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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37)화 (37/154)

제37화

“미에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스틴이 나무라듯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가진 능력을 스스럼없이 밝혔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스틴을 바라보지 않고서 천천히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선 밝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우리는 드래곤의 둥지에 드나들게 되어도 다른 이에게 입도 벙긋 안 할 이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니던가.

하지만 설령 그가 내 비밀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상관없어.’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다.

어차피 내가 능력을 숨기려 했던 것도 딱히 거창한 이유 없이, 그저 능력을 밝힌 이후 닥쳐올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에버딘이라는 유능한 뒷배가 등을 지키고 있는데 누가 감히 나를 귀찮게 할 수 있겠어. 황제라면 모를까.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농담 따먹기에 장단 맞출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결심이 무색하게, 지크프리트 씨는 내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했다.

하긴, 보통은 이런 반응이기는 하지. 나는 여전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단호히 응수했다.

“농담 아니에요, 러셀 경.”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노을 지는 배경에 꽃무릇 핀 언덕. 황실 근위대 제복에, 검은 리본으로 묶은 머리.”

뒤이어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내가 봤던 것들을 차근차근 읊어 나갔다.

“빅토리아 씨는 초록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요.”

“그런 건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함께 도망치자고 하는 말을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하지는 않겠죠. 특히나 러셀 경처럼 오감이 발달한 검사라면 더더욱이요.”

“너…….”

“도망치자, 우리.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않고, 누구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는 곳으로.”

두 연인이 나누는 밀담을 이렇게나 정확하게 듣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을 건네려니, 지크프리트 씨가 돌연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때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살해 협박까지 당한 마당이니만큼 사실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다음 말도 들었냐?”

이윽고 그가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그의 주먹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걸 듣지 않았다면 러셀 경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몰랐겠죠.”

그게 설령 지옥이라도 끝까지 함께 도망치자고 약속했으니.

이윽고 부엌에 한차례 정적이 찾아왔다.

지크프리트 씨는 무언가를 골몰하는 듯해 보였다. 유스틴이야 원래도 계속 말을 아끼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르 미동하는 그의 커다란 주먹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슬아슬한 침묵을 깬 건 어쩌면 당연하게도 지크프리트 씨였다.

그는 내내 쥐고 있던 주먹에서 슬며시 힘을 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진짜라 치자고.”

진짜라고 치는 게 아니라 정말 사실이라니까.

“그렇다면 니케……, 아니, 빅토리아도 계속해서 나와 했던 약속을 곱씹는 것 같은데.”

“…….”

“그건 곧 빅토리아도 내가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뜻 아닌가?”

그래,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지.

나는 다시 시선을 올려 지크프리트 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지만, 러셀 경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그러시다면……?”

“이제부터 정확히 알아봐야죠. 다시 빅토리아 씨 꿈에 들어가 볼게요.”

능력이 있는데 써먹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

말을 마친 즉시, 나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뛰어내려 소파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런 건 괜히 지체해 봤자 서로 후회만 남을 뿐이다.

게다가 빅토리아에게는 정말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도 하고.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고 했지.’

빅토리아는 왜 그렇게 오래 버티고 버틴 걸까.

왜 그녀는 많고 많은 추억 중에서 하필 그게 설령 지옥이더라도 함께 도망가자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사실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러셀 경을 설득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여기까지 갑자기 들이닥친 속죄 내지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제 능력은 비밀로 해 주시고요.”

“미에나?”

“그러니까 괜히 부인 깨우지 마시고, 대공자님도 30분 동안은 저 깨우지 마시고. 잠들기 직전까지는 소음에 예민하니까 모두 조용히 해 주시고요.”

“아니, 잠깐만, 얘야.”

“혹시나 제가 거짓으로 꾸며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는 누군가의 유언을 거짓으로 꾸며 내는 짓은 안 해요.”

