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단체 신탁이라.”
유스틴이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린 요청은 협정의 무사 체결이 전부였는데, 국가 간 화합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
“제가 레이디께 드린 선물이 제법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아니, 그럼 300만 페온을 얻었는데 입 싹 씻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 그랬으면 애초에 빚 갚겠다고 발 벗고 나서지도 않았겠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그냥 흘려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보통 사람들은 대공자님처럼 꿈에서 일어난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한 명의 꿈에만 들어가서 신탁을 전한다고 가정해 보자.
신실한 신도라면 그 꿈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지. 잠에서 깨어나도 꿈의 내용은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 제게 일어난 신묘한 일을 누구에게든 전하려 들 터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의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줄까? 정식으로 내려온 신탁도 아니고, 그저 꿈일 뿐인데.
물론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도 있을 테고, 그렇게만 해도 일이 잘 풀렸을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이왕이면 확실한 게 좋지 않겠어요?”
“이번만큼은 너무 확실해서 문제가 되었지만요.”
아, 예. 제대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입술을 삐죽이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고 있으려니, 뒤이어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라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그저 조금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했을 뿐이죠.”
“저도 설마 성황이 직접 움직일 줄은 몰랐어요. 이럴까 봐서 일부러 신탁도 많이 안 꼬았던 건데.”
“‘과실을 탐하는 자 녹음에 눈이 가려 샘을 보지 못하노니, 뱀의 혀를 지닌 자 꼬리를 물고 헤맬지어다’, 맞나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담.”
“그들이 현재 지내고 있는 곳은 결국 솜니움의 황궁이니까요.”
유스틴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를 따라 생긋 눈꼬리를 휘었다.
어차피 갈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황궁에 가게 되면 그냥 입 꾹 닫고 있어야지.
그사이 유스틴은 내가 내린 신탁의 내용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과실이야 당연히 눈앞의 이득을 이야기하는 거겠고, 녹색은 예로부터 탐욕을 상징하는 색이었으니 적절히 은유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뱀이 꼬리를 물고 헤매는 건…….”
“다른 종교면 몰라도, 베르단디의 신자들에게 우로보로스는 좋은 뜻으로 해석되지 않으니까요.”
그들의 최종 목표는 인간계에서 벗어나 저들의 신인 베르단디와 운명의 샘이 있는 신계로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영원이자 ‘끝없는 윤회’를 뜻하는 우로보로스는 그들에겐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신탁 참고 문헌 「리넥스 경전」, 데이비드 레버티 역(제국력 1431)……이 아니라.
어쨌든 신탁의 내용을 쉽게 정리하자면 바로 이거였다.
욕심부리겠다고 함부로 떼쓰다가는 큰 호통을 들을 것이야!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입니다. 리넥스는 적으로 두기엔 괜히 껄끄러운 곳이었으니, 이참에 친밀한 관계를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요. 성황이 직접 제국을 방문한다고 했으니 다른 나라에 본보기도 보일 수 있을 테고요.”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이에요.”
이 정도면 300만 페온의 값어치보다 훨씬 더 대단한 공을 세운 거 아닌가 싶은데.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스틴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얘는 맨날 내가 살갑게 굴면 인상부터 찌푸리고 보더라.
“성황이 오기 전까지 협상은 잠정 중단이지만, 상황이 딱히 나쁜 쪽으로 흘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
덩달아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오만한 얼굴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별안간 유스틴이 화제를 돌렸다.
“저희의 첫 거래도 일단은 종료된 거나 다름없군요.”
“이상하다……. 제가 아는 대공자님이라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절 좀 더 부리실 줄 알았는데.”
“인재는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대공자님이 이렇게 일을 대충 끝맺으실 분이 아닌데. 대공자님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설마 저랑 약속한 거 잊고 다시 꿈에서도 일하기 시작했다거나……?”
너 원래 이렇게 헐렁한 사람 아니잖아. 갑자기 왜 이래?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스틴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마주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스틴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아프지도 않고, 꿈에서 업무를 보지도 않습니다. 숙면에 도움이 되는 향초도 잊지 않고 피우고 있고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네요. 그런데 왜…….”
