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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25)화 (25/154)

제25화

숨도 쉬지 않고서 빠르게, 하지만 한 자 한 자 진심을 담아 말을 내뱉은 후.

나는 최대한 순수하고 귀엽고 깜찍하여 감히 건드릴 마음조차 들지 않을 소동물의 눈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말을 들은 드래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영겁 같은 침묵이 흐른 후.

[맹랑한 것.]

그가 살기를 모두 거둔 채, 눈동자를 접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해치지 않을 테니 그리 겁먹지 않아도 괜찮다.]

[…….]

[내 오랜만에 마주한 흥을 망가뜨릴 정도로 천치는 아니니.]

나는 묶여 있던 숨을 조심스레 풀어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먹힌 건가? 이제 괜찮은 거 맞나?

역시 진심 어린 사과는 통하게 되어 있다니까. 사과문의 정석을 숙지해 놓기를 다행이다.

괜히 ‘더 나은 활동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했다가 목 쓱싹 당할라.

이내 나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아이의 미소를 띤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해해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저어, 괜찮으시면 그런 김에 다시 나가 봐도 될까요? 심기 안 거슬리게 알아서 딱 잘 나가 보겠습니다!]

이후에도 아무리 그쪽 문이 유혹적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절대 다시 안 들어오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내 꿈에 마음대로 들어온 거로 모자라 이제는 마음대로 나가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갸륵한 내 정성이 닿지 않았는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건 싫은데.]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그죠.]

윗사람이 싫다는데 누가 밀고 나가겠어. 까라면 까야지.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작지만 깊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낮고 깊은지, 내 몸이 같이 울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이리 재밌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냥 보내 줄 수야 없지.]

[아무렴요. 그렇죠.]

나는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사고 회로를 가동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나는 저 드래곤한테 ‘오랜만에 선물 받은 장난감’ 정도의 위치인 거구나.

오케이. 자기 객관화 완료.

그렇다면 나가기 전까지 최고의 광대가 되어 보겠습니다.

아침이 되면 티나가 나를 깨우든 아침 햇살에 눈이 저절로 떠지든, 알아서 꿈에서 깨어나지겠지.

장르가 갑자기 생존 판타지로 바뀌어 버린 감이 있긴 하지만.

‘원래 인생은 그 자체로 생존물인 법.’

그러니 일단은 저 드래곤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고 잘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근데 드래곤 비위는 어떻게 맞추지?

[저, 어르신.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어르신과 오붓하고 즐겁게 보내고자 몇 가지 질문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잠깐만 설문에 응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가 어떻게 혀를 놀려야 네가 나를 온전히 보내 줄 수 있을까 취향을 조금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요.

방긋방긋 웃으며 묻자, 금빛 눈동자가 또 한 번 사르르 휘어졌다.

[제법 웃긴 말을 하는구나.]

[에헤헤…….]

[허나.]

바로 그때, 손가락이 ‘딱’ 하고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두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질문은 네가 아닌 내가 한단다.]

나는 한순간에 밝아진 풍경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떠 그를 제대로 마주했다.

나보다 한참 커다란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 넘치는 검은 머리카락. 조각을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얼굴과 몸, 그리고 황금빛 눈동자 안으로 드러난 세로 동공까지.

이 얼굴이 인간이면 그게 더 불공평해. 이 외모는 확실히 인외야.

[따라오거라.]

이어 그가 짧게 턱짓하고는 멀찍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이대로 문을 향해 튈까 고민했다가, 이내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도망도 상대를 보고 쳐야지.

대신에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이 들지 않는 토굴 같았던 저번 장소와는 달리, 이곳은 조금 으스스하긴 할지언정 이전보다 확실히 밝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고성, 혹은 탑 같은 느낌.

요즘 나오는 저택과는 달리 돌로 이루어진 벽과 꽤 오래되어 보이는 장식품들, 그리고 이리저리 널려 있는 각종 보물까지.

자기 레어를 꿈속에서 그대로 재현한 걸까?

레어가 고성이라니. 나는 기껏해야 넓은 동굴 정도로 생각했는데.

[내 둥지가 네가 생각했던 풍경과는 달라서 신기한 모양이구나.]

그 순간,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불쑥 질문했다. 나는 다시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서 정직하게 답했다.

[헤헤, 네에. 사실 동굴 같은 게 나올 줄 알았거든요.]

[솔직한 대답이구나. 내 앞에서 솔직하게 구는 미물은 드물지.]

