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시간이 다 됐군요.”
그보다 한발 앞서, 유스틴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내내 햇빛을 가려 주던 손을 홱 내렸다.
그러고서 그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큰 목소리로 미에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세요, 미에나. 약속한 시각이 지났습니다.”
그 절도 있고도 단호한 행동들에, 지크프리트는 하던 생각을 말끔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군.
* * *
“일어나세요, 미에나.”
이제는 퍽 익숙해진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나는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가, 속눈썹을 몇 번 팔랑이며 초점을 되찾았다.
다행히 완벽한 타이밍에 깨어났군.
나눌 이야기는 모두 나눴어.
“고마워요, 대공자님.”
굿 보이, 유스틴.
나의 멋진 동업자를 향해 마음속으로 따봉을 날려 보낸 후,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 씨를 바라보았다.
음, 아무래도 이렇게 부르는 게 좋겠지.
“페터.”
동시에 지크프리트 씨가 어깨를 움찔 떨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 가려서 눈은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시선 끌기는 성공한 것 같지.
자기가 말한 적 없는 이름을 대뜸 불렀으니, 당연한 반응이지만.
나는 한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이거부터 말씀드릴게요. 앞으로 말하는 건 전적으로 빅토리아 씨의 의견이에요.”
“…….”
“나 따라 죽으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이 말과 함께, 거실에는 다시 한번 깊은 정적이 끼얹어졌다. 나는 창밖의 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그의 반응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 하하, 하……!”
내내 벙한 얼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잘게 떨리는 거구를 바라보며 두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니케가 맞구나. 정말 니케야.”
그러고서 그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그래, 니케가…….”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잠시 드러난 그의 붉은 눈시울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눈을 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땐 기사 제복을 입고 있었으면 좋겠대요. 머리도 좀 정돈하고. 참고로 근위대 제복 안 버리고 숨겨 놓은 거 알고 있대요.”
“…….”
“여행 다니는 걸 좋아했으니 그간 못한 여행도 좀 가고. 황실 근위대에 복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어차피 폐하는 그런 걸로 인재를 놓칠 분이 아니시라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마음이니, 어디까지나 권유로 알아들으라고 하셨어요.”
“……그래.”
“자기를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이왕이면 그때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신다고도요.”
그녀가 내게 부탁한 유언을 하나씩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지크프리트 씨의 커다란 어깨가 조금씩 우그러졌다.
나는 잠깐 목구멍으로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가, 조금 진정한 후 계속해서 유언을 읊었다.
빅토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노래하듯 낭랑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그녀의 감정을 그에게 오롯이 전해 주기 위해.
지금만큼은 미에나가 아닌 빅토리아가 되어.
“당신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내게는 꿈이고 행복이었고, 사랑이자 삶이었어.”
“…….”
“내게 행복을, 사랑을, 삶을 알게 해 줘서 고마워.”
마지막 진심이 닿음과 동시에, 결국 지크프리트 씨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꿈속의 빅토리아처럼 처절하고 애달프게, 세상의 모든 고통을 홀로 마주한 사람처럼.
그조차도 제 사랑해 마지않는 부인에게 들릴까, 그래서 혹여 그녀의 단잠을 방해할까 꾹꾹 눌러 담은 소리 없는 격통 속.
창밖의 산새 소리만이 불협화음처럼 아름답게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이 되기 전, 우리는 마지막으로 빅토리아와 지크프리트 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지크프리트 씨는 배웅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내게 연신 사과를 건넸는데,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540도 정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코를 훌쩍이며 인사하던 모습이란…….
“정말 이대로 가도 되겠습니까?”
차창 근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유스틴이 넌지시 물어 왔다. 나는 도르르 눈동자를 굴려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올 때는 계속 서류만 보더니, 지금은 어째 계속 나만 관찰하는 것 같은데.
아직 봐야 할 서류 남아 있지 않나?
“여기서 더 머물면 민폐죠.”
