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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39)화 (39/154)

제39화

[갑작스레 상태가 좋아지지 않은 까닭에 유언도 못 남기고 떠날까 봐 불안했는데. 고마워요, 미에나.]

이윽고 전해야 하는 건 모두 털어 냈다고 생각했는지, 빅토리아 씨가 후련한 기색으로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것뿐인데요. 저한텐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미에나 양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도, 저나 페터에게는 커다란 행운인걸요. 큰 은혜를 입었어요. 분명 페터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이내 그녀가 주먹을 뒤집어 펴고서 그대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서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내 손등을 쓸어 내리다가.

[할 수만 있다면 직접 전해 주고 싶은데. 눈이라도 제대로 뜬다면 다행이겠죠.]

[…….]

[죽는 건 이제 무섭지 않지만.]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혼잣말처럼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오래 함께하기를 바랐어요.]

나도 그러기를 바랐어요.

[받은 사랑을 전부 보답하고 떠나고 싶었고.]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하필 지금이어야만 했을까요.]

왜 하필, 나여야만 했을까요.

[나는 그저, 그저…….]

이어지지 못한 말 대신 설운 눈물이 두서없이 떨어져 내렸다.

[더 살고 싶었어요.]

나도, 더 살았으면 좋겠어요.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방금 했던 말은 전해 주지 말아요.]

빅토리아가 그저 미소 지으며 내게 부탁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따라 환히 웃어 보였다.

[당연하죠, 부인.]

마지막 대화는 영영 두 사람만의 이야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서.

떠날 우리를 위해서.

처음부터 그런 비밀이었다.

* * *

한편, 미에나가 잠든 사이.

“……거, 도련님.”

그녀가 누운 소파 앞에 몸을 구겨 앉은 지크프리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동시에 유스틴 특유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지크프리트에게로 향했다.

유스틴은 불만에 찬 기색으로 지크프리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목소리를 내지 않고 또박또박 입술을 움직였다.

지크프리트는 유스틴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용히 하십시오’라니.

“안 깨잖아. 잘만 자는데, 뭘.”

“…….”

“진짜야. 이 정도로는 안 깰걸. 내 말소리보다 저 새 소리가 더 시끄러운데도 잘만 자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입만 뻐끔대고 있을 거야?

지크프리트의 말에, 유스틴이 잠깐 고개를 돌려 창밖에 앉아 있는 산새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왜 부르는 겁니까.”

결국 유스틴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그조차도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넘어갈 만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그 팔, 슬슬 힘들지 않나? 계속 같은 자세인데.”

“이 정도로 고통을 느낄 만큼 수련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수련의 문제……가 맞기는 하지. 그건 맞는데.”

그래도 저건 너무하지 않나.

지크프리트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유스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어린 도련님은 벌써 몇 분째, 제 팔을 들어 여자아이의 얼굴에 드리우는 햇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근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마음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약혼자?”

곧이어 지크프리트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동시에 내내 미동도 하지 않던 유스틴의 몸이 한순간 움찔거렸다.

이윽고 유스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세를 완벽히 고치고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친구입니다.”

“에버딘 가문에서……, 친구를?”

“……또한 제 동업자입니다. 이번 방문 역시 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동행한 거고요.”

“아, 역시 그럼 그렇지.”

지크프리트는 곧바로 수긍했다.

생각해 보면 후자도 정상적인 내용은 아니었으나.

에버딘 가문의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것과 비교하면, 차라리 어린애랑 사업을 벌이는 게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역시 너무 지극정성이기는 하단 말이지.’

생각해 보니 친구나 동업자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계속해서 유스틴을 관찰하듯 살피던 지크프리트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켜보니까 오히려 도련님 쪽이 이 꼬마 아가씨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모양새던데.”

“…….”

“에버딘 가문의 대공자가 이렇게 쩔쩔매는 모습이 조금 신기하네.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는 쪽에 더 가깝지만.”

최소한의 여과도 없이 내뱉어진 말에, 유스틴의 미간에 미미한 주름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길게 숨을 내쉬는 것 외에 별다른 불쾌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실제로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그녀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니까요. 동시에 이런 식의 보조가 없으면 금방 쓰러질 정도로 몸이 상당히 약하기도 하고요.”

“그래 보이기는 하더라. 쓰러졌을 땐 진짜 깜짝 놀랐어.”

지크프리트가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순순히 시인했다.

난데없이 저를 찾아온 주제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쓰러져 버리니.

원래도 어린애가 제 앞에서 울거나 겁먹는 모습을 보면 괜히 안절부절못해 빅토리아에게 놀림 받고는 하던 성정이다.

그런데 급기야 제 다리만 한 꼬마애가 쓰러지니, 지크프리트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어째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니, 단순히 그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때만큼은 빅토리아가 겹쳐 보였지.”

이내 지크프리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스스로 입 밖에 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속삭임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빅토리아가 제 앞에서 의식을 잃던 모습과 겹쳐 보여서.

그 무력함을 다시 한번 겪는 것만 같아, 한순간 세상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 본인도…….”

지크프리트의 말에, 유스틴 역시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서 그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은빛 눈동자를 미에나에게 고정하고서 다시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나친 참견이라고 생각합니까?”

지크프리트 역시 제 앞에 있는 어린 소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툭 건들면 부러질 듯 가느다란 몸과 창백한 피부.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살아 있음을 간신히 증명받는, 빅토리아를 닮은 아이.

유스틴은 미에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유스틴은 미에나 시두스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비밀이나 상태를 낱낱이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특정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연상할지 알아채는 정도로는 알고 있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침대 위에 있던 사람을 마주한 순간부터 떨리던 작은 손을, 애써 마음을 다잡는 것 같으면서도 형편없이 흔들리던, 동시에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떤 기억을 헤집는 것처럼 아득하게 깊어지던 동공을.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말았는데.

“괴로웠을 거예요.”

“…….”

“당신의 말이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든, 기만처럼 느껴졌을 테고요.”

유스틴이 언뜻 담담한 듯싶으면서도 사뭇 날카롭게 말을 건넸다.

지크프리트는 유스틴의 말을 곱씹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머릿속에는 미에나가 건넸던 말이 자연히 떠오르고 있었다.

‘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정말 잠깐이면 되거든요. 1년, 아니, 어쩌면 1년도 안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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