

“네가 그렇게까지 안전하다고 확신하니 일단 넘어가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너 둘러업고 도망칠 거야.”

결국 백기를 들어 올렸다.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하죠. 누구보다 빠르게 러셀 경의 등 위로 올라탈게요.”

“네 상태가 이상하다 싶으면 저놈 이용해서 곧바로 시두스 저택으로 갈 거고.”

“어, 그건 좀……. 우리 리처드 8세를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걷잡을 수 없어질 텐데요.”

“이름은 또 언제 지은 거야?”

“3초 전에요. 멋지지 않나요? 너도 마음에 들지? 8세도 꼭 붙여야 해요. 이것도 이름이니까.”

대답해, 김 리처드 8세.

짐짓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와이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헤벌쭉 미소 지었다.

대충 알아들은 것 같군.

“좋아, 그럼.”

나는 리처드 8세의 머리를 설설 쓰다듬은 후, 다시 지크프리트 씨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퉁명스레 물었다.

“뭐, 왜, 또 뭐 하려고.”

나는 최대한 사랑스러운 미소를 표현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저 좀 올려 주세요. 리처드 8세가 너무 커서 혼자서는 못 올라타겠어요.”

“지금 가게?”

“남들 눈에 띄기 전에 얼른 다녀와야죠. 적어도 아침에는 돌아와야 할 것 같으니 빨리 다녀와요.”

그러니까 좀 안아 주십시오.

재촉의 의미로 팔을 한 번 버둥대자, 그가 질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별걸 다 시킨다…….”

“헤헤. 이제 대충 사정 다 아셨으니까 얘기하는 거지만, 가서 짐 옮기기도 하실 거예요. 자루가 많으면 좀 많이 왔다 갔다 해야 할지도.”

“은혜 한 번 갚으러 왔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곧이어 그가 자연스레 나를 안아 들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목을 껴안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봉급 꼭 챙겨 받으라고 했잖아. 이게 다 수당에 포함되는 일이랍니다.

그리고 대망의 김 리처드 8세 첫 시승식.

“으하학, 저기 좀 봐라! 무슨 산이 동네 언덕처럼 보인다!”

가장 신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지크프리트 러셀 경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거 느낌 꽤 괜찮다.”

그가 한 손으로 리처드 8세의 등을 어색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신 목을 길게 뻗어 아래를 구경하고 있었다.

비행기 처음 탄 사람이 창밖 구경하는 것 같네.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이번 타기 전에 신발 벗어야 한다고 놀려 볼 걸 그랬나.

“안 무서워하시니 다행이네요.”

이 정도면 고소공포증 없는 사람도 겁부터 집어먹을 수준의 높이인데.

나는 그를 따라 목을 쭉 빼 경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현재 우리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높게 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태껏 와이번 목격담이 없었던 걸까.’

단순히 어르신의 결계 바깥으로는 잘 돌아다니지 않는 까닭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쨌든 이 정도면 낮에 돌아다녀도 눈에 띄지는 않겠는걸. 누군가 보더라도 큰 새라고 여기겠지.

그나마 문제라면 이착륙인데…….

‘날아오를 땐 정말 죽는 줄 알았지.’

나는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서 남몰래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