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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8)화 (18/154)

제18화

아무래도 허공에 대고 수업하는 건 좀 그렇잖아.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휘니, 루스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이상 말을 더 보태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미에나.]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정도로 자그마한, 그렇지만 결코 이전처럼 유약하지는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에나가 이름이라는 걸 알려 줘서 정말 기뻤어요.]

그다음 말은 이전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마치 내게로 한 발자국씩 내딛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이름을 알려 줘서 좋았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누구라도 뚜렷하게 들릴 법한 크기로.

[저는 미에나가 나한테 더 많은 걸 알려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기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어린 소년이 내 앞에 섰다.

나는 그를 향해 더없이 해맑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얼굴을 마주 보네.]

[…….]

[안녕, 루스.]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

네가 나를 선택한 만큼, 나 역시도 내 선택에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할게.

[안녕하세요, 미에나…….]

직접 마주한 루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고 왜소했다.

루스의 침실에는 전신 거울은커녕 화장대의 거울조차 없었으니, 아마 스스로 크기를 어림짐작한 거겠지. 어쩌면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귀여운데 짠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손을 뻗어 루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먼저 말해 두지만, 나는 이곳에 매일 올 수 없어. 무조건 이때 오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어.]

[약속……?]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건지 정하는 거. 그러니까, 세 밤 뒤에 너를 만나러 오겠다고 너와 정하는 거, 그런 게 약속이야.]

[그럼 세 밤 뒤에도 미에나가 절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건가요……?]

내 말에 루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나는 그를 쓰다듬는 손길에 속도를 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정확히 약속할 수 없다는 것뿐이야. 당장 일이 없으면 내일 올 수도 있고.]

물론 할 일이 산더미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래서 언제 꼭 오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어.]

[…….]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을 거야.]

기껏 너에게 세상을 알려 주기로 해 놓고 오래 방치할 수는 없지.

최대한 빨리 돌아오마.

집에 아이를 두고 돈 벌러 떠나는 부모의 마음으로 말하니, 루스가 내 손에 머리를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기다리는 거 잘해요.]

[아까는 나 보자마자 울었으면서.]

내 말에 루스가 화들짝 놀라 손으로 제 조막만 한 얼굴을 조물조물했다. 퍽 귀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어, 나는 그의 머리를 또 한 번 헝클어뜨렸다.

[화도 안 내고 하염없이 기다려 봐야 바보밖에 더 안 돼.]

[그치만…….]

[그래그래, 마음은 잘 알았어.]

내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한 말이겠지. 나는 계속해서 루스의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직 한창 울며 떼쓸 나이인데, 너무 의젓하게 군단 말이야. 이것도 다 평소 환경의 영향이겠지.

너무 이르게 철드는 것도 좋지 않은데. 아이는 아이다워야지.

뭐, 이건 차차 알려 주기로 하고.

[그리고 루스, 명심해야 할 게 있어.]

이윽고 루스를 바라보며 가볍게 운을 떼자, 루스가 몸을 흠칫 떨며 시선을 맞췄다.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명심해야 한다’라는 말에 반응한 걸까? 이건 더 파 봐야겠는데.

그렇다고 괜히 단서 모으는 걸 티 내면 반응을 감출 수도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천천히 파고들어야지.

한편으로는 머리를 돌돌 굴리면서도,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네 세상의 유일한 사람으로 두면 안 돼.]

[유일한……?]

[나는 네 첫 친구일지언정, 마지막 친구는 아니야. 너는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테고, 다양한 관계를 맺을 거니까.]

내 말에 루스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다. 아직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나중 되면 다 알게 될 거야.]

지금은 갇혀 지내는 신세라지만, 머리가 자라고 아는 것이 많아지면 자연히 행동반경도 커질 터.

적어도 루스가 무력함을 학습하도록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고, 또 단서가 모이는 대로 유스틴에게든 아버지께든 도움을 청할 거니까.

루스는 결국 진짜 세상을 마주할 것이다. 마정석으로 된 빛이 아닌, 따스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내 역할은 그가 스스로 태양을 마주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등을 밀어주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두려워 걸음을 주저하지 않도록.

