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말을 마친 그가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나는 하늘을 담아낸 듯한 옅은 파란색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내가 신경 쓸까 봐 괜히 더 능청스러운 척을 하는 거겠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딱히 내쫓을 생각은 없었는데. 굴러들어 온 복을 걷어찰 정도로 바보도 아니고.
“좋아요, 그럼 앞으로 한동안 잘 부탁드려요. 참고로 대공자님께 무슨 이야기를 들었든 그 이상을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나야말로 네가 아무리 저리 가 달라고 부탁해도 절대 안 떨어지고 붙어 있을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걸.”
당연히 호위 업무도 포함이긴 하지만, 저 발언에 어째 유스틴의 사심이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그러면 일단 봉급 협상부터 해야겠네요. 나중에 아버지랑 제대로 협상하셔야겠지만, 저도 어느 정도 권한은 있으니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정직원으로 채용되셨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연봉 협상 및 근무 일정에 관해 이야기 나눠 봅시다.
이윽고 테이블 앞 소파를 가리키며 사무적으로 말을 건넨 순간이었다.
“딱히 돈 받고 할 생각 없는데?”
지크프리트 씨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나는 순간 고개를 주억거리려다 말고 그가 내뱉은 말을 다섯 번 곱씹었다.
돈을 안 받겠다고? 에이,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세상에 누가 무급으로 노동하겠다고 자처해.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표정 한번 볼만하네.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정말 돈 안 받을 거야.”
미친 사람이잖아!
“왜, 왜요?”
나는 충격에 빠져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내가 내세운 조건에 돈 욕심 없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 그러니 당연히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이런 생각하는 게 실례인 건 알지만, 혹시 호구……신가?
아니면 극단적인 무소유를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
“그러면 안 돼요, 러셀 경. 엄연히 일하시는 건데 무급이라뇨.”
어쨌든 저는 악덕 사장 되기 싫습니다.
꽤 단호하게 답하자, 지크프리트 씨가 더더욱 단호한 얼굴로 반박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뭐. 돈 안 받는다고 설렁설렁 일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숙식도 여기서 해결하고, 옷이나 무기 지원도 해 줄 거 아니야? 그거면 충분한데. 이제는 딱히 돈 쓸 일도 없고.”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난 받을 생각 없다.”
급기야 지크프리트 씨는 완고하게 표정까지 굳히며 못을 박았다. 절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완강하게 나오니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장단 맞춰 주는 척하고, 나중에 유언장에 지크프리트 씨에게 밀린 봉급 지급해 달라고 적어 놔야겠다.
설마 유언을 거절하진 않겠지.
* * *
아버지를 ‘형님’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던 짬을 증명하듯, 지크프리트 씨는 귀가한 부모님과 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제 오랜 친구를 위해 쁘띠 연회까지 열 기세였다.
다행히 지크프리트 씨가 사정을 잘 설명해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내 능력까지 들킬 뻔했어.’
아버지가 오기 전에 내 능력에 대해서는 두 분께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해 놔서 다행이지.
이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함께하게 됐는지 설명하기가 애매해져 잠깐 애를 먹었더란다.
대충 잘 넘기기는 했지만, 아마 이쯤 되면 부모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눈치채셨겠지.
[슬슬 밝혀야 하나.]
이제는 ‘돈 냄새를 맡는 능력’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도 벅찬 일들이 많이 생길 예정이라.
어쨌든, 나는 세 사람이 그간의 회포를 푸는 사이 슬쩍 빠져나와 일찍 잠들었다.
그 결과 지금은 루스의 꿈 앞에 서 있는 상태였다.
오늘은 루스의 현장……, 아니, 현실 기반 꿈 현장 체험 학습 날이니까.
이름하여 진짜처럼 생생한 가상현실, 버츄얼 리얼리티 되시겠다.
[안녕, 루스!]
곧이어 그의 꿈으로 들어가 인사를 건네자, 루스가 고개를 번쩍 들고서 그대로 나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품에 와락 안긴 소년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으며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잘 있었어? 뭐 하고 있었어?]
[미에나가 읽으라고 했던 사전 읽고 있었어요. 그제 두 번, 어제 두 번, 그리고 오늘 한 번 읽었어요.]
[그럼 합쳐서 몇 번?]
[다섯 번이요!]
[그렇지!]
내 새끼 덧셈도 잘한다. 최고다.
심지어 그 두꺼운 사전을 5회독이나 하다니. 오늘은 정말로 글자 대신 자연을 느끼게 해 줘야겠는걸.
[좋아, 루스. 그럼 오늘은 사전 읽기 말고 다른 거 하자.]
