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나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나타난 레오날드 씨를 바라보았다.
유스틴의 별장을 떠올렸더니, 자연스레 별장의 사용인도 딸려 온 모양이네.
‘어차피 루스 사회성 훈련도 해야 하니까.’
이왕 별장 빌린 김에 사용인도 조금 빌리겠습니다, 대공자님.
[새로 만난 사람한테는 예의 바르게 인사해야지, 루스.]
곧이어 고개를 돌려 루스의 손을 살짝 잡아끈 순간이었다.
[아, 그…….]
지난번 가짜 유스틴을 만났을 때처럼 사람에게 쉽게 다가갈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루스는 레오날드 씨를 마주하자마자 주춤주춤 내 등 뒤로 숨어들었다.
심지어 맞잡은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스? 괜찮아?]
나는 곧바로 레오날드 씨의 형상을 지워 내고서 루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루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작은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괜찮아, 루스. 할아버지 갔어, 없어. 이제 다 괜찮아.]
나는 루스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루스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드문드문 말을 꺼냈다.
[죄, 죄송해요……. 원래 이런, 이러지 않았는데.]
[나한테 왜 사과해. 잘못하지 않은 일에 사과하지 마, 루스.]
[하지만…….]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건 나쁜 것도,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계속해서 그를 도닥여 주자 루스의 호흡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호수를 보고 싶어요.]
그러고도 몇 분이 더 지난 후, 루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러 가자.]
루스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네.
그렇다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우와아…….]
곧이어 호수 가장자리에 도착한 루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환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루스.]
[물이 예쁜 파란색이에요.]
[응, 예쁜 파란색이네.]
저번에 색깔 공부했더니 잘 써먹는군. 귀여운 녀석.
머리카락을 설설 쓰다듬으며 맞장구를 치고 있으려니, 루스가 돌연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해사하게 눈꼬리를 휘며 내게 말했다.
[미에나 눈 색도 예쁜 파란색.]
나는 그대로 웃음을 터뜨리며 또다시 그의 머리를 쑤석거렸다.
[루스, 네 눈도 예쁜 파란색이야.]
[이 호수는 제 눈보다 더 연한 파랑이에요. 그치만 하늘색보다는 진해요.]
[그렇지. 파란색이어도 다 같은 파란색은 아니지.]
[그래서 더 신기해요…….]
말을 마친 루스는 다시금 시선을 내려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완전히 황홀경에 빠진 듯싶었다.
하긴, 맨날 욕조나 컵에 담긴 물만 보다가 이렇게 넓은 호수를 봤으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겠지.
[미에나, 미에나. 혹시 호숫물은 손에 담아도 파란색일까요?]
곧이어 루스가 호기심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과연 어린이답게,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냉큼 호수 아래로 손을 뻗은 상태였다.
[안 돼, 루스. 그렇게 함부로 손을 뻗으면…….]
넘어진다!
나는 뒤늦게 경고를 날리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루스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운 타이밍이 조금 더 빨랐다.
동시에 풍덩―! 하는 소리가 명쾌하게 울려 퍼지더니.
[……?]
호수에 빠진 루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해서 일부러 호수 수심을 얕게 설정해 놔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악몽으로 변질할 뻔했네.
[일어나, 루스.]
나는 그의 앞에 손을 내밀고서 엄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부터는 안전 수칙 교육이다, 인마.
그렇게 건전하고 재미없는 안전 수칙 교육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호수 근처를 산책하고 근처 식물도 관찰하며 유익한 현장 체험 학습 시간을 보냈다.
한껏 들떠 신나 하는 루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를 이곳저곳 데려가고 싶은 욕구가 퐁퐁 샘솟을 정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사전 답사를 다녀와야겠지만.
‘다음번엔 상상 친구들까지 껴서 소풍을 가 볼까.’
그 김에 루스가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파악도 좀 하고.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마차 속, 나는 며칠 전 밤의 기억을 상기하며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단순히 낯을 가리는 건 아닌 거 같았지. 그건 ‘낯을 가린다’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어.
레오날드 씨의 무엇이 루스를 공포에 빠트린 걸까.
외모? 체형? 입고 있는 옷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특정 나이 대에 거부감을 지닌 걸지도 모르겠다.
일단 루스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차근차근 알아봐야지.
“그 김에 얼굴 좀 빌려도 될까요, 러셀 경?”
“그냥 지크라고 부르라니까.”
