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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38)화 (38/154)

제38화

[……그 사람, 미에나 양에게 자기를 러셀이라고 소개했나요?]

빅토리아 씨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동상처럼 멈춰 있는 지크프리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나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서 빅토리아 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뇨, 저희가 먼저 일방적으로 러셀 경을 찾아온 거예요.]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을 가만두려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죠. 음, 그러니까 한 시간 전에 말이에요.]

참고로 빈말 아니고 진짜예요.

짐짓 인상까지 찌푸리며 말하자, 빅토리아 씨가 부스스 미소 지었다.

정적이 감돌던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혼란스러운 기색은 이전보다 줄어들어 있었다.

나를 경계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하긴, 내 본모습을 경계하기는 쉽지 않지. 그 지크프리트도 나한테만큼은 처음부터 제법 물렁물렁하게 대하지 않았는가.

어쨌든 죽을 뻔했다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이는 원래 어린아이는 건들지 않지만……. ‘러셀’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으니, 자기를 잡으러 왔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아마 맞을 거예요. 황제께서 다시 죄를 물으러 온 거냐고 물었거든요. 하필이면 제 동행자가 에버딘 가문 사람이기도 했고요.]

[에버딘 가문 사람이라니……. 정말로 죽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녀가 퍽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냐, 유스틴. 너 정말로 죽을 뻔했다. 심지어 나도 죽일 뻔했다.

내 천사 같은 외모와 러셀 경이 경계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허약한 체력에 감사하도록.

[항상 불안해했거든요. 혹시 폐하께서 약속을 어기면 어쩌나, 그래서 다시 죄를 물으려 하시면 어쩌나 하고.]

[그래서 가명을 사용한 건가요? 러셀 경은 부인을 계속 니케라고 부르시더라고요.]

[그런 이유도 있기는 하죠. 그이의 새 이름은 페터예요. 잘 어울리죠?]

빅토리아 씨가 제 연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나 또한 고개를 들어 꿈속의 지크프리트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은 자기를 정의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항상 제 이름을 먼저 밝힌다. 결국 이름은 그 사람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런 만큼 꿈속 명패에 드러나는 이름을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좋은 이름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제 연인을 위해, 함께할 앞날을 위해 기꺼이 과거를 버렸다.

자신을 구성하던 것들을,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렇기에 그들은 비로소 ‘니케’와 ‘페터’가 될 수 있었다.

그거야말로 자신을 온전히 정의하고 드러내는 완벽한 이름일 테니까.

[페터를 말리려고 한다고 했죠.]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정지한 모든 걸 눈으로 담고 있던 찰나.

한참을 제 연인만 바라보던 빅토리아 씨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녀의 금빛 눈동자는 내게로 향해 있었다.

[왜 그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주는지 알려 줄 수 있나요?]

[네?]

갑자기 그걸 물으신다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빅토리아 씨가 덩달아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설설 내저었다.

[시비를 걸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해서, 정말 아무 뜻 없이…….]

[이해했어요, 부인. 애초에 오해한 적도 없고요. 그렇게 당황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 말에 빅토리아 씨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나도 몰래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빅토리아 씨는 누구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사실 조금 의아했거든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페터와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늘 처음 만났기는 하죠.]

[그런데도 왜 굳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구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요.]

적어도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게 설령 어리석은 짓이라도, 나만큼은 그럴 수 없어서.

죽음이라는 게 그래서.

나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미동 없는 꽃무릇을 흘끔거렸다가, 결국에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딱히 남편분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럼?]

[부인을 위해서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이입한 건 지크프리트 씨가 아닌 바로 부인이라서 말이에요.

내 말에 빅토리아 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금빛 눈동자 안에 담긴 내 모습을 관찰하다가,

[그러는 부인께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나요?]

이번에는 내 쪽에서 질문했다.