나는 그의 옆에 가지런히 쌓인 서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그를 포섭하려던 계획은 빅토리아의 상태를 파악하는 즉시 깔끔하게 접었으니,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를 굳이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나저나 앞으로 어쩌지.’
어쨌거나 이곳에 왔던 이유는 나랑 같이 드래곤 레어에 들어갈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는데.
유스틴도 지크프리트 씨 외에 다른 사람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고.
나는 유스틴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그래도 조금 걱정이기는 하네요. 해외로 보낼 인력까지 꾸려 놨다고 하셨는데, 정작 투자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투자금을 구할 방법을 잃었으니…….”
크게 사업을 벌여 보자고 한 건 나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아버지께 부탁을 한번 해 볼게요. 아버지 체력이 괜찮을까 싶지만…….”
아니면 어르신한테 딜을 한 번 더 걸어?
솔직히 이렇게 어려운 의뢰를 할 거면 콩고물 몇 개는 더 던져 줘야지.
아버지께 사실을 밝히고 장년 혹사를 자행해야 할지, 아니면 나의 능력과 화술을 믿고 어르신 앞에서 뻗대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유스틴이 순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아닐 것 같은데?
아주 많이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설마 사업을 포기하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그는 당신을 찾아올 테니까요.”
내가 무어라 덧붙이기 전에, 유스틴이 먼저 부연했다. 나는 이전보다 더 크게 눈을 뜨고 그를 응시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글쎄요. 부인이 남긴 유언도 있으니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자유롭게 살라고 했잖아요.”
황실 근위대에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긴 했지만, 찔리는 게 있는 이상 굳이 돌아가서 들쑤시려 하지는 않겠지.
황실 근위대 제복을 입고 있던 젊은 지크프리트 씨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이, 유스틴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더더욱 당신에게 찾아오겠죠.”
“그러니까 더더욱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정말 모르겠습니까? 이걸?”
그러고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레 내게 묻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 쉬운 걸 이해하지 못했냐는 교수님의 눈빛을 띤 채로.
나는 괜히 말하는 감자라는 사실을 들켜 버린 학부생의 기분이 되어 입술을 뻐끔거렸다.
몰라서 죄송합니다……?
“적어도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겠군요. 이 모습을 러셀 경이 봤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 뒤로도 유스틴은 몇 번이나 뜻 모를 소리를 지껄이다가, 뭔가를 분석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환경이 큰 영향을 끼친 거겠죠.”
결국에는 또다시 뜻 모를 말을 꺼냈다. 나는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유스틴은 왜 항상 과정은 속으로만 떠올리면서 결론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까.
“정 믿기지 않는다면, 내기를 하나 하죠. 저는 한 달 내로 러셀 경이 시두스 저택을 찾아온다는 데에 걸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제가 이번에도 제대로 해냈다고 생각할게요.”
너는 어차피 패배할 내기는 안 하는 성격이잖아.
저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걸 보면, 아마 유스틴의 말이 맞겠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고 있으려니, 유스틴이 한층 누그러진 기색으로 다시금 내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이번에도 잘 해냈습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 자식…….
“하마터면 대공자님께서 저까지 죽일 뻔했지만! 그래도 잘 헤쳐 나갔죠. 생각해 보니 정말로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지금쯤 저희는 이곳이 아닌 저 깊은 산속에 소리 소문 없이 묻혀 있을 뻔…….”
“기껏 신경 써서 따라와 줬더니?”
“그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공자님께서 쓸데없이 도발하는 바람에 목숨이 위험해졌던 것도 사실이잖아요.”
설마 진짜로 열 명 남짓한 호위만으로 지크프리트 씨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유스틴은 특히 셈에 능하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괜히 지크프리트의 경계심을 돋웠으니,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아, 그거.”
곧이어 유스틴이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상황을 한 번 꼰 것은 맞지만, 적어도 당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쥐여 주지 않았습니까.”
“그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