생각을 마친 즉시 마차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며 묻자, 곁에서 말을 타고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붙잡고서 다시 마차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내 얼굴은 왜? 누구 혼내 줄 사람 있어?”
본인 얼굴이 꽤 무섭게 생겼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군.
“친구한테 소개해 주려고요.”
“친구? 그 대공자?”
“말고요. 게다가 대공자님은 이미 당신 얼굴 잘 알고 있잖아요.”
“그 산발 아래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있다는 사실까진 몰랐을 텐데.”
“어련하시겠어요.”
크레이튼에서 만났을 땐 몰랐는데, 이 사람 되게 능청스럽네.
나는 고개를 설설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었다.
드래곤 둥지 털러 가는 길입니다.
I’m a savage.
네 둥지 쌔벼 줄게.
* * *
유스틴과 아버지에게는 요양 가고 싶다고 말해 놓은 탓에, 최초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에버딘 별장이었다.
그곳으로 가면 중간에 몰래 빠져나와야 한다는 사소한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눈속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어로 가기 전에 어르신이랑 한번 다시 얘기도 나눠 봐야 하고.’
그간의 수확이나 레어의 정확한 위치 같은 이야기들.
어쨌든, 저녁이 되자 우리는 지난번처럼 중간 거점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사실 지크프리트 씨가 있으면 야행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애석하게도 내 몸이 몸인지라.
“이런 곳에 이런 여관이 있다고?”
곧이어 나를 마차에서 내려 준 지크프리트 씨가 눈을 댕그라니 뜨며 감탄했다.
앞의 ‘이런’과 뒤의 ‘이런’은 같은 단어지만 뉘앙스는 전혀 다르지. 이것도 루스에게 가르쳐 주는 게 좋겠다.
“여기도 에버딘 가문 소유 별장 중 하나일걸요. 중간 거점용이라 그렇게 크진 않지만.”
“걔네는 무슨 별장을 역참 세우는 것처럼 지어 놔?”
“그러게나 말이에요…….”
나도 처음엔 그냥 특출나게 시설이 좋은 여관인 줄로만 알았지.
“숙소에 시중드는 사용인이 있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유스틴이 지정해 준 숙소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게 패착이었어.
“동업자 요양 보내는 데 이렇게 진심인 사람도 이상하지만.”
곧이어 내 짐을 받아 든 지크프리트 씨가 질린 듯 입을 열었다.
“이렇게 멀리 가는데 나만 데리고 온 너도 참 너다.”
“헤헤, 러셀 경이 일당백인 걸 어쩌겠어요. 진짜 최고!”
“칭찬받으려고 한 말 아닌데.”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하자, 그가 멋쩍다는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정말로 최고인 걸 어떡해.
‘완전 내가 바라던 인재상.’
막말로 유스틴이 나를 발견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합리적인 의심까지 할 정도였다.
무위야 말할 필요도 없고.
긴 간병인 생활로 응급처치나 의학 지식에도 뛰어나 약 먹을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나를 일깨워 주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용병을 고용했는데 만능 집사가 왔어요’의 상황.
‘거기다 부모님의 신임까지.’
솔직히 지크프리트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둘이서만 요양을 떠날 수는 없었겠지. 당장 티나나 다른 사용인을 붙였을 터였다.
“러셀 경 아니었으면 앞으로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질 뻔했어요.”
“대체 그 계획이 뭐길래?”
“일단 가서 설명해 드릴게요.”
그전에 괜히 말했다가는 안 따라오고 그대로 마차를 돌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이런 걸 따져 보면 부모님 친구라는 사실이 마냥 좋지만은 않구나.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다른 짓 하지 말고 푹 쉬어.”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사용인에게는 짐을, 내게는 약 봉투를 넘겨주며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씩 미소 지었다.
“여기서 잠자는 거 말고 딱히 할 게 뭐가 있겠어요. 러셀 경도 들어가서 쉬세요. 어차피 이곳엔 따로 경비도 돌아다니니까.”
말을 마치고서 또 다른 사용인이 건네준 물과 함께 약을 삼켜 넘기자, 곧 알싸한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올랐다.
여기는 왜 다 호박 맛 약밖에 없는 걸까. 난 딸기 맛이 좋은데. 게다가 알약 제작 기술도 없어.
“표정하고는.”
지크프리트 씨는 내가 약을 모조리 삼킨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 번 기지개를 켜더니.
“늦기 전에 자라. 키 안 큰다.”
이 말을 남기고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
나를 놀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정말로 그랬으면 싶어서 그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없네,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