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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46)화 (46/154)

제46화

“설마 직접 찾아오려는 건가.”

그렇다기에는 ‘내 지금은 이런 것밖에 해 줄 수 없지만,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고 했던 말이 신경 쓰인단 말이야.

이런 것밖에 해 줄 수 없다는 건 뭐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건 또 뭔데.

혼자 알지 말고 나도 알려 달라고.

“손톱 물어뜯지 마.”

그 순간, 지크프리트 씨가 내 손을 붙잡아 내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한쪽 손을 감싸 쥔 투박한 손을 바라보았다.

“아차차.”

나도 모르게 그만.

곧바로 손을 내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니, 그가 내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떼 주며 물었다.

“평소보다 일찍 깬 것도 그렇고, 불안해할 거리라도 있는 거야? 꿈에서 뭐 잘못이라도 저질렀냐?”

“그럴 리가요. 제가 평소에 얼마나 착하게 사는데.”

“그럼 이왕 요양하러 온 김에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형님께 들어 보니까 그 앞에 멋진 호수도 있다던데.”

뒤이어 그가 입가에 호탕한 호선을 그리며 내 어깨를 가볍게 팡팡 쳤다.

나는 마트 앞 바람 풍선처럼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제대로 가누고서 얼얼한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면 이제 슬슬 지크프리트 씨한테도 말해 주긴 해야겠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저희는 놀러 온 게 아니고 돈 벌려고 온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별장 가는 거 아니었어?”

“별장에 가는 건 맞아요. 그런데 이제 따로 또 어디를 가야 해서…….”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던 찰나, 한순간 하늘이 번쩍인다 싶더니.

꽈광!

커다란 손이 내 두 귀를 감쌈과 동시에, 곧 찢어질 듯 맹렬한 천둥소리가 귀청을 강타했다.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지금 날씨는 조금 쌀쌀할지언정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그러니 하늘이 미친 게 아닌 이상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나무를 씹어 먹으려고 할 정도로 미친 드래곤을 하나 알고 있다.

이 모든 게 기막힌 우연이 아니라면…….

“뭐야, 저건.”

내 추측을 방증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 씨가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평소의 능청스럽고 가벼운 음성이 아닌,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깊고 경계심 짙은 목소리였다.

마치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나는 그의 시선 끝이 향한 곳으로 덩달아 눈동자를 굴렸다.

사위가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산책로 저편으로 거대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숲속 안을 빤히 관찰하려니, 곧 허공에 뜬 채로 느릿하게 날갯짓하는 괴생물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한 날개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육중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놈은 지크프리트 씨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눈치챈 건지, 곧 땅에 발을 디디고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여유로운 보폭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쭉 찢어진 동공의…….

“와이번?”

맞네, 와이번이네.

나는 뒤이어 완전히 드러난 거대한 파충류를 마주하고서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그 마법사가 와이번이랑 드래곤을 착각했을 만하네.

‘진짜 크다.’

이걸 인간이 이길 수 있긴 한 건가?

“물러서.”

이윽고 지크프리트 씨가 나를 제 등 뒤로 보내더니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동시에 검날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서늘한 소리가 실금처럼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봐도 저건 어르신이 보낸 것 같은데. 막 공격해도 되는 건가?

물론 쟤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하면 당연히 죽기 살기로 맞서야 하겠지만.

어르신 말로는 자기 권속은 절대로 날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너, 뛸 수 있어? 일단 도망친 후에 소리를 지르든 접시를 깨든 사람들 깨워서 같이 대피해.”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뽑아낸 검을 와이번에게 겨냥하며 내게 말을 건넸다.

그의 검 끝에서는 지난번과 차원이 다른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크륵…….”

와이번 역시 제게 향한 살기를 감지한 듯, 꼬리를 탁탁 치며 위협적으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거 진짜 미치겠네.

죄송하지만 저 사실 이 몸으로는 이제 단거리 달리기도 못 하거든요.

그리고 저 와이번이 어르신의 반려 와이번이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라서요…….

“잠시만요, 러셀 경.”

지크프리트 씨의 등 뒤에서 슬쩍 빠져나와 입을 연 순간이었다.

이쪽을 향해 위협적으로 날갯짓하던 와이번의 동공이 내 눈동자와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싶더니.

