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괜찮아, 환상이야. 사람은 저렇게 쉽게 터지지 않아.]
복장 터지는 일은 일어나도 몸 전체는 터지는 일이 거의 없단다.
물론 마법을 쓰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음, 실제로는 정말 끔찍할 테니까 상상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상상을 저편으로 집어던지고서 방긋 웃어 보였다.
[저런 거 말고 루스, 지금은 예쁘고 멋진 것들만 보자.]
언제까지고 그에게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즐거움을 알게 된 아이에게 공포와 절망, 슬픔 같은 감정을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말을 하지만 않을 뿐, 꿈에서 깨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고.’
루스에게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다음 방문은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하면 잔뜩 실망한 표정을 하면서도, 끝끝내 기다릴 수 있으니 괜찮다고 미소 짓는다.
그게 얼마나 사람 가슴 아프게 하는지, 너는 모르겠지.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해야 해.]
괜히 찡해지는 마음에 루스의 목에 팔을 걸고 말하자, 그가 땡그랗게 뜨고 있던 눈을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하여간 대답은 잘해요.]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구.
결국에는 나 역시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를 쑤석거리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그보다 한발 앞서, 루스가 제 목에 어정쩡하게 걸린 내 팔을 두 손으로 붙잡고서 말했다.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띤 채.
[미에나가 있으니까요.]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 *
“이 정도쯤은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앞에 닥치면 각오고 뭐고 흐려지는 일이 종종 생기는 것 같아요.”
“꽤 갑작스러운 발언이네요. 갑자기 불안해지기라도 했습니까?”
내 말에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허물없어진 태도였다.
혹시 나랑 친구 하자고 한 이유가 날 좀 더 갈구기 위해서인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업 이야기 아니에요.”
“다행이군요. 이미 해외 시장 조사를 보낼 인원까지 꾸려 놨거든요.”
“대공 전하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했던 게 어제 일 아니었나요……?”
“어차피 허락해 주실 테니까요.”
아직 확답은 못 받았지만 일단 준비는 시작했다는 거구나. 역시 인간 불도저라니까.
이번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자, 유스틴이 눈을 휘며 덧붙였다.
“그만큼 당신의 제안이 매력적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세요.”
“……아니, 뭐, 크흠. 갑자기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허 참.”
그렇게 립서비스 해 줘도 이익 분배 비율은 양보 안 한다.
괜히 헛기침을 내뱉으며 씰룩이는 입술을 진정시키는 동안, 유스틴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입가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당신이 일전에 부탁했던 용병에 대해서도 조사를 좀 해 봤습니다.”
곧이어 유스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부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사이 대체 얼마나 많은 일을 한 거야? 얘 또 잠 안 잔 건 아니겠지?
“취침 시간은 맞췄으니 그렇게 보지 말고.”
“앗,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나요?”
“……어쨌든, 당신이 말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유스틴의 어조는 평소와는 달리 힘이 없었다.
찾기는 했습니다만, 이라니.
괜히 조급해지잖아.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주 사소한?”
사소한 문제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이 자식아.
당장 잡아먹을 듯이 대답을 독촉하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서 말했다.
“얼마 전부터 용병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너한텐 그게 사소한 문제냐.
“그 얼마 전이 얼마나 얼마 전인데요?”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유스틴이 장난기 담긴 어조로 말했다. 눈꼬리가 휜 각도를 보건대, 나를 놀려 먹는 게 그저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놈의 자식이, 친구 소중한 줄 모르고 사람을 놀려?
“그가 기사직을 내려놓고 용병 일을 시작한 건 10여 년 전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진심을 담아 노려보고 있노라니, 유스틴이 그제야 표정을 정돈하며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소와는 달리 높낮이가 뚜렷했다.
아직 나를 놀릴 거리가 남아 있다는 것처럼.
“몇 년 전부터는 그마저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역시 뒤에 뭔가 더 남아 있을 줄 알았지. 나는 옅게 미소 짓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자취를 감췄다고.
몇 년 전에 이미 자취를 감춘 사람이라는 말이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시원하게 차를 들이켠 뒤, 나는 방긋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영민하신 대공자님께선…….”
“…….”
