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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29)화 (29/154)

제29화

“마음에 드는 답변이군요.”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유스틴이 일 얘기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아무래도 며칠 안 봤다고 표정을 읽는 스킬이 퇴화한 모양이야.’

좀 더 노력해서 표정 읽기 짱이 되어야지. 그러면 내 표정도 능숙하게 감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당신이 별장에 머무르며 보낸 편지에도 향후 계획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죠.”

유스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짐하는 사이, 그가 회색 눈동자를 사선으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곧바로 탄성을 내뱉었다.

“아, 거기에다가도 적어 놨었죠. 한시가 급한 일이다 보니.”

“한시가 급한 일이다?”

“성황이 황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충 얼개는 만들어 둬야 할 것 같았거든요.”

내 말에 유스틴이 다시 시선을 내게 고정하고서 눈을 빛냈다. 완연한 사업가의 눈빛이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겠군, 아주 좋아.

“얼개라면 어떤?”

“리넥스와 솜니움의 무역 협정을 필두로, 앞으로 해상이든 내륙이든 전 세계 무역이 이전보다 더 발전하게 될 테죠. 이전보다 더 많은 상인이 오갈 거예요. 특히 지금까지 타국과 수교를 맺지 않았던 리넥스는 더더욱요.”

리넥스가 과연 솜니움의 무역 협정으로 끝을 보려고 할까?

답은 ‘아니’였다.

신(a.k.a 나)에게 혼쭐이 난 이후 기세가 크게 꺾였다고는 하지만, 리넥스는 기본적으로 욕심이 넘치는 나라였다.

적어도 이번 대의 성황은 욕심이 많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국이라는 이유로 닫아 놨던 무역항을 열었을 리가 없지.

어쩌면 내부 재정과 각지에서 들어오는 헌금만으로 국고를 유지하기엔 한계에 다다랐던 걸 수도 있고.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

당장 중요한 건 리넥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리넥스의 상황이 향후 사업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곧이어 유스틴이 내 말을 곱씹다 말고 물었다. 진짜로 이해하지 못해 묻는다기보다는, 내가 직접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듯한 눈치였다.

저 즐거움에 가득 찬 눈빛 좀 봐.

대충 눈치챘으면서도 굳이 나한테 시키는 저 인성도 봐.

나는 눈동자를 한 바퀴 빙그르르 굴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먼저 설명한 다음에 본론을 꺼낼까, 아니면 일단 결론부터 얘기해 놓고 설득을 시작할까.

‘말해 뭐 해.’

애초에 유스틴의 방식 역시 일단 질러 놓고 후에 설명해 주는 건데.

나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서 생긋 미소 지으며 말을 꺼냈다.

“국외에 은행을 세워요, 우리.”

내 말에 유스틴이 은빛 눈동자를 내게 여전히 고정한 채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국외에 은행을 세운다, 라.”

무언가를 깊이 고민할 때면 으레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에버딘 가문은 이미 제국 내에 은행을 소유하고 있잖아요. 황실 거래도 에버딘 은행에서 담당하고 있을 테고요. 은행 관리도 대공자님이 일임받으신 거, 맞죠?”

외무대신도 아닌데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리넥스의 갑질 횡포에 머리를 싸매며 시름시름 앓던 것도 다 그 이유에서겠지.

현대인의 자아는 무슨 이런 중요한 일을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애한테 맡기냐고 소리를 지르지만, 이곳은 아직 ‘아동’이라는 개념이 없는 배경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역시 애는 잘 먹고 잘 배우고 잘 놀고 잘 자야 해.

유스틴도 나중에 어디 휴가라도 보내야지. 얘도 아직 애인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굳이 국외까지 은행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슬그머니 다른 생각을 하던 와중, 유스틴의 질문이 귓속으로 꽂혔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율동적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제법 구미가 당긴 모양이군.

나는 앞으로 은근히 기울어진 유스틴의 상체를 눈에 담으며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새로 세울 은행의 주 고객은 리넥스가 될 테니까요.”

물론 리넥스와의 거래가 안정될 때쯤엔 다른 사람들도 몰려들겠지만.

“지금도 리넥스는 세계 각지의 신전에서 헌금을 거둬들였다가 다시 신전에 분배하고 있어요. 게다가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무역이 활성화될 테고요. 이때 수반되는 문제가…….”

“환전이군요.”

유스틴이 냉큼 말을 받았다. 나는 칭찬의 박수 대신 칭찬의 고개 끄덕임을 날려 보냈다.

