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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44)화 (44/154)

제44화

나는 지크프리트 씨의 꿈 문이 떠올라야 할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자러 갈 것처럼 슝 사라지더니 순 거짓말쟁이가 따로 없어요.

내 꿈 서재에 들어가서 플라네타륨을 구경하다 나왔으니 그래도 대충 몇 시간은 지났을 텐데.

[나보고는 일찍 자라더니.]

딱히 꿈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허전하단 말이야.

어둠에 잠식된 공간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경호를 맡겠다고 자처한 이후부터, 지크프리트 씨는 거의 매일 새벽 늦게 잠들고선 아침 일찍 기상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겉으로는 전혀 티가 안 나지만.’

사실 그 이유를, 정확히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내 앞에서는 밝고 능청스럽게 행동한다고 해도,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이다.

당연히 괜찮을 리 없다.

그저 괜찮은 척을 할 뿐.

‘그래도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몸 상할 텐데.’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내일 출발하기 전에 일찍 일찍 자라고 잔소리 좀 해야겠어.

[아무튼, 남은 시간 동안 뭐하지.]

이 주변은 특별히 빛나는 문도 없고. 어쩐지 오늘은 무작위로 꿈 구경할 기분도 아니라서.

[아, 그러고 보니.]

탐지 범위가 어느 정도로 늘어났을지 실험해 보려고 했지.

[그럼 일단 루스부터 해 볼까.]

내가 주로 들어가는 꿈 중에서 이곳과 가장 먼 게 아마 루스의 꿈일 테니.

생각을 마친 즉시 종이비행기에 루스의 이름을 적어 날리자, 종이비행기는 몇 번 갈팡질팡하다 말고 아래로 툭 추락했다.

음, 역시 아직은 안 닿나 보네.

[그럼 다음은…….]

이어 유스틴의 이름을 적어 보낸 종이비행기는 유유히 순항해 나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황도 끝자락까지는 닿는 모양이었다.

[혹시 그러면 이것도 되나?]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지난 기억을 쥐어짜 내 종이 위에 그리듯이 글자를 적어 내렸다.

대체 무슨 글자인지 해독할 수조차 없어 고대어라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인, 바로 그 글자를.

[얍.]

또 한 번 힘차게 비행기를 날리자, 잠깐 아래로 떨어지는 듯싶었던 종이비행기가 이내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게 되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말고 종이비행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인식 범위가 넓어져서 탐지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드래곤 레어와 이 숙소, 그리고 별장의 위치가 삼각관계에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좋지만.’

다음부턴 굳이 별장으로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거잖아.

좀 오래 걸어가야 하긴 하지만, 현실에서 마차 타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보다 빠르기도 하고.

일대가 하얗게 변한 공간에 들어서고도 한참을 더 걸어 나간 후, 드디어 어르신의 문 앞에 다다랐다.

저번처럼 또 깜깜하고 눅눅한 공간이 나타나려나. 거기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난 깜깜한 거 싫단 말이야.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괜히 문 앞을 서성이며 미적거리고 나서야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예상과는 달리, 나를 반긴 것은 그때의 눅눅한 공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곳이 어딘지를 파악할 수도 없게 내 시야를 가득 장악한 매서운 눈매의 소유자가…….

[악, 깜짝아!]

얼굴이 너무 코앞에 있잖아!

깜짝 놀라 빽 소리를 내지르자, 나를 응시하던 황금빛 눈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왔느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느라 좀이 쑤시는 줄 알았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딸꾹질을 애써 진정시키고서 작게 투덜거렸다.

[소식을 기다리셨을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문 앞에 서 계시면 제 심장에 좋지 않아요.]

[담도 큰 녀석이 엄살은.]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을 때의 얘기고요.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엔 면역이 없다고요.]

게다가 하필이면 얼굴도 까무러치게 아름다워선.

내 말에 어르신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느릿하게 굽혔던 상체를 폈다.

그에 따라 완전히 멀어진 얼굴끼리의 거리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역시 이 정도의 거리감이 딱이야.

이제 좀 살겠군.

나는 어르신 주변을 슬쩍 훑어보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딱 보니까 어르신 댁인 것 같은데.

저번에 나와 대화했던 곳과는 좀 다른 분위기네. 더 넓고, 높고, 중앙엔 긴 테이블도 있고.

식당인가?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이윽고 그가 느른하게 고개를 꺾으며 답했다. 그 얼굴에는 역시나 나른하여 자못 매혹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굳이 여기서요?]

[기다리는 일이 적적하여 무언가라도 씹고 있으려던 참이었다.]

곧이어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었다.