뒤이어 그가 싫지 않은 기색으로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직 메타로 가길 잘했다. 괜히 비위 맞추겠답시고 알랑거렸다가는 훅 갈 뻔.

[웃기는 일이지. 내게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데, 그 미물들은 저들을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지성체라고 여기지 않느냐. 하여 저를 닮지 않은 것들은 다 야만적으로 살리라 추측하지.]

[아하하……, 맞죠. 아무래도 생물은 모든 걸 자기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걸 듣고 있는 내가 바로 그 한낱 미물인데.

나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려 들지도 않는 발언에 열심히 맞장구치는 동시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사방에 널린 보물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그의 둥지라면 저 보물들도 실제로 다 저렇게 굴러다닌다는 뜻 아니야.

저걸 주워 갈 수만 있다면…….

[자, 그러면.]

곧이어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앞에 놓인 사각 테이블에 주춤주춤 다가가 앉았다.

굳이 테이블 앞에서 멈춘 건 여기 앉으라는 뜻이겠지. 이유는 백이면 백 취조 때문이겠고.

[앞으로 내가 묻는 것에 거짓 없이 대답한다면 네게도 세 가지 질문할 기회를 주마.]

자연스레 내 반대편에 앉은 그가 생긋 웃는 낯으로 말을 건넸다.

나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면 나한테도 질문권을 주겠다고? 생각보다 인심……, 아니, 드래곤심이 후한데?

이래서 인간보다 현명한 생명체라고 하는 건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존재일지도.

[우선 네가 답하지 않은 것부터 다시 묻자꾸나.]

이윽고 그가 황금빛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며 질문했다.

[내 꿈에는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나는 정말로 숨김없이 대답했다.

[문 열고 들어왔습니다, 어르신.]

[문?]

[제 능력이 타인의 꿈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거거든요. 그 매개체가 바로 문이에요.]

[문을 고르는 기준은?]

[보통 이 세계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의 문은 밝게 빛나는 편이에요. 어르신의 문은 제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말도 안 될 정도로 밝게 빛나서 한번 들어와 본 거구요…….]

[그야 당연하겠지.]

내 말에 그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쩐지 유스틴을 닮아 재수 없는 발언이었다.

아니, 아니지. 이분은 드래곤이니까 저 반응은 재수 없는 게 아니고 그냥 당연한 게 맞지.

[네 몸에 쌓인 것을 보니 그 능력을 지닌 지도 꽤 오래됐을 것 같은데, 언제부터 그런 게 가능했지?]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재차 질문했다. 나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역으로 물었다.

지금 저거 내 상태 떡밥 던진 거 아니야.

[잠시만요, 어르신. 쌓인 거라뇨?]

[지금은 내가 질문하고 있는데.]

[아, 넵.]

거, 누가 늙은 거 몰라볼까 봐 되게 쪼잔하게 구시네.

나는 애써 해맑게 미소 지으며 냉큼 답했다.

[다섯 살 때부터였습니다.]

[그 다섯이 어느 생의 다섯을 의미하는 거지?]

[이번 생의 다섯입니다……?]

‘어느 생’의 다섯이냐니. 드래곤은 그런 것도 볼 수 있는 거야? 완전 사기적인데.

다음 생엔 드래곤으로 태어나기를 남몰래 기원하는 사이, 그가 쉴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질의했다.

[그럼 원하는 대상의 꿈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냐.]

[이름과 성을 알 수 있다면요. 대신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특정하기 어려워서, 흔한 이름이면 좀 힘들어요. 제 능력 범위 밖에 있는 대상도 탐지할 수 없고요.]

예외가 있다면 루스인데, 그건 루미니스라는 이름이 이 시대에선 쓰이지 않는 사어라 그런 거고.

[그 범위가 어느 정도지?]

[어, 일단 확실한 건 여기서 황도까지는 안 닿을걸요……?]

황도에 있었을 때는 아무리 돌아다녀도 이 문을 본 적이 없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조만간 다시 한번 제대로 된 범위를 측정해 봐야겠는걸.

[황도라면 루미나레인가.]

앞으로의 일정을 테트리스 하는 사이, 그가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루미나레’라면 황도 람파스의 옛 지명이라고 들었는데. 대체 저 어르신의 정보 업데이트는 몇 연도에서 멈춘 걸까.

어쩌면 몇백 년 동안 한 번도 레어 밖으로 안 나온 건…….

[네가 느끼기에 네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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