만에 하나 빅토리아가 정말로 지크프리트 씨와 함께 죽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래도 그녀의 이야기를 전달해 줄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차마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때는 다른 방식으로 지크프리트 씨를 말리려 하겠지만.

“아무튼, 30분 후에 깨워 주세요.”

나는 곧바로 소파 위에 몸을 뉘고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낮잠 자는 건 꽤 오랜만이지만, 원래 나는 길바닥에서도 머리만 뉘면 잘 자는 체질이니까.

얌전히 눈을 감고 4―7―8 수면 유도 호흡법을 하고 있으려니, 유스틴이 작게 웅얼거리듯 말을 걸었다.

“혹시 햇빛이 불편하지는…….”

“말 걸지 마!”

“미안합니다.”

곧이어 그가 냉큼 사과했다.

나는 잠깐 좁혔던 미간을 펴고서 다시 호흡을 정돈했다.

마음이 급해서 나도 모르게 반말부터 나갔는데, 친구니까 이 정도는 봐주겠지.

나는 서서히 가라앉는 의식에 몸을 맡기며 여념을 지워 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녕하세요, 빅토리아.]

온통 까맣게 물든 공간 속,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니케’의 꿈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번에도 나를 맞이한 것은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었다.

옅은 분홍으로 시작해 깊은 주홍빛으로 끝나는, 비현실적인 광경.

[도망치자, 우리.]

[……지크.]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않고, 누구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눈앞의 남자가 연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제안하면, 혼란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에는 감정에 패배한 그의 연인은 지옥을 입에 담으며 각오를 되묻고,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선언하듯 따라 한다.

[그게 설령 지옥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가 이전의 내가 봤던 부분.

나는 이번에는 모습을 가리지 않은 채, 발걸음 소리만 죽이며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정확히는 빅토리아의 표정이 잘 보이는 곳으로.

내가 만약 빅토리아라면, 계속해서 같은 꿈만 반복하는 이유는 아마.

[……안 돼.]

바로 그 순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이 졸려 간신히 숨만 쥐어짜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오래 소리 내어 운 탓에 메말라 버린 것 같기도 한. 그렇지만 결국에는 애달프고 처절한 목소리였다.

나는 빅토리아가 나를 완벽히 인지할 수 있도록, 그녀의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던 석산이나 노을에 젖어 유유히 흘러가던 구름은 어느덧 모두 정지해 있었다.

박제되어 버린 시간, 못 박힌 추억.

그 순간마저 제 연인을 사랑해 마지아니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지크프리트의 다정하고 열렬한 모습 앞에서.

[안 돼…….]

홀로 멈추지 못한 여자가 주저앉아 애원했다.

나는 잠시 자리에 멈춰 눈을 꼭 감았다.

역시 지크프리트 씨는 틀렸다.

세상의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따라 생을 포기하기를 바랄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비틀린 소유욕일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둘 수는 없어.

[안녕하세요, 부인.]

곧이어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일부러 바스락 소리를 내며 빅토리아 앞에 섰다.

동시에 빅토리아의 금빛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에 물든 채 내게 향했다.

[아이……?]

[미에나라고 불러 주세요.]

[이건……, 혹시 꿈인가?]

음,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셨군.

나는 눈썹 끝을 누그러뜨리며 슬쩍 입술을 말아 올렸다.

[갑자기 찾아뵈어 죄송하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급했던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어디 경치 좋은 곳에서 티타임이라도 가지면서 천천히 이야기 나눌 텐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시간이 없네.

그럴 마음도 아니실 것 같고…….

[이쪽?]

[러셀 경, 그러니까, 남편 되시는 분께서 누구도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려고 하셔서요.]

내 말에 빅토리아 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물들었다.

나는 그녀가 실의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덧붙였다.

[저는 그걸 막으려고 여기 온 거예요. 겸사겸사 부군께 남기고 싶은 말도 전달해 드리고요.]

말을 마친 나는 최대한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안면에 내비쳤다.

안녕하세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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