“쓸모없는 정보는 처음부터 입에 담지도 않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말이에요.”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
‘네가 원하는 사람을 알아보긴 했는데, 정말로 알아보기만 했어.’ 뭐 이런 거야?
심지어 그게 사소한 문제?
서로 오프라인 친구 된 기념으로 나를 놀려 먹고 싶었던 건가?
그러다 친구 목록 다시 0으로 돌아가면 어쩌려고?
“당신의 능력이면 자취를 감춘 사람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것도 대략적인 범위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란 말이에요.”
내 능력도 탐지 가능 범위가 있단 말이야. 막말로 그 사람이 국외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다 내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지…….”
“저놈?”
지끈거리는 머리에 무심코 중얼거리니, 유스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아이고, 말실수했네.
“헤헤, 친구 사이에 이 정도 호칭은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있지요오?”
“그건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놈이라니, 저 말고 이런 이야기를 나눈 이가 또 있다는 말입니까?”
“아아, 그게 신경 쓰이셨구나…….”
보통은 하극상을 먼저 따지지 않나. 이걸 쿨하다고 봐야 해 말아야 해.
나는 유스틴의 사고 흐름을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적당히 말을 돌렸다.
“여러 꿈에 들락날락하다 보면 이런 부탁도 받고 저런 부탁도 받게 되니까요. 그보다, 그 사람 말고 다른 후보는 없는 건가요?”
네가 굳이 그 사람 얘기를 꺼낸 거 보면 다른 후보는 애초에 없는 것 같긴 하다만.
“당신이 말한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후보는 그자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애초에 후보를 한 명이라도 찾아낸 게 용한 수준이죠.”
“…….”
“마법도 아니고 검술로 와이번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라니. 거기다 소속도 없고, 인성도 바르고, 입이 무겁기까지. 그런 인재가 있다면 제가 영입하고 싶군요.”
역시나, 유스틴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비아냥댔다.
나는 반박하는 대신 느긋하게 차를 홀짝였다.
어차피 반박할 거리도 없을 정도로 무리한 요구였던 것도 맞고.
능력이 있으면 인성이 좋지 않거나, 둘 다 있으면 돈을 밝히거나. 극적인 확률로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면 이미 주인이 있다.
능력 있는 호구는 어딜 가든 환영받으니까.
‘하지만 역시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유스틴을 바라보며 슬쩍 운을 뗐다.
“그렇다면 그냥 조건에 맞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고만 말씀해 주셔도 됐을 텐데요.”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물론 아직 이야기가 남았기는 합니다.”
내 물음에 유스틴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서 답했다. 아까와는 달리 어쩐지 살짝 김이 샌 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날 놀려 먹고 싶었던 거구나.
“알다시피 제 성은 ‘에버딘’이 아닙니까.”
곧이어 유스틴이 여우처럼 눈꼬리를 살랑살랑 접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웃음이 좀 헤픈 것 같은데. 무슨 꿍꿍이를 숨긴 거냐.
나는 의심에 찬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렇죠.”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실 제국 내에서 에버딘이라는 성을 가진 자가 무언가를 얻거나 알고자 마음먹는다면, 기실 불가능할 일도 없습니다.”
“옙, 그렇습죠.”
무슨 자랑을 저렇게 돌려 한담.
내장 탑재된 사회성으로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었다.
나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자동 리액션 기능을 멈추고 유스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 설마.
“그 말은 혹시…….”
“그가 현재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지 알아 왔습니다.”
유스틴이 답지 않게 어깨까지 으쓱이며 으스댔다. 그 오만한 은빛 눈동자는 저를 칭찬하기를 바라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짜 재수 없게 느껴질 표정이었지만, 이건 인정해 줘야지.
이번엔 참 잘했어요, 유스틴 학생.
“아이참,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감사해요, 대공자님.”
“보아하니 용병을 구하는 이유도 이번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모으기 위함인 것 같던데,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성심껏 도와야지요.”
“역시 척 하면 척이라니까. 제가 대공자님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린 적 있나요?”
굳이 시간 들여 설명할 필요도 없는 최고의 파트너, 추천합니다.
나는 칭찬의 의미로 그에게 엄지를 척 세워 보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손뼉 쳐 줄 테니 신나게 춤춰 보라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유스틴은 작동을 멈춘 로봇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