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쿨럭, 콜록!]
예고 없이 찔러 들어온 공격에, 나는 순간 당황해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아픈 곳을 찌른다고?
일단 거짓 없이 답하라고 했으니 사실대로 대답하긴 하지만, 영 예의가 없으시네.
[아마 길어야 1년일 거예요.]
[그런 것치고는 꽤 담담하구나. 죽음을 겪어 본 적 있어서 그런가.]
[그런 것도 있고, 바꿀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가는 정작 소중한 걸 못 보고 놓쳐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요.]
일례로 아버지는 헛된 것에 매달리다가 돈을, 나아가 가문의 미래를 잃을 뻔하셨다.
변하지 않는 일을 바꾸려 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또 어디 있을까.
[바꿀 수 없는 일이라.]
내 대답을 들은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완벽하게 그려진 호선이 어쩐지 묘하게 느껴졌다.
장난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기발한 계책을 떠올린 책사처럼.
[바꿀 수 있다면?]
곧이어 그가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네가 내 심장을 먹는다면 수명이 늘어날 텐데.]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어르신. 어차피 그럴 마음 없으시잖아요.]
나는 참지 못하고 표정을 굳힌 채 핀잔하듯 말을 내뱉었다.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간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바른 판단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읊조리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괜한 희망을 지니게 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또 없는데.
[……당돌하구나. 내 앞에서 이리 군 미물은 보지 못하였는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조금 전의 미소와는 다른, 조금 더 누그러진 웃음을 띤 채 입을 열었다.
[네 모든 답이 내 마음에 들었으니, 네게 질문할 기회를 주마.]
나 역시 깊게 심호흡하며 굳었던 표정을 정돈했다.
잠깐 욱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봐줘서 다행이다.
역시 이런 초월적인 존재들은 미물이 성깔 한번 부려 주는 걸 좋아한다니까.
곧이어 나는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곱씹은 뒤, 그를 따라 슬며시 웃으며 첫 번째 질문을 내어놓았다.
[어르신께선 제게 무언가를 찾아 달라고 요청하고 싶으신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 질문에 그가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하며 물었다. 내내 부드럽게 걸려 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옅은 살기마저 다시 느껴지는 게, 대답 한번 잘못했다가는 죽이기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본데.
하지만 전처럼 겁먹어 말을 아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기엔 방금 이미 한 번 욱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추측이 정확하다면.
이 테이블의 상석에는 그가 아닌 내가 앉아 있어야 함이 마땅했으니.
[어르신께서 제게 물었던 세 가지 질문을 곱씹어 봤거든요.]
[곱씹어 봤다?]
[단순히 제 능력에 관해 물어봤다고 넘기기에는, 어르신의 질문들은 어떠한 상황을 가정하고 제 능력이 이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콕 집어서 원하는 대상의 꿈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은 것도, 능력 범위가 어느 정도냐고 물은 것도, 그리고 그 범위를 들은 후 내 남은 수명을 물은 것까지.
처음에는 단순히 나를 골리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던진 건가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르신이 찾고자 하는 대상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혹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상태고, 이를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테죠. 그걸 찾을 수 있는 이도 아마 저 말고는 없는 것…… 같고요.]
황도의 지명을 아직도 ‘루미나레’로 기억하는 걸 보면 최소한의 정보도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뜻. 즉, 그는 혼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내게 남은 수명을 물어본 것이다. 시간 안에 그가 원하는 대상을 찾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굳이 제 심장을 운운하며 나를 도발한 것도, 정말로 나를 놀리고자 한 말이 아니라 내게 보상을 미리 살짝 보여 준 거겠지.
네가 나를 도우면 네 수명을 늘릴 방법을 알려 주마. 아까도 얘기하지 않았느냐. 내 심장을 먹으면 네 수명이 늘어난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제게 살기를 뿌릴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손님 대접을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나름의 확신을 담아 말하자, 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손톱만 한 것이 맹랑하다고 봐줬더니 기어이 머리 위에 기어오르려 하는구나.]
[원래 죽기 전엔 눈에 뵈는 게 없는지라.]
[그런 것치고는 꽤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 같던데.]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둬야죠, 어르신.]
내 능력을 알기 전이었으면 몰라도, 이제는 너 나 못 죽이잖아.
마지막 말은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키고서 방긋 미소 지었다.
그는 나를 죽일 수 없다. 그가 내게 원하는 게 있는 한. 그리고 그걸 나밖에 이뤄 줄 수 없는 이상.
[네 추측이 틀렸다가는 그 얇은 목이 당장 날아갈 텐데.]
[에이, 그랬으면 이미 날아갔겠죠.]
