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아하…….”
하지만 영애들이 나를 제 티파티에 초대하려고 기를 쓰는 이야기가 딱히 쓸모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차마 말로 꺼내지는 못하고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서류를 읽어 내리며 이어 말했다.
“상태만 괜찮다면 티타임을 주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각 가문의 동향을 살피기에 꽤 괜찮거든요. 생각이 있다면 초대할 사람은 제가 추려 드리겠습니다.”
“아.”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결국엔 사업 이야기군. 나는 단박에 이해를 끝마치고서 그의 말을 답싹 물었다.
“사업에 도움만 된다면 못 할 건 없죠. 겸사겸사 가문 입지도 다시 쌓을 수 있겠네요.”
내가 직접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저택에서 티파티를 여는 거라면 뭐.
‘오히려 남는 장사지.’
빚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명예를 올릴 수 있다면야, 이 한 몸 바치는 게 무슨 대수라고.
“하지만 그전에 표정을 숨기는 방법을 하루빨리 익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원한다면 직접 강습해 드리죠.”
갑작스레 주어진 새로운 임무에 마음을 다잡는 사이, 유스틴이 나를 흘긋 바라보고서 툭 말을 내뱉었다.
또 표정 지적이네.
“매일 거울 보면서 연습하기는 하는데, 그 정도로 형편없나요?”
“예.”
아니,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나름 아버지한테는 잘 숨긴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대공자님께서 제 표정 변화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거 아닐까요? 그전까지는 딱히 표정 못 숨긴다고 지적받은 적 없는데.”
괜한 마음에 부러 툴툴대자, 서류를 넘기던 유스틴의 손동작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서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서 다시 서류 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미간에 피어오른 미미한 주름을 관찰하다가, 문득 시선을 돌려 그의 옆에 앉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뭐야, 저 표정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하더니, 지금은 무슨 연애 프로그램 열혈 패널 같은 눈빛으로…….
‘새로 들어온 신입인가.’
좀 전에도 유스틴의 말에 안절부절못했던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최근에 새로 들어와 아직 주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무미건조한 관계를 오해할 리 없으니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다시 마차 시트에 뺨을 기댔다.
할 일이 산더미네, 산더미야.
* * *
마차가 완전히 멈춘 건 크레이튼 지방에 도착하고서도 한참이 더 지난 후였다.
최소한의 포장도 안 된 산길 앞에서는 아무리 비싼 마차도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자취를 감췄다고 했으니 인가가 밀집된 지역에서 살지는 않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조금만 더 갔으면 진짜 토할 뻔…….”
세반고리관이 윈드밀 도는 것 같아. 어지러워 죽겠네.
나는 호위의 손에 거의 몸을 맡기다시피 하며 힘겹게 마차에서 내렸다.
그 와중에도 유스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오면서 읽은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중이었다.
“가는 길이 걱정되는군요. 최대한 천천히, 조심해서 마차를 몰라고 이르겠습니다.”
이내 그가 뒤따라 내리며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게 사람이냐, 로봇이지.
“아, 그리고 이거.”
뒤이어 그가 불쑥 손을 내밀고서 무언가를 건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가 내민 물건을 받아 들었다.
중앙에 마정석을 박고 주변을 정교하게 세공한, 고급 아티팩트였다.
“이게 뭔가요?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들고 있으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쥐고 있으세요.”
설마 이거 멀미 해소용 아티팩트인가? 그래서 유스틴은 오는 내내 멀미를 안 했던 거고?
멀미를 제거하는 마법을 담아 놓겠다고 그 비싼 마정석을 사용하다니.
일단 준다니 받아 놓긴 하겠다만.
“멀미는 제가 익숙해져야죠. 앞으로 몇 번 더 와야 할 텐데.”
“앞으로 몇 번 더요?”
내 말에 유스틴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유비도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세 번을 왔다 갔다 했는데, 당연히 그 정도쯤은 각오해야지.
나는 대답 대신 주위를 홰홰 둘러보았다.