“네. 맞아요. 리넥스에서는 기껏 수수료를 내고 환전해 국고를 채워 놓고, 신전 운영비를 지급하기 위해 이중으로 환전하고 있겠죠.”

“그 헌금을 모두 운반하는 것도 상당히 복잡한 일일 테니…….”

그의 중얼거림에 나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는 솜니움을 위시로 다른 나라와 교역까지 한다?

‘환전 수수료 때문에 미치는 거예요.’

게다가 이건 앞으로 비단 리넥스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게 될 터.

수수료 문제는 물론이요 환전할, 혹은 환전한 현금을 운반하다가 변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망하는 거다.

차라리 지폐를 쓰면 티라도 안 날 텐데, 이 세계는 주화를 쓰는 상황.

그리고 우린 이걸 노리는 거다.

“에버딘 은행을 이용하면 다른 곳보다 훨씬 싼 가격에 환전해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언제든 출납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계좌……, 장부도 만들어 주고요.”

“동시에 우리로서는 이미 국외에 은행이 있으니, 실제로는 굳이 환전할 필요가 없겠군요.”

“바로 그거죠.”

국내외 지사끼리 연결되어 있으니, 장부만 바꿔 적으면 된다.

“이건 초기 사업에 불과하고, 은행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본격적으로 다른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금융 상품도 내놔야겠죠.”

다음으로는 예금이나 초기 사업자본이 부족한 사업자들을 위한 단기 대출 서비스 같은 것들.

“또 에버딘 은행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제출하면 해외 지점에서 대금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을 거예요.”

이름하여 일종의 환어음 되시겠다.

굳이 무거운 주화 들고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지정 은행에서 대금 받아 가시라고.

“에버딘 은행은 국책 은행은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신용성과 자금을 지니고 있죠. 분명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제안을 거절한 후에 리넥스 측에서 비슷한 사업을 벌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에이, 이 일도 막대한 자금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죠. 대공자님 아니면 할 수 없는 사업이에요.”

이걸 너희 가문 은행 아니면 누가 하겠니. 준비하다가 쫄딱 망하겠지.

일부러 유스틴을 치켜세우며 미소를 날리니, 유스틴이 이번에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굳은 건지 웃은 건지 알 수 없는 어색한…….

“……좋습니다.”

그 순간, 유스틴이 내내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거둬 제 입 아래를 가리며 말을 꺼냈다.

그 은빛 눈동자는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는 채였다.

“하지만 이번 사업은 저희 측에서도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초기 자본금이 상당할 텐데요.”

이어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아무리 에버딘 대공가라고 해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여기에 드래곤 레어의 보물을 끼얹으면 어떨까?

“우리는 동업자잖아요, 대공자님. 당연히 시두스 가문에서도 투자해야죠.”

물론 그만큼 공정하게 이익 배분을 해 줘야 할 테지만.

내 말에 유스틴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늘였다.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는 모양이군요.”

“에이,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불법적으로 벌어들이는 것도 아니에요. 그랬으면 이미 대공자님 귀에 들어갔겠죠.”

어차피 너는 이미 내 능력 알고 있잖아.

내 말에 유스틴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번 사업은 제 선에서 함부로 벌일 수 없을 것 같군요. 아버님께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헉, 그런가요…….”

“물론 승인해 주실 겁니다. 아버님은 저만큼이나 혜안이 뛰어나신 분이니까요.”

“아, 넵.”

저‘만큼’이나 혜안이 뛰어난 사람이라니. 자기 칭찬을 돌려 하네.

나는 영업용 미소를 입가에 띤 채 그의 말을 가뿐히 받았다.

“저도 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내가 죽고 나면 어쨌든 아버지께서 이어받으셔야 할 텐데.

아무 언질도 못 받고 있다가 난데없이 ‘사실 따님이 이런 사업을 벌이고 떠났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할 수는 없지.

무슨 ‘하루아침에 거대 자산의 상속자가 되어 버렸습니다’도 아니고.

아니지. 이 경우는 상속이 아닌가?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K―효도?

아무튼.

“어쨌든 다시 바빠지겠군요.”

곧이어 유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자연스레 그를 따라 일어나려다,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잠시만요, 대공자님.”

동시에 유스틴이 눈을 크게 뜬 채 내가 잡은 손을 한 번, 그리고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아이고, 마음이 급해서 실수를 저질렀네.

“아, 죄송해요.”

나는 곧바로 사과를 건네며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잠깐 새끼손가락끼리 얽혔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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