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질문은 세 가지만 받겠다고 했을 텐데.]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이 세상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작게 중얼거리자 그가 어림도 없다는 듯 또 한 번 코웃음 쳤다.
그러고서 그는 어떻게 요리해 먹어야 좋을까 하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래서, 네 나를 도울 테냐?]
갑자기 냅다 협상 테이블을 들이밀었다.
[가기 전에 이야기해야 할 주제인 건 맞는데, 조금 갑작스럽네요.]
[어설픈 질문 놀이도 끝났으니 하는 말이다. 넌 이미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고, 나 역시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분명 좋은 거래가 될 텐데.]
[그건 대가가 확실할 때의 이야기죠, 어르신.]
[네가 찾아낸다면 내 심장을 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에이, 솔직히 누가 원하는 걸 찾겠다고 자기 목숨을 내놓아요? 죽으면 다 말짱 도루묵인데.]
[도루묵?]
[전생에서 쓰이던 관용구예요.]
이 드래곤이랑 얘기할 땐 이런 것도 편하게 드러낼 수 있어서 좋네.
숨기지 않고 되는 대로 말하자, 그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대로 대화가 흘러가지 않으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네가 드래곤의 약속을 우습게 아는구나.]
[그게 아니고, 상황을 따져 보자는 거죠. 제가 보기에 어르신은 레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시는 처지 같은데, 맞지 않나요?]
겨울잠 같은 거 자는 중 아닌가.
내 말에 그가 좁혔던 미간을 피고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만날 수 있지 않으냐.]
[그러기엔 집이 이곳이 아니어서요. 여긴 요양차 잠깐 온 거고, 곧 돌아갈 거예요. 그리고 꿈에서는 아무런 대가를 받을 수 없잖아요.]
[당장 받을 수 있는 대가를 원하는 모양이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막말로 찾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렇게 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정작 일당은 못 받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것도 다 인건비인데, 보상은 제대로 받아야지.
[그러잖아도 전 충분히, 매우, 아주아주 바쁜 사람이거든요.]
루스 가르치랴 유스틴이랑 사업하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거기에 무언가를 찾는 임무까지 더하라고?
이건 맨입으로는 안 되지. 드래곤의 심장을 당장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 주장을 곱씹는 듯, 그가 가만가만 속눈썹을 팔랑이며 작게 혼잣말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럼 이건 어떠냐.]
그가 여명을 닮은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서 달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게 내 둥지에 출입할 권한을 주겠다.]
[드래곤 레어의 출입 권한이요?]
[그래. 허락이 없으면 감히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
내가 직접 결계를 쳤단다.
그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그가 고개를 기울인 방향 반대쪽으로 얼굴을 꺾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드래곤에 대한 설화가 거의 없다 싶더라니, 인간들 눈에 띄지 않도록 결계를 쳐 놔서 그랬던 건가.
아니,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얼마 전에 드래곤을 봤다고 주장하는 마법사가 나왔는데요, 어르신.]
[어디에서 봤다더냐?]
[하임 산맥이요.]
내 말에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그의 눈매가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그러고서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몇 번 눈동자를 굴렸다가, 이내 다시금 표정을 풀고 이전과 같이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물 주제에 제법 괜찮은 실력을 지녔었나 보구나. 결계의 끝자락에 다다라 와이번을 마주하다니. 허나 거기까지일 뿐이다. 둥지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어.]
[와이번이요?]
[이제는 너희 인간이 보기 힘든 존재지. 둥지 주변에 조금 남아 있단다. 원한다면 만나게 해 주마]
[아니,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와이번이면 드래곤 닮은 종족 아니야. 괜히 마주쳤다가 한입에 꿀꺽 삼켜지면 어떡해.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 네가 나를 돕는 한, 내 권속들은 너를 해치지 않을 테니.]
[아하…….]
다르게 말해서, 내가 그를 안 도와주면 한입에 꿀꺽 삼켜지겠군.
제안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에, 나는 마땅한 반응을 찾지 못하고 떨떠름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도 내 표정을 읽은 것처럼 덧붙여 말했다.
[설령 내 제안을 거절한대도 너를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 그런 좀스러운 짓은 미물이나 하는 게지.]
[에헤헤, 그거 다행이네요. 역시 어르신 최고!]
[하지만 너같이 욕심 많은 인간이 내 제안을 거절치는 않겠지. 그러잖느냐?]