지금도 이렇게 옅은 살기만 흘려보낼 뿐, 나한테 손 하나 대지 않고 있는데.
나는 말을 마치고서 다시 한번 능청스레 미소 지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림자 드리워진 냉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새끼 드래곤을 둥지에 들였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처럼 부드럽게 호선을 그려 웃었다. 솜털을 곤두서게 했던 살기 또한 온데간데없이 흩어진 후였다.
나는 미처 풀지 못했던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역시 그건 그냥 시험용 살기였군.
[보통 인간은 이 살기를 마주하면 미쳐 버리거나 두려워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말이다.]
[에헤헤, 칭찬 감사해요.]
[잔망스러운 것.]
그가 다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작게 코웃음 쳤다.
나는 그에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흑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엘라X틴 하신 걸까.
[네 말이 옳다. 간절히 찾고 싶은 게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찾을 수 없는 상황이지.]
곧이어 그가 나를 잡념에서 끌어올렸다. 여전히 나른하고 권태로운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 짙은 열망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을 수도 없어, 오랜 세월을 견뎌야 했지. 그건 아주……, 귀찮은 일이란다.]
그 고통을 그냥 ‘귀찮음’으로 퉁쳐 버린다고?
[하지만 네 능력이라면 분명 찾을 수 있겠지. 오래 걸릴지 모르겠으나, 분명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너는 이 몸도 찾아냈으니까.]
[어, 그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찾으려 하시는 게 뭔가요, 어르신?]
[네가 나를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 아직 모르는데, 쉬이 알려 줄 것 같으냐?]
[아, 넵.]
그렇게 말할 거면 왜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건데.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구시렁대고 있으려니, 그가 눈썹을 한 번 으쓱이고서 말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이제 질문 하나 남았단다.]
[아니, 방금 건 질문 아니었는데요?]
[찾으려 하는 게 뭐냐고 묻는 게 질문이 아니면 뭐지?]
[그 질문엔 어르신도 답을 안 해 주셨잖아요.]
공정하게 갑시다, 거참.
입술을 삐죽이며 항의하자 깊은 웃음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그래. 네 덕에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꼈으니 봐주마. 또 무엇을 묻고 싶으냐?]
[아까 그 이야기요. 제 몸에 쌓인 게 많다는 거.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제 능력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요?]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네 육체는 네가 가진 힘을 감당하지 못해. 그러니 얼마 못 가 죄 터져 버리는 게지.]
이 거지 같은 시한부 인생이 내 능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이게 무슨 엿 같은 상황이야?
[하지만 전생에서는 이런 능력이 없었는데요.]
[능력은 네 안에 쌓인 힘이 넘치는 형태에 불과해. 그런 형태의 능력으로 발현되는 건 나로서도 처음 보지만, 원리는 같을 거다.]
[그럼 능력을 많이 쓰면 쌓인 힘을 덜어 내서 더 오래 살 수 있을까요?]
[그럴 것 같으냐?]
서늘하게 치켜 올라간 그의 눈매가 장난스레 휘어졌다.
나는 곧바로 답을 눈치채고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긴, 그런 식으로 상태가 나아질 거였으면 이미 낫고도 남았겠지. 다섯 살 이후로 계속 능력을 쓰고 다녔으니까.
[네 힘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증폭되고 있단다. 그러니 덜어 낸대도 티가 안 날 수밖에.]
[거지 같네요…….]
이런 힘을 원한 적 없는데. 물론 현실에서 이 능력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기는 하지만.
[자, 그럼 이번에는 정말로 질문 하나 남았다.]
이어 그가 짧게 턱짓하며 말했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 말고 질문이나 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따지고 보면 이쪽은 내내 고민해 왔던 생로병사의 결정적 비밀을 안 건데, 성질도 급하셔라.
하지만 어차피 변할 수 없는 거라면 이 감정을 길게 끌 필요는 없지.
나는 곧바로 마지막 질문을 내놓았다.
[어르신 말고 다른 드래곤은 없나요? 아니면 신이라든지.]
[너는 신을 믿느냐?]
[아니었는데, 이제는 좀 믿어도 될 것 같기도 하네요……. 근데 개인적으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최근에 어느 신을 사칭한 전적이 있어서, 신벌 받을까 봐 조금 두렵거든요.
[다른 존재라.]
내 말에 그가 내게서 시선을 떼고서 옅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처럼……, 이라기에는 뭔가 눈빛이 불순한데.
이윽고 그가 다시 내게 눈동자를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는 없다.]
‘이제는’ 없다니. 그럼 예전에는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럼 왜 혼자 이곳에 남으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