“크륵……?”

쿠웅!

와이번이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말고 그대로 발라당 배를 까뒤집고 누웠다.

심지어 그 커다란 입은 마치 웃는 것처럼 어설프게 벌려져 있었다.

얼씨구, 꼬리도 흔드네.

“개야……?”

이건 단순히 해치지 않는 정도가 아닌데?

“쟤 왜 저러냐?”

지크프리트 씨 역시 눈앞의 상황을 퍽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아 내리며 멋쩍게 입을 열었다.

“저 와이번, 아무래도 제가 아는 분께서 보낸 것 같아요.”

“와이번을? 누가? 미친놈 아냐?”

“미친놈은 맞는데, 또 그렇게까지 나쁜 분은 아니에요…….”

아마도.

머릿속으로 어르신의 나른한 미소를 떠올린 후, 다시금 시선을 돌려 와이번을 관찰하듯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목에 뭔가 반짝이는 게 걸려 있는 것 같은데.

“저게 뭐지?”

나는 곧바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와이번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내 팔을 그러쥐고 뒤로 잡아당겼다.

“위험하게 뭐 하는 거야.”

“저기에 뭐가 걸려 있잖아요. 확인해 봐야죠. 그리고 쟨 저 안 해쳐요.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나랑 눈 마주치자마자 배 까고 애교 부리는 녀석이 날 공격할 리가.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내 뒤를 따랐다.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손에는 발검한 검을 쥔 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와이번은 내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도 그저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옳지, 착하지.”

정말 무섭고 착하게 생겼구나.

나는 천천히 팔을 뻗어 와이번의 목 근처로 손을 갖다 댔다.

그 목에 걸린 건 다름 아닌 마정석이었다. 그것도 순도가 매우 높아 보이는, 최상급 마정석.

이 정도의 마정석이면 저택 몇 채쯤은 거뜬히 살 수 있겠는데.

와이번의 비늘을 지나 마정석에 손을 댄 찰나였다.

“……아얏.”

마정석 위로 손가락이 맞닿자, 짜릿한 느낌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미세 전류로 무언가를 스캔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몸을 휘저은 전류는 다시 마정석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아마 이 아이가 네게 잘 도착한 거겠지.

마정석이 빛을 뿜어냄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내 네게 보내는 선물이다. 이 아이를 타고 오면 내 둥지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게다.

이걸 타고 오라고요?

날 떨어트려 죽이려고?

― 그 등 위에 특별한 마법을 걸어 뒀으니, 죽을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내 모르지 않으니.

“오, 세심하신데.”

― 또 이 아이를 부르고 싶거든 이걸 쥐고 이름을 부르면 된단다. 이름은 대충 네가 알아서 짓도록. 그럼 둥지에서 보자꾸나.

마지막 말과 함께, 환한 빛을 뿜어내던 마정석이 다시 본래의 은은한 빛깔로 돌아갔다.

나는 여전히 내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와이번을 바라보며 판단을 마쳤다.

말하자면 안심 택시 호출 서비스인가. 나쁘지 않은걸.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는 예의 ‘문제’를 향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지크프리트 씨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헤헤, 그렇게 됐습니다.”

“이거 혹시 꿈?”

곧이어 그가 나와 와이번, 그리고 내 손에 들린 마정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꿈 아니에요. 애초에 러셀 경은 주무신 적도 없잖아요.”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게 지금 다 네 그 능력 때문이냐고.”

“아, 그……으렇죠?”

“대체 꿈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그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와중에도 손에서 검을 안 놓네. 이게 바로 검사인가.

어쨌든 저 혼잣말을 끝으로, 다시금 깊은 침묵이 찾아들었다.

나는 지크프리트 씨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손에 얼굴을 들이미는 와이번을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얘를 타고 가게 된다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겠는걸.

우선 유스틴의 별장에 갈 필요가 없겠네. 이번은 이미 요양 갈 거라고 말을 해 놨으니 어쩔 수 없지만.

‘얘도 들켜서는 안 되고.’

지크프리트 씨야 드래곤 레어에 함께 들어갈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 외의 인물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와이번을, 그리고 그걸 타고 다니는 내 모습을 들킨다고 상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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