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그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손가락이 닿은 이마에 따뜻한 열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내게서 손을 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이내 그가 다 되었다는 듯 턱을 치키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이름만 제대로 안 들리는 거 너무 신기하네요…….]
[한낱 인간 따위가 내 이름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잖느냐.]
[네에, 그렇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이미 계약까지 끝마친 상황에서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그렇지만.
[어르신이 찾고자 하시는 대상의 이름은 제가 들을 수 있는 거 맞지요?]
제법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몇 번 속눈썹을 팔랑이다 말고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징표를 내리는 내내 너는 그것만 걱정했다는 소리구나.]
그러고서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걱정할 것 없다. ‘그건’ 너희 인간들도 잊지 않았을 테니.]
* * *
그로부터 며칠 뒤.
잠깐의 요양을 끝마치고 황도의 저택으로 돌아온 날 밤.
[미친놈.]
나는 날리자마자 힘없이 추락한 종이비행기를 있는 힘껏 구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임 산맥 근처에서도 아무것도 안 느껴지길래 여기서도 한번 던져 본 건데.
‘혹시나가 역시나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드래곤은 미친 게 틀림없다.
[그걸 대체 어떻게 찾으라고?]
그가 내게 찾아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물이나 신도 아닌.
[세계수 위그드라실이라니.]
세계수가 무슨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그걸 대체 무슨 수로 찾냐고. 애초에 그게 진짜 존재하는 거였어?
나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심호흡했다.
[아냐, 할 수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레어 안의 금은보화들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찾아보기는 해야지.
나는 구겼던 종이를 다시 곱게 펴고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어쨌든 황도 근처에서도 세계수는 찾을 수 없다는 소리네. 이러다가 세계 일주까지 하겠어.
물론 이 얘기를 꺼내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격하게 환영하실 테지만…….
[얘를 두고는 못 가지.]
이곳에는 나만 기다리고 있는 금쪽같은 제자가 있어서요.
나는 망설임 없이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루스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 루스! 늦어서 미안해!]
[미에나!]
동시에 작은 소년이 내 앞에 나타나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저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그저 기쁜 모양이었다.
투정 하나 없이 그저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니, 어쩐지 죄책감이 더 깊어지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벅벅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넸다.
[이렇게 늦을 생각은 없었는데, 일이 생겨서 그만. 정말로 미안해.]
[전 정말로 괜찮아요. 미에나가 다시 온다고 말해 줬으니까요.]
[루스…….]
이 작고 소중하고 말랑한 나의 흰 찹쌀 강아지 녀석아.
나는 그의 찹쌀떡 같은 볼을 쭉쭉 늘리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달라져 있다 싶더니.
[이제는 꿈에 별이 떠 있네?]
[미에나가 보여 준 게 기억나서요.]
내 말에 루스가 쑥스럽다는 듯 어물어물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본판은 새까만 공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변화인걸.
나는 기특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펼쳐 놓은 밤하늘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그래그래, 저기 북두칠성도 작은곰자리도 예쁘게 박아 놨…….
[어?]
나는 루스를 쓰다듬다 말고 그대로 홀린 것처럼 그가 펼쳐 놓은 밤하늘을 세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저 별의 위치, 이곳과는 다른 별자리 구성. 지겹도록 봐서 알고 있어.
이건 내 서재의 플라네타륨과 완벽히 일치하는데.
[미에나……?]
그사이 루스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하늘에서 시선을 떼 루스를 바라보았다.
얘 진짜 뭐지……?
아무래도 제 제자가 천재인 것 같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 집 강아지는 천재 강아지~…….]
익숙한 동요를 흥얼거리고 있으려니, 낱말 카드를 보고 있던 루스가 내 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루스의 앞에는 몇백 장 정도의 알록달록한 카드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양손을 흔들어 보이고서 검지를 들어 아래에서 위로 일직선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솟아 있던 낱말 카드 한 장이 빛을 발하며 뿔뿔이 흩어진다 싶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나무가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드넓게 자라난 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나나 싶더니, 이내 동그란 열매가 맺혔다.
나는 알맞게 익은 과일 하나를 따고서 루스에게 물었다.
[이건 뭘까, 루스?]
[사과요!]
[그래, 맞아.]
여기선 먹어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겠지만, 달고 맛있는 과일이지.
생과일주스로 갈아 마셔도 좋고. 파이로 만들어 먹어도 좋고, 잼으로 먹어도 상당히 맛있답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시간이 남으면 요리 레시피도 좀 알려 줄까?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겠지.
[여기 있는 단어들은 이제 모두 알 것 같아요.]
잠깐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사이, 루스가 눈앞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들며 해맑게 말했다.
나는 축하의 의미로 손뼉을 짝짝 쳐 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 많은 단어를 다 깨치다니, 루스가 열심히 따라와 준 것 같아서 정말로 기뻐.]
중간부터는 단순히 낱말이 아닌 문장 구성 카드까지 껴서 조합했으니, 실제로 익힌 건 더 많을 텐데.
[수고했어, 루스.]
나는 공부가 끝나자마자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루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간단한 진단 평가를 한 결과 알 수 있는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루스는 한 번 보고 외운 건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
둘째, 루스는 이미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아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글을 읽을 수는 있는 대신, 그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
‘단어의 뜻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래도 저 기억력에 응용력까지 뒷받침해 준다면, 툭툭 건드려 주는 것만으로도 또래 아이들이 배우는 수준까지 금방 따라올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글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어는 놨으면서, 정작 뜻은 알려 주지 않았다?
이건 대체 무슨 신개념 학대인지.
게다가 이상한 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아는 단어가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뜻을 아는 단어나 문장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더니.
‘……그, 그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