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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45)화 (45/154)

제45화

자연스럽게 말의 요점을 슬쩍 돌리며 묻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내 생각을 간파한 듯싶었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그야 오랜만에 내 흥미를 동하는 존재를 만났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알았으면 자주 좀 오거라.]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자길 안 믿는 거냐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는 않네.

나는 부러 더 투덜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황도에서는 어르신 계신 곳까지 범위가 안 닿는단 말이에요. 그 김에 정확한 레어 위치 좀 알려 주세요. 오늘도 사실 이거 물어보려고 온 건데.]

[같이 올 사람을 구했나 보구나.]

[참하고 튼튼한 사람으로다가 하나 구해 봤습죠, 헤헤.]

[그걸 다 옮기려면 조금 튼튼한 정도로는 안 될 텐데.]

[그 정도로 보물이 많나요?]

예상은 했지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려니, 어르신이 이번에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너는 보물 얘기할 때 가장 즐거워 보이는구나.]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니까요. 그런 김에 정확한 자금 현황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몇 배로 불려 드릴게요.]

사기 수법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진심입니다. 믿고 투자해 보십시오.

나는 어르신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주무시기 전 취미가 보물 모으기였을까요? 그리고 저번에 금은보화는 주로 창고에 쌓아 놓았다고 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창고가 약 몇 개쯤일까요? 각 보물의 가치는 그 당시 물가로 따지자면 어느 정도인가요?]

[…….]

[창고가 여러 개라면, 그 창고들은 한곳에 모여 있는 형태일까요? 아니면 산개해 있나요? 그렇다면 약도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르신만 괜찮으시다면 좀 그려 주실 수 있을까요? 괜히 잘못 돌아다녔다가 어르신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좋아, 이쯤이면 묻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군.

마지막 말을 마치고서 숨을 크게 들이쉬자, 그가 작게 헛웃음을 내뱉고서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숨은 쉬면서 말하거라. 난 널 잡아먹을 생각이 없대도.]

[헤헤.]

아무래도 국외 사업이 걸린 일이다 보니.

멋쩍게 웃음 짓는 사이 어르신이 한쪽 다리를 꼬며 나긋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보물을 모으는 행위 자체에는 딱히 관심 없었지만, 내게 찾아오는 인간들이 항상 무언가를 바치더구나. 그것들을 처박아 둔 방은 못 해도 열 개는 되겠지. 방 하나의 크기는 이쯤 될 게다.]

[이만한 창고가 못 해도 열 개.]

저리 비켜, 유스틴.

제국 제일의 부자는 어르신이다.

[그리고 내가 인간의 물가 따위를 알 것 같으냐.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알아보거라.]

[아유, 당연하죠. 그런 건 제 전공이죠. 아니었어도 이제부터 전공으로 삼을 수 있어요.]

고대 유물 같은 건 세탁을 좀 해야겠지만, 그건 유스틴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대충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집어넣었으니, 한곳에 모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복도에도 널려 있을 테고.]

[잘 주워 갈 자신 있습니다. 어르신 둥지 약도만 조금 그려 주세요.]

[약도라.]

곧이어 그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서 씩 미소 지었다.

나는 흑비단처럼 일렁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홀린 듯 눈에 담았다.

짧은 찰나, 한차례 정적이 그의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지나친 후.

[네게는 딱히 필요 없을 듯한데.]

그가 특유의 담담하면서도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디를 거닐든, 내 심기가 언짢을 일은 없을 테니.]

[오, 진짜요?]

[물론 네 동행인은 별개의 일이지만.]

[아, 진짜요…….]

지크프리트 씨를 위해서라도 약도는 꼭 받아야겠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섣불리 들어가면 안 될 곳 정도는 꼭 알아 놔야 할 듯싶었다.

낯선 곳에서 초월자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벌을 받기에는 지크프리트 씨도 꽤 착하게 살아왔단 말이에요.

[모쪼록 제 동행인도 조금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르신.]

예의와 정중을 담아 말하자, 그가 또 한 번 나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그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면 모두 재미있어하는 게 분명했다.

