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은 내 꿈과 타인의 꿈을 이어 주는 통로, 즉 간간이 솟아난 문을 제외하고는 온통 새까만 곳인데.
[여긴 왜 이렇게 밝은 거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내 주위에 있어야 마땅한 아버지나 어머니의 문 역시 이 빛에 가린 탓인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겪어 본 적이 없는데.
대체 뭐 때문이지?
[……와.]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길 몇 초.
이윽고 나는 이 화이트 아웃 같은 현상의 원인을 발견하고서 그대로 탄성을 내뱉었다.
아득한 시야 멀리 보이는 것은 분명 문이었다.
이 공간을 모두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거대한 빛을 가진.
단 하나의 문.
다른 사람의 문까지 가리는 세기의 빛이라니. 가능한 일인가?
아니, 가능한 일이고 자시고 할 거 없이 눈앞에 펼쳐져 있긴 한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붙박인 채로 홀로 빛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준인데.’
하물며 루스의 문도 이렇게까지 밝게 빛나지는 않았다. 차라리 오류라고 하는 게 더 현실성 있을 지경이었다.
저렇게 빛나는 문을 가진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애초에 사람이 맞긴 한 걸까?
[저걸 들어가 말아.]
나는 유혹하듯 뻗어져 나오는 빛줄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고민에 빠졌다.
괜히 호기롭게 들어갔다가 또 지독하게 얽히면 어떡하지.
귀찮은 일이냐, 호기심 충족이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못 먹어도 고.]
혹시 몰라, 이번에는 귀찮지 않으면서도 나한테 도움이 되는 꿈의 주인을 발견할지.
게다가 이제는 꿈에 입장하면서 몸을 숨기는 방법도 알고 있으니, 슬쩍 지켜보다가 나오기만 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꿈에 나온 사람을 현실에서 찾지 않잖아. 그냥 신기한 꿈이구나 하고 말지.
‘애초에 유스틴이 이상한 거라고.’
루스는……, 상황이 특이하니 나를 현실에도 존재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까.
……가도 되나, 이거?
[에이, 깊게 생각하지 말자.]
들켜도 뭐, 인맥 쌓고 좋은 거지.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들킨다고 해서 꼭 나쁜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더라고.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돈과 인재를 모아야 할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겁먹고 안 들어가면 정보도 인재도 돈도 안 모이는 거예요.
부정적인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 넣고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빛이 밝아 거리 가늠이 잘 안 되어서 그렇지, 이곳에서 문까지의 거리는 꽤 상당한 편이었다.
실명할 것 같은 빛무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이윽고 문 앞에 다다르자 문 위에 걸린 명패부터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뭔 말이야, 이게.]
제국어가 아닌데?
파고들수록 이상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근처에서 드래곤을 봤다더니. 설마 진짜로 이 꿈 주인이 드래곤인 건 아니겠지?
아마 은둔형 대마법사 내지는 리넥스의 치료 마법사처럼 해외에서 온 대마법사 정도가 아닐까.
설마 드래곤이 진짜 있겠어.
[후, 가 보자고.]
호기심이야말로 인류의 발전 원동력!
생각을 마친 나는 거칠……지 않고 조심스레 문을 여는 동시에 몸을 투명하게 흩트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루스의 꿈이랑 비슷한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빛 한 점 들지 않아 어두워 보이는 공간이었다.
다만 루스의 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것도 없던 그의 꿈과는 달리 이곳은 적어도 ‘풍경’이라고 칭할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여긴 어둡고 눅눅한 토굴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 있으면 숨이 막힐 것만 같고, 벽을 만지면 차갑지만 축축한 흙의 감촉이 느껴질 것 같은…….
‘일단 조금만 더 구경해 볼까.’
아직 꿈 주인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멀리 가지 않는 게 좋겠지. 만일의 상황엔 빠르게 꿈을 빠져나가야 하니까.
‘백 보 이상은 가지 않도록, 아니, 오십 보까지만 가는 걸로…….’
어두운 곳은 싫으니까.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으면 빠르게 후퇴하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던 찰나였다.
빠득.
불현듯, 멀리서부터 작고 희미한 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히다가 사라졌다. 나는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빠득.
곧이어 또 한 번, 어떤 소리가 허공에 수놓아졌다. 이번에는 방금보다 조금 더 선명했다.
커다란 짐승이 숲속을 거니는 듯, 마른 나뭇가지가 밟히는 듯.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 일부러 무언가를 부러트리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
빠득, 빠득. 빠드득.
‘뭐야, 미친.’