“이유는 이미 설명했습니다. 인재는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요.”
“임무 완수랑 인재는 소중히 여기고 싶다는 대공자님의 가치관은 무슨 상관인 건가요?”
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눈동자를 빠르게 깜빡였다.
정말 이 둘이 무슨 상관인 거지. 자기도 만만치 않은 인재니까 칭찬해 줘라?
네가 인재인 건 나도 잘 알고 있는데. 일단 빛나는 문의 소유자니까.
“음, 수고하셨어요, 대공자님. 너무 대단하세요. 대공자님 최고.”
“레이디야말로 그 짧은 순간 동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트러플 과자 한 봉지의 트러플 함유량만큼 영혼을 담아 칭찬을 날리자, 유스틴이 어이없다는 듯 또 한 번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무래도 이게 아니었나 보군.
그럼 대체 뭐지?
“……제 말은, 일 하나가 끝났으니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냐는 소리입니다.”
곧이어 유스틴이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천천히 말을 건넸다.
나는 거의 얼굴과 어깨가 평행이 될 정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에버딘 대공자가 지금 내 앞에서 휴식을 논해? 휴식을?
너 이 새끼 유스틴 아니지.
“당신을 재웠던 자의 생김새는? 셋, 둘…….”
“곱슬곱슬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 아니, 그보다 저 맞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닌데.”
“대체 저를 뭐로 보시는 겁니까?”
뭐로 보긴. 일에 미친 놈으로 보지.
아무 말 없이 생긋 미소만 짓자, 그가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서 그는 온 세상의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으로 천천히 부연하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건 어디까지나 저 자신에 한해서입니다. 그마저도 오히려 생산성 면에선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해 그만둔 지 오래고요.”
“흐음.”
“애초에 계약 조항에도 명시되어 있고요.”
“계약 조항에요?”
“백작님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 따로 의논한 부분입니다. 미에나 시두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할 것.”
“아버지가…….”
내가 계약서를 살폈을 땐 그런 부분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아빠랑 유스틴이 서로 짜고 나 몰래 추가했나 보군.
안 봐도 빤히 그려지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틴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백작께 따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은 가족과 함께 여행도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지요.”
“아니, 그건…….”
맞긴 맞는데.
“그러니 일이 없을 때 가족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모처럼 부인께서도 저택으로 돌아오셨으니 말입니다.”
말을 마친 유스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미소 안에 스민 은근한 압박을 마주하고서 입술을 오므렸다.
얘 지금 내가 수면 버프 내렸던 거 복수하려는 것 같은데.
“폐광산도 팔렸으니 여비도 충분하겠죠. 마차는 제 가문의 것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가문의 문장이 없는 것도 몇 대 있으니까요.”
“아니, 그…….”
“그러고 보니 최근에 시두스 백작께서 레이디를 위해 별장을 하나 구매하고 싶어 하시더군요. 마침 남는 별장이 있기에 ‘후원’해 드렸습니다.”
남는 별장은 뭐고, 그걸 굳이 후원했다고 강조하는 건 또 뭔데…….
어쩐지 오늘 나 보러 오기 전에 아빠 서재부터 들르더라니.
아무리 봐도 아빠랑 둘이서 짜고 치는 듯한 상황에, 나는 하릴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나 루스 가르쳐야 하는데.
너무 멀리 갔다가 루스랑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되면 꿈에 못 찾아간단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요양을?
“그, 그래도 저 아직 나름대로 팔팔한데…….”
“대증치료를 하고 있으니 괜찮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겠죠. 이참에 며칠 동안 푹 요양하고 오세요. 물도 좋고 공기도 좋은 곳이라 마음에 드실 겁니다.”
“아니, 그래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지금은 이 돈과 상황을 어떻게 불릴지 정할 차례인 것 같은데요.”
“그런 건 다녀오고 나서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거라뇨, 당신 진짜 에버딘 대공자 아니…….”
“쉬라고.”
“넵.”
이게 안 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