곧 그가 확신에 찬 어투로 은근하게 물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렸다.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해도 그는 나를 해치지 않는다. 이 선택지의 결말은 그게 끝이다.
다음번에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을지도 미지수고.
하지만 내가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드래곤 레어의 출입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려 드래곤과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아까 이곳에 오는 길에도 널려 있는 보물을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었지.
‘그걸 다 가져갈 수만 있다면…….’
나는 절로 고이는 침을 모른 척 목구멍 뒤로 넘겼다.
일단 확인부터 해 보자.
[어르신의 둥지에는 예쁘고 반짝이는 것들이 많이 있나요? 예를 들어 금이라든가, 보석이라든가…….]
[이미 오면서 확인하지 않았더냐. 네가 본 건 창고가 가득 찬 바람에 대충 버려 놓은 것들이지만.]
[창고가 가득 차…….]
그 말인즉, 오면서 봤던 보물들은 드래곤 발톱 때만큼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거지.
그 많은 게…….
[그럼, 그럼요. 둥지의 출입 권한을 주겠다는 말은 혹시…….]
[네가 원한다면 이곳에서 무엇이든 가져가도 좋다는 뜻이란다.]
[좋아요, 어르신.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
찾는 걸 도와주기만 한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게 내 거라니. 이거 완전 대박이잖아!
몇백 년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쌓아 온 온갖 금은보화와 골동품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못해도 에버딘 가문의 재산에 버금가지 않을까?
‘이거라면 당장 돈 버는 일 그만두고 편하게 여생을 보내는 것도…….’
생각만 해도 행복한 상상에 침을 꼴깍 넘기는 순간, 불현듯 어느 한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근데 그거 내가 혼자 다 못 들고 가잖아.
[저어, 어르신. 그 출입 권한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오.]
아무래도 이건 다시 딜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르신.
나는 생각을 마친 즉시 최대한 순수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저 말고 제 가문으로 명의 변경 가능할까요? 헤헤…….]
내 말이 끝나고 몇 초간 깊은 침묵이 주위를 휩쌌다.
그동안 드래곤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 말하면 내용이 바뀌기라도 한다느냐, 이 얄미운 것아.]
[이것도 다 협상의 기술이죠.]
[실없는 소리는 되었다. 내게 필요한 건 너지, 네 피붙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저는 몸도 약하고 어려서 이곳에 홀로 올 수 없단 말이에요.]
여기서 보물을 가지고 나가는 일은 고사하고, 애초에 이곳까지 나를 혼자 보내려 들지도 않을 게 뻔했다.
짐짓 불쌍한 척하며 눈동자를 깜빡이자,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 명. 네가 허락한 이라면 한 명은 더 들어올 수 있게 해 주마.]
[고작 한 명이요?]
[욕심도 정도껏 부려야지. 계속 이리 나오면 처음부터 없던 일로…….]
[제가 한번 힘세고 입 무거운 사람 잘 구해 보겠습니다, 어르신.]
계약 무효는 안 될 일이지.
나는 곧바로 욕심을 고이 접어 던지고서 예쁘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이걸로 계약 성립인 건가. 유스틴이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애초에 능력 독점 계약도 아니었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
[제 능력이 닿지 않아 어르신이 원하는 걸 찾기 전에 죽을 수도 있지만, 그전까지는 최대한 노력할게요.]
레어 주변에 있는 와이번들한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있던 찰나였다.
[네가, 죽는다고.]
낮고 깊은 목소리가 대번에 내 귓속으로 꽂혔다.
[너는 죽지 않는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느른하게 울려 퍼지더니, 그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휜 채 말을 이었다.
[네 나를 위해 움직인다면, 나 역시 결코 너를 놓지 않을 테니.]
그 황금빛 눈동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분명 확신이었다.
자신이 있는 한 나는 죽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래서 더 기묘한 눈빛.
[그래, 그럼 이야기도 얼추 끝났으니 진정으로 계약하자꾸나.]
[계약이요? 여기서요?]
[왜, 못할 것 같으냐? 꿈이라고 한들, 네 영혼이 이곳에 와 있음에는 분명한 것을.]
그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고선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나는 갑작스레 다가오는 큰 덩치에 순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주시지!
[최후를 지켜보는 자, ■■■■가 징표를 내리니.]
곧이어 그가 내 이마에 검지를 조심스레 가져다 대며 진언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이 영혼이 나를 위해 움직이는 동안 이 땅의 모든 권속이 고개를 조아리고, 향하는 모든 길이 열릴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