내가 죽기 전에 그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잠깐 혼자가 되더라도. 평생 혼자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알았지?]

그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일 뿐.

내 경고 아닌 경고에, 루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좋아. 그럼 우선 맛보기를 좀 보여 줄까.]

[맛보기요?]

[네가 공부 열심히 할 마음 들게, 내가 뭐 하나 보여 줄게.]

말을 마친 나는 무언가를 손안에 담은 것처럼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루스가 호기심 담긴 눈동자로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야바위하는 기분인데.

[잘 봐, 루스.]

곧이어 맞잡았던 손을 펼치자, 자그마한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새까만 공간을 밝히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빛이었다.

하지만 이걸 흩뿌리면 어떨까?

[이얍!]

일부러 기합을 넣고서 빛을 하늘 위로 날려 보내자, 자그마했던 빛이 허공에서 폭죽처럼 펑 터졌다.

그렇게 칠흑 같던 어둠을 수놓은 건 바로 별이었다.

내 서재에 있는 플라네타륨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광활한 우주.

불꽃놀이 대신이지만, 아마 이게 더 예쁠걸.

[우와……!]

루스는 곧바로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서 그는 별을 붙잡으려는 듯 까치발을 디디며 손을 뻗었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흥분이었다.

역시 이 나이 땐 책보단 별이지. 사실 인생 두 번 살아도 시각적으로는 책보단 별이긴 해.

[별이라는 거야.]

행성도 있지만 일단은 대충 뭉뚱그리자. 어차피 이건 지구 버전이라 이 세계의 하늘이랑은 차이도 크고.

그러니 이곳과는 다른 이 세계의,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네가 직접 마주할 날이 오기를.

[별……, 별이라고 하는구나.]

‘별’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루스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별보다 더 빛나는 웃음이었다.

* * *

팔자에도 없는 선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겸업으로 팔자에도 없는 사업도 하고 있어요.

이거 공무원법 위반 아닌가요?

“어쩌다 이렇게 됐나 몰라…….”

나는 머리가 그렇게 잘 돌아가는 편도 아닌데. 죽기 직전이라 그런가, 어쩐지 일을 자꾸 벌이는 것 같단 말이야.

적어도 내가 죽은 후에 남에게 떠넘길 정도는 되지 않아야 할 텐데.

“뭐 불편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뜬금없는 신세 한탄이 거슬렸는지, 내 옆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 모습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워, 나는 그대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불편한 점이라면 당연히 있지.

가령 왜 당신이 이곳 주인처럼 여길 전세 내고 앉아 있느냐 같은 거.

“제가 여기 앉아 있는 게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이군요.”

“표정을 정확히 읽는 건 대공자님만의 특기이신가요? 아니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

“상대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금방 터득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꽤 유용하기도 하고요.”

“아하…….”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데.

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목구멍 너머로 말을 삼켰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 묻는다면, 패션쇼……, 아니 성화(聖畫) 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그저 ‘외형을 참고할 성화가 필요하다’라고 편지했을 뿐인데.

알았다고 하길래 그림 몇 점 보내 줄 줄 알았는데, 유스틴이 직접 올 줄이야.

거기다 이 많은 그림은 또 뭐고?

“이 많은 그림을, 그것도 대공자님이 직접 가져오시려면 제법 품이 많이 들었을 텐데요오……?”

“당분간은 황도에서 지내기로 한 터라 괜찮습니다. 그보다, 왜 또 그 말투를 쓰는 겁니까?”

유스틴이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첫 만남을 제대로 조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를 한 번 씰룩이고서 다시 말을 건넸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대공자님. 그래도 이렇게 많이 구해 오실 필요는…….”

“자료가 많을수록 더 완벽한 결과물을 도출해 낼 수 있으니까요. 부족하진 않습니까? 성국의 신자를 완벽히 속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아뇨, 충분합니다.”

시두스 저택이 무슨 성화 갤러리도 아니고, 이러다 순례지 되겠어.

‘원래는 대충 훑어보고 꿈속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뜯어볼 생각이었는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두 눈을 부릅뜨고 성화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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