[웬 이상한 꼬마가 난데없이 부인 꿈에 나타난 거잖아요. 게다가 부인을 위해 남편분을 말리겠다고 나서기까지 하고.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저를 무의식이 만들어 낸 환상 정도로 생각하는데…….]

유스틴도 처음에는 날 스트레스가 만들어 낸 환상 정도로 생각했지. 물론 얼마 안 가 의심을 시작했지만.

[부인께서는 절 단순한 꿈속 환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서요.]

빅토리아는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잠깐 당황했을 뿐, 오히려 금방 평정을 되찾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내 말에 그녀는 고양이 같은 눈을 잠깐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나는 상상력이 별로거든요.]

[네?]

[정말로 별로예요. 현실에서 직접 마주한 게 아니면 이렇게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요.]

요컨대 제 상상력으로는 빚을 수 없는 디테일과 생동감 때문이라는 거군.

[또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 사람은 믿을 수 있겠구나, 이 사람은 믿어서는 안 되겠다. 꿈에서는 보통 이런 직감을 받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보통 사람은 아예 꿈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거든요. 부인, 정말 대단하시네요.]

[같은 장면만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서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위화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아하…….]

그런 거였구나.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빅토리아 씨는 계속해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요목조목 뜯어보는 것 같기도 한 시선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페터, 아니, 지크프리트는 타고난 성정이 지나치게 맹목적인 사람이에요. 주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번 마음먹은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하죠. 평소에는 누구보다 가볍게 행동하면서 말이에요.]

그녀가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도 모르고.]

언뜻 흉을 보는 것 같은 어투였으나, 내뱉어지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깊은 애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꽃무릇 언덕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평야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내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하시는 분들.

[물론 그런 바보 같은 면마저 좋아하지만.]

[…….]

[그래서 나는 이 시간, 이 공간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후회해요.]

이 약속이 그를 옭아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진짜로 그를 구속하고 말았으니까.]

빅토리아 씨가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며 나긋나긋 말을 건넸다.

여전히 꽤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녀의 주먹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주먹 위로 손을 덮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꼭 전해 드릴게요.]

[그렇게만 이야기하면 아마 안 들으려 할 거예요.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릴 거라고 덧붙여 주세요, 꼭.]

[어, 네…….]

따라 죽으려고 하면 죽여 버린다니. 그럼 어쨌든 죽는 건 똑같지 않나.

어쨌든 전해 달라는 대로 전해 주기는 할 테지만.

떨떠름한 얼굴로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려니, 빅토리아 씨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꾀죄죄하게 있지 좀 말라고도 전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봤을 땐 무슨 산적 같은 모양새던데.]

[지금도 산적 같으세요.]

[그럴 줄 알았어. 밭 갈 시간에 머리 정돈부터 좀 하지.]

[안 그래도 쇠스랑 들고 계시더라고요. 그런데도 검 든 호위보다 더 무섭던데요…….]

[그 사람은 손에 든 건 모두 흉기로 쓸 수 있으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꽃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예요.]

뭐야, 그게. 무서워.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빅토리아 씨가 또 한 번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종소리처럼 낭랑해 듣기에 퍽 좋으면서도, 어쩐지 처량한 웃음이었다.

[괜히 산속에 처박혀서 지내지 말고, 이왕 자유로워진 마당에 여행도 좀 다니라고도 해 주고.]

[네.]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상당한 사람이었어요. 어차피 내가 떠나고 나면 폐하께서도 굳이 죄를 묻지는 않으실 테니, 황궁 근위대에 다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전해 드릴게요.]

[묘지는 이 근처로 해 주길 원해요. 이곳에 있었을 때 가장 행복했거든요.]

이후로도 빅토리아 씨는 노래하듯 나긋한 목소리로 하나씩 제 남편에게 전하고픈 유언을 내게 남겨 주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마음속에 하나둘 얹어 나갔다.

깨고 나서도 절대 잊지 않도록.

그녀의 유언을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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