무언가라도 씹고 있으려고 했다면서 저걸 가리켰다는 건, 결국 저걸 씹겠다는 뜻이겠지?

[어…….]

나는 3초 동안 어떻게 반응을 해 줘야 할지 맹렬히 고민하고 난 후, 가장 그럴듯한 반응을 꺼내 들었다.

[채식하시나 봐요……?]

동시에 어르신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농담이에요.]

나는 빠르게 덧붙여 말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정색하신담.

그리고 솔직히 나도 아닌 거 알면서 말한 거거든. 드래곤이 채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말 안 될 것까진 없지 않나?

인간으로 변신도 가능한 종족인데.

[허튼 생각.]

그 순간, 어르신이 식탁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옮겨 내 이마를 툭 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이마를 부여잡고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어르신이 식이 습성이 독특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긴 하지. 드래곤 레어에 이런 본격적인 식당이 있는 건 신기하긴 하지만.

‘……사실 조금 궁금하기는 해.’

드래곤은 생식하나? 주로 뭘 먹지?

이런 식당이 있는 거면 조리된 음식을 즐기는 편? 혹시 미식가?

재료엔 채소가 없나? 잡식성이면 뭐든 먹지 않을까? 그럼 저것도 씹어 먹을 만한데.

[네가 쓸데없는 잡념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장소를 옮기는 게 낫겠구나.]

떠오르는 잡념에 매몰된 사이, 어르신이 고개를 설설 내젓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주변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더니, 이내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지난번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방이었다.

[앉거라.]

이어 그가 테이블 앞을 턱짓하며 말했다. 나는 순순히 의자를 끌어 앉으며 물었다.

[아까 그곳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가구가 모두 인간 기준이네요. 평소에도 인간 모습으로 계시는 건가요?]

드래곤의 몸으로는 섬세한 작업 같은 걸 못 해서 인간으로 변신하는 거려나.

앞발로 포크나 나이프를 쥘 수는 없을 테니.

[평소에는 본래 모습을 유지하지. 굳이 미물의 형체를 따라 할 필요가 있겠느냐?]

[역시 그런가요…….]

[그래도 순 터무니없는 생각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눈썰미가 좋구나.]

내 말에 그가 손바닥에 턱을 괴고서 심드렁히 말을 꺼냈다.

[잠들기 전에는 나름대로 인간과 교류라는 걸 해 왔단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희의 문명이 그 정도로 발달했을 리가 없잖으냐.]

[아, 넵.]

[물론 나도 내어 주는 만큼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 쓸모 있는 정보를 많이 얻었지.]

그러고서 그는 황금빛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더니.

[하여 내가 어느 정도의 힘을 주면 네가 터져 나가는지도 알고 있단다.]

그대로 눈꼬리를 사르르 휘며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굳어지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이완시킨 후, 기계적으로 손뼉을 짝짝 쳤다.

[와아, 그것참 유용한 정보네요. 알고 계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웃으라고 한 농담이었는데, 어쩐지 반응이 시원찮구나.]

[아니에요, 어르신. 안 보이세요? 제 배꼽 빠져서 저쪽으로 굴러가고 있잖아요. 하하, 아하하.]

[……되었으니 그만해라.]

[넵, 감사합니다.]

애석하게도 제가 윗사람 비위 맞추는 짓은 많이 안 해 봐서.

머쓱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던 손을 멈추자, 어르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일단 저번에 어르신이 알려 주신 글자 그대로 적어서 몇 번 찾아보기는 했는데요, 별 소득은 없었어요.]

나름대로 이동하는 족족 종이비행기를 날려 봤는데 말이지.

아마 멀리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한 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펴보긴 할 테지만, 위그드라실이 솜니움에 없을 가능성도 상정해야 해요. 하지만 제 몸이…….]

[그런 건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르신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나는 몇 번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그런 건 상관없다니. 뭐가요?

위그드라실이 솜니움에 없을 가능성? 아니면 내 몸 상태?

[내 직접 너를 돌보는 이상 네가 죽을 일은 없어.]

아하, 후자였군.

[그러니 천천히 해도 괜찮단다. 여태껏 기약도 없이 무력하게 기다린 세월보다야 짧겠지.]

곧이어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언뜻 장난스럽게 느껴지면서도, 깊고 진중한 웃음이었다.

요컨대 이건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거지.

‘당장 내 상태가 악화해서 내일 죽으면 어쩌려고.’

역시 이건 한 귀로 흘리는 게 낫겠어. 어차피 내가 바라는 건 목숨 부지가 아니라 레어의 보물들이니까.

[언제는 기다리는 게 적적해서 나무를 씹어 드시려고 하셨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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