난데없이 마차가 들이닥치면 놀랄 것 같아 좀 멀리 떨어져서 내리기는 했지만, 그걸 참작하고서라도 지크프리트의 거처는 꽤 작은 편이었다.
집이라기보다는 오두막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앞에 연못도 있고 꽃도 심겨 있으니, 꼭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식량 같은 것만 자급자족할 수 있다면, 확실히 자취를 감추고 유유자적하게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긴 한데.
“어째 위치 선정이 묘하게 익숙한 게…….”
요양하기 딱 좋은 곳인데?
“밤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겠군요.”
그사이 내 옆에 서 있던 유스틴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며 그를 따라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였다.
“뭘 서두른다는 거지?”
누군가의 날 선 목소리가 예고 없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와 씨, 깜짝아.’
어떻게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거지?
나는 곧바로 어깨를 움츠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관리를 전혀 안 하는 건지 이리저리 산발이 된 붉은 머리카락과 제대로 깎지 않아 얼룩덜룩하게 자국 난 턱수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써 본연의 하얀색은 찾아볼 수 없는 남루한 셔츠와 대충 묶은 각반까지.
설마 이 사람이…….
“처음 뵙겠습니다, 러셀 경. 저는 유스틴 에버딘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유스틴이 한 점 동요 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유스틴을 한 번, 저 멀리 서 있는 농부를 한 번 바라보며 입술을 오므렸다.
역시 이 사람이 지크프리트 러셀이란 말이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즐기고 계시나 본데.
“에버딘?”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어깨에 쇠스랑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에버딘이면 황가의 끄나풀 아닌가? 고매하신 귀족 나리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지?”
동시에 나는 곧바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정도는 이미 예측했으나, 중요한 건 ‘얼마나 반기지 않는가’였다.
‘이거 일 났는데.’
유스틴이 자기소개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경계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여기에서도 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잖아.
나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서 지크프리트 씨와 우리를 에워싼 기사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우리와 동행한 호위는 총 열 명. 언뜻 보기엔 적은 숫자 같지만, 한 명 한 명이 모두 상당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라는 이 남자 앞에서는…….
‘절대 못 이긴다.’
실력자 열 명이 고작 쇠스랑 하나 들고 있는 사람을 못 이기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내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저 남자는 위험하다. 섣불리 덤볐다가는 이곳이 내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난 그에게 덤비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지만.
그러니 우선 차근차근 대화부터…….
“아하, 변덕스러우신 우리 폐하께서 다시 내게 죄를 묻고 싶어지신 건가?”
하지만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쇠스랑을 느슨하게 쥐며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동시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 역시 흠칫 몸을 떨고서 모두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아니, 잠깐만.
우리 싸우러 온 거 아닌데요.
‘도와줘, 유스틴!’
상황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러니 어서 입을 열어 대공자의 위엄을, 능청스럽고 현란한 화술을…….
“경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듣자 하니 폐하께서 다시 변덕을 부리실 만큼 중죄를 지었나 보군요. 황가의 ‘끄나풀’인 저로서는 좌시할 수 없겠는데요.”
닥쳐, 인마!
나는 당장에라도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쟤는 나를 도와주러 온 거야, 방해하러 온 거야? 설마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거 아니야, 유스틴.
너는 이 흉흉한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거니?
“그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지. 어린애를 상대하는 건 달갑지 않지만…….”
곧이어 그가 쇠스랑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붉은 더벅머리 사이로 살짝 드러난 눈동자가 느릿하게 군중을 훑었다.
누구를 먼저 사냥할지 가늠하는 포식자처럼. 여유롭지만, 포악하게.
인성 좋다며. 내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는 사람은 저 사람밖에 없다며.
근데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는 거고, 너는 왜 나를 바라보면서 생글생글 웃기만…….
‘아.’
짧은 찰나, 불현듯 지난날 유스틴이 했던 발언이 떠올랐다.
‘어찌 됐든, 설득은 당신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