나는 곧바로 뒷걸음질 치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차마 등을 보이고 뛸 자신은 없던 까닭이었다.
여기서 소리치면 망한다. 기껏 모습 숨기고 들어왔는데 냅다 소리라도 질러 봐. 그건 진짜 수습 못 해.
그러니 하다못해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문고리 잡을 때까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움직이자.
나는 의지의 한국인, 나는 의지의 한국인. 아니, 이제는 제국민이지만 어쨌든 나는 아픈 것도 정신력으로 이겨 내는 의지의 미에나 시두스…….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히에엑!]
엄마야, XX 깜짝아!
하지만 예고 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낮고 깊은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 직후 몰려든 건 깊은 부끄러움과 혼란스러움이었다.
분명 몸을 숨겼는데. 소리도 안 내고 조심스레 움직였는데.
그런데 어떻게?
[맹랑한 것이 겁도 없이 내 꿈에 들이닥쳤구나.]
이어 또 한 번, 권태로운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언뜻 부드러운 듯싶으면서도, 옅은 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X 됐다. 이건 진짜 X 됐다.
목소리에서 배어 나오는 살기라니, 유스틴한테 걸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망함이다.
‘호기심이야말로 인류의 발전 원동력’이기는 개뿔,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고 내가 바로 그 고양이다.
‘정신 차려. 아직 괜찮아.’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후, 빠르게 모습을 바꿨다.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는데도 나를 알아차렸긴 했지만, 그래도 최후의 안전장치는 마련해 놔야지.
어차피 여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이어 나는 완전히 뒤돌아 내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린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만큼은 확실하게 보였다.
턱을 한참 쳐들어야 마주칠 수 있는, 세로 동공의…….
‘세로 동공?’
나는 그대로 숨을 들이 삼켰다.
세로 동공을 가진 인간 형상의 무언가?
누가 드래곤 없댔어. 누가 사실무근인 낭설이랬어. 진짜 있잖아! 내 눈앞에 있잖아!
50년 만에 생환한 마법사가 말하는 거면 얌전히 ‘님 말이 다 옳습니다’ 했어야지! 마법사씨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 가족도 잃고 신뢰도 잃고!
[실없는 재주를 부리는구나.]
억울하게 거짓말쟁이로 몰린 마법사를 가여워하는 사이, 느른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굴러떨어졌다.
그 직후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애써 바꿔 놓았던 내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얀 잠옷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어,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직접 간섭하기로 마음먹은 부분은 내가 바꾸지 않는 이상 다시 바뀔 수가…….
[이곳의 주인은 이 몸이니,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응당 내 의지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
[이전까지야 네 가진 능력을 뛰어넘는 이를 만나지 못했으니 그리 생각할 만도 하지만, 아이야. 자고로 힘은 힘으로 누르는 법이란다.]
그 순간, 그가 웃음기를 머금은 기색으로 말을 건넸다.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조물딱거렸다.
유스틴도 내 속마음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더니, 앞으로 표정 관리하는 연습을 좀 더 집중적으로 해야겠는데.
[자, 그래서.]
곧이어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여기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야 문 열고 들어왔는데요…….
나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침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동시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금빛 눈동자가 한쪽으로 느른하게 기울어졌다. 내게 향한 살기 역시 이전보다 좀 더 두터워져 있었다.
[말을 못 하는 건 아닐 텐데. 그렇지?]
입 안 열면 죽이겠다는 말을 저렇게도 하는구나.
사람이 꿈에서도 죽을 수 있나?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꿈에서 못 깨어나서 죽는 일도 있다던데.
아무리 시한부 인생이더라도 이런 식으로 죽기는 싫어. 돈 함부로 쓰지 말라는 유언은 남기고 가야 한단 말이야.
그렇다고 냅다 문으로 도망치자니, 그 문은 이 드래곤 뒤에 있단 말이지. 몸이 꿈에서 깨려면 아직 먼 것 같고.
‘그렇다면 답은 결국 하나인가.’
이 모든 생각을 눈 깜빡할 새에 끝마친 뒤, 나는 길게 심호흡하고서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어르신의 꿈에 함부로 막 들어와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 개인의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의 꿈에 무단으로 들어오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경솔한 행동에 깊이 사과드리며, 이후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항상 경각심을 가지겠습니다.]
[흐음.]
[또한오늘제가보았던것과어르신에관한이야기도절대로타인에게발설하지않겠습니다.다시한번진심으로죄송하다는말씀올립니다.]
그러니 좀 보내 주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