이윽고 내게 매미처럼 달라붙은 몸을 떼어 놓으며 말하자, 루스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거요? 어떤 거요?]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랑 놀러 가자.]
[오늘은 놀러 가는 거예요? 공부 안 하고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스가 푸른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다시 물었다.
루스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붕붕 흔들리다 못해 헬리콥터 날개처럼 되지 않았을까.
네가 하늘 높이 올라가더라도 내가 꼭 잡아 줄게…….
[공부 안 하는 게 그렇게 좋아?]
[앗, 그, 공부도 재밌고 좋아요. 사실 뭐든 좋아요! 정말 진짜인데…….]
[알아, 알아. 그냥 놀리려던 것뿐이니까 그렇게 눈치 보지 마.]
자꾸 그럼 더 놀리고 싶어지잖아.
일부러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루스가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말고 나를 따라 눈꼬리를 휘었다.
나와는 달리 너무나도 순수한 웃음이었다.
이러니 내가 몹쓸 짓을 하는 것 같군. 나는 표정을 정돈하고서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배경을 바로 바꾸지 않고, 대신에 문을 열고 나갈 거야.]
[문이요?]
[그래, 저기 문 보이지?]
네가 나한테 달려올 때 몰래 만들어 놨단다.
내 말에 루스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서 그는 특유의 맑고 커다란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다가.
[제, 제가 열어도 될까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더 짜증 나네.
나는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루스에게 ‘문’이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감히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열 수 없는, 열어서는 안 되는.
어린아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호기심조차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공간.
[가서 열어 봐.]
나는 루스의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바로 그 도식을 깨부수고 싶었다.
문밖에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는지 알게 되었으면.
그리하여 언젠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때가 되었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씩씩하게 나아갔으면.
내가 없어도, 혼자서도.
[이렇게 잡아서 돌리면 돼.]
뒤이어 문 앞에 다다른 후 나는 문고리를 살짝 쥐어 문을 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루스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내가 문고리를 놓고 한참이 지나서야 머뭇머뭇 고사리손을 문고리 위에 얹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루스가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저 문을 열기 위한 작은 힘에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잠깐의, 동시에 루스에게는 영겁 같았을 시간이 지난 후.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루스가 문을 열어젖혔다.
[와아……!]
동시에 작은 아이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압도당한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탄성을 내뱉었다.
잘 관리된 잔디와 양쪽으로 쭉 뻗은 조경 나무들 뒤에 자리한 커다란 호수. 그리고 이를 둘러싼 자연까지.
[예쁘지?]
이번 현장 체험 학습 장소는 다름 아닌 유스틴의 별장이었다.
원래 현장 체험 학습의 고전 코스는 놀이공원이나 유원지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게 없어서.
그렇다고 파란 별 지구의 환경을 냅다 빌려 와 보여 주기에는 이곳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나는 지구에서도 멀리 놀러 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일단 내가 가 본 곳 중 가장 예뻤던 장소를 구현해 봤는데.
[이런 건 처음 봐요!]
루스가 연신 고개를 홰홰 돌려 주변을 살피며 신난 듯이 외쳤다.
괜히 흐뭇해지는 마음에, 나는 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쓱 훑었다.
이런 반응을 보면 루스를 위해서라도 죽기 전에 이곳저곳 여행을 좀 다니는 게 좋을까 싶기도 하고.
‘비행기나 자동차까지는 무리더라도, 증기 기관차라도 있으면 편하긴 할 텐데.’
마차로만 왔다 갔다 하기에는 너무 오래 걸린단 말이야. 몸에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고.
‘만약 여행 갈 때 가더라도 루스한테 미리 말해 주고 떠나야지.’
안 그래도 매일 오지 못해서 미안한데.
아마 조만간 다시 하임 산맥으로 떠나게 될 테니, 헤어지기 전에 얘기해 주는 게 좋겠다.
[저기에 엄청 커다란 욕조가 있어요!]
그사이 루스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소리쳤다. 나는 여념을 모두 지워 내고서 대답했다.
[저건 호수라는 거야. 가까이 가서 볼래?]
[응, 좋아요!]
좋아, 내 새끼 이제 반존대도 꽤 익숙하게 쓰는군.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서 호숫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루스는 간간이 발을 멈춰 제게 다가온 나비를 향해 손을 뻗기도,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보기에 퍽 좋은 광경이었다.
자연은 사전만으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이렇게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듣게 해 줘야지.
다음엔 바다로 데려가 볼까…….
[두 분 어서 오십시오.]
그렇게 호숫가에 다 와 갈 때쯤, 별안간 중후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