너무 오랜 기간 혼자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다음번엔 낙서 책처럼 혼자 놀기 책자 같은 걸 소개해 줄까.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좋겠구나.]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잠깐 생각에 빠진 듯싶었던 어르신이 돌연 입을 열었다.

나는 곧바로 상념을 지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내 시선이 그의 황금빛 눈동자와 정확히 맞물린다 싶더니.

쿠구궁―!

한없이 고요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쪼개지듯 산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엥? 어르신?]

[내 지금은 이런 것밖에 해 줄 수 없지만,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니, 어르신?]

[미물을 위해 이런 짓까지 하게 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아니…….]

혼자 중얼거리지 마시고, 일단은 이게 지금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꿈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이거 설마 어르신이 잠에서 깨려는 건가?

잠이 깨고 싶다고 깨지는 거였어?

[걱정하지 말거라.]

하나둘 부서지는 공간 속에서, 그가 유유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영혼이 이어져 있는 이상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찾아낼 수 있으니.]

* * *

꿈에서 깨 눈을 떴을 땐 아직 여명조차 밝지 않은 꼭두새벽이었다.

나는 가만히 누운 채로 으스스한 새벽 공기를 몇 번 폐부로 밀어 넣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놀라서 그런가, 잠 다 깨 버렸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못 깨어나시는 줄 알았는데.’

정보가 거의 몇백 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나는 또 그동안 꼼짝없이 잠만 자야 했던 건 줄 알았더니만.

‘만약 정말 마음대로 깨어날 수 있는 거라면.’

설마 진짜로 나를…….

“아니, 아니야.”

괜히 헛된 희망을 품어 봤자 나중에 더 큰 절망만 얻을 뿐이다.

나는 고개를 홰홰 내저은 후 느릿느릿 방을 빠져나갔다.

어르신 꿈에서 튕긴 바람에 정신이 말똥말똥해져 버리고 말았으니, 대충 이 근처를 산책할 심산이었다.

몸이 힘들다고 산책을 등한시해서는 안 되는 법. 이렇게라도 체력을 길러 놔야지.

“그래야 더 오래 돌아다닐 수―”

“혼자 어디 가려고?”

“이쌰아악……!”

앗, 씨.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작게 소리를 내지르자, 지크프리트 씨가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아직 새벽이잖아. 다른 사람 깨겠다.”

“제발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주세요, 러셀 경……. 제가 일어난 건 또 어떻게 아신 거예요?”

분명 침실을 빠져나올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이 위에 있다가 딱 너 같은 발소리가 나길래 내려와 봤지.”

그가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이곳이 최상층이라는 걸 깨닫고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안 주무시고 지붕 위에 계셨다는 소리군요…….”

“보통은 발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지 않아?”

“그보다는 러셀 경이 며칠째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몇 배는 더 신경 쓰이는걸요.”

드래곤도 만난 사람이 발소리 구분하는 청력 정도에 놀랄쏘냐.

자못 유감을 듬뿍 담아 말하자, 지크프리트 씨가 어색하게 웃음을 내뱉으며 변명했다.

“밤하늘이 예쁘더라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설마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오랜만에 멀리 나가니까 설레기도 하고.”

“…….”

“지금은 좀 봐줘라. 내가 자는 사이에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돌아가면 푹 잘게, 응?”

곧이어 그가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곧바로 내 뒤에 따라붙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웬일로 일찍 깬 건데? 그리고 이 시간에 혼자 산책하면 위험해.”

“꿈에서 깼더니 다시 잠이 안 와서요. 산책은 마침 안 주무시는 러셀 경께서 함께해 주실 거라 괜찮아요.”

“오늘은 무슨 꿈에 들어갔는데?”

“비밀이에요.”

이후로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를 빠져나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까닭에, 실외는 차가운 공기를 머금어 스산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씨가 있으니 별로 무섭지는 않지만.

‘산책하고 돌아오면 좀 밝아져 있으려나.’

일찍 일어난 김에 아예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잠깐, 별장에 일찍 도착하면 뭐 해?’

어르신은 나한테 레어 위치도 제대로 안 알려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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