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잔잔한 수면처럼 미동도 없이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허무하고, 공허하다.
처음부터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이것만 내내 반복해 온 탓에 다른 가능성은 아예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니, 인형처럼.
* * *
[……그만.]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봐도 될 것 같아.]
더 볼 필요도 없이 이건 그냥 애를 사육하고 있는 거잖아.
[미, 미에나?]
내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루스가 걱정 담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조금 전 메마른 표정으로 앉아 있던 소년이 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음성이었다.
어떻게 이런 애를, 어떻게?
아무리 좋은 방에서 지낸다고 한들, 좋은 음식을 먹고 지낸다고 한들.
이곳에 아이의 자유는, 의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학대였다.
[계속 이걸 반복했다는 거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네에…….]
[내게 보여 준 일상과 다른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고? 그러니까,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제, 제가 기억하기로는요…….]
루스가 어리숙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그의 꿈은 어느덧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어둠이 조금 전에 마주했던 침실보다 오히려 더 넓고 자유롭게 느껴져서.
나는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애써 눌러 삼키며 다시 한번 느리게 심호흡했다.
루스는 내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고 있어. 여기서 내가 갑자기 화를 내면 크게 위축될 거야.
내 분노를 아이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조물조물 문지르고 나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었다.
[그럼 정말로 내가 네 첫 친구네.]
곧 죽을 주제에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어 버리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루스에게는 내 존재 자체가 인생 최초의 돌발 이벤트였다.
둥글게 이어지던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네모.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나 버그 같은 존재.
만약 내가 루스의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루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같은 일상을 반복했겠지.
다른 이의 삶을 알지 못하니 불만을 가질 일도 없이, 평소처럼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건 알고 있지만…….
[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나는 이 아이의 생활을 봐 버렸고, 아이의 결핍을 인식해 버렸으며, 애석하게도 그걸 외면할 정도로 철면피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또 무턱대고 행동하기엔 내 상황이 나를 지탱해 주지 않아서.
만약 내가 시한부만 아니었어도, 이 몸이 멀쩡하기만 했어도 루스가 제대로 성장할 때까지 내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을 텐데.
애초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 사람이 루스를 발견했다면…….
[미에나?]
그 순간, 여리디여린 목소리가 상념을 흩뜨렸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고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에 충격을 너무 세게 받았나. 하마터면 쓸데없는 자책감에 매몰될 뻔했네.
의미 없는 가정은 해 봤자 부정적인 감정만 낳을 뿐이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나 바뀌지 않는 현실을 탓하기에는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뭘까.
나는 이 애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내가 무언가를 해 줘도 될까?
[있잖아, 루스.]
나는 조금은 머뭇대는 기색으로 보이지 않는 소년을 불렀다.
‘판단은 간결히, 행동은 단호히.’가 나의 신조라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물론 루스의 상황만 보면 더 잴 것도 없이 그를 돕는 게 맞지만, 지금도 이 아이의 보호자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리고 싶어 미치겠지만.
나는 곧 죽는다.
나는 이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없고, 어설픈 애정은 더 큰 상실을 불러올 뿐이다.
하물며 루스는 유스틴처럼 나를 딱딱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부모님처럼 나와의 이별을 오래 준비한 것도 아니니까.
분명 상처받겠지.
빠르게 흘러갈, 아주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분명 상흔이 남을 거야.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눈이 안 보이는 게, 귀가 안 들리는 게 아닌데도 특이하게 꿈이 온통 검게 물든 아이.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는지 알지 못한 채, 인형처럼 자라 온 아이.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
허공을 향해 살며시 손을 뻗자,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도 손가락 끝에 희미한 온기가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마치 나를 위로하려는 듯.
[하하, 하.]
정작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괜찮은 사람은 네가 아닌데.
나는 그 온기를 그러쥐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았던 아이.
누구보다 밝은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어두운 꿈을 꾸는 아이.
나는 불현듯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래, 루스는 ‘아이’였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혼자 살아가서는 안 될.
여기서 내가 앞으로를 걱정하며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너는 이 새까만 암흑 속에서 홀로 유년을 보내야 하겠지.
그리고 나는 그걸 알고도 묵인할 자신이 없어.
난 그렇게 못해.
[네게 선택의 기회를 줄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네가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를 거야.]
사실 이건 루스를 가만히 놔둘 수도, 그렇다고 평생 함께할 수도 없는 나의 알량한 자기 합리화였다.
루스가 무슨 답을 선택할지 이미 알고 있기에, 그래서 더 잔혹한.
나는 곧이어 암흑 한가운데에 서서 선언하듯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전에 먼저 정리하자면. 나는 너를 평생 책임져 줄 수 없어. 네가 어디 사는지도, 정확히 누구인지도 모르는 만큼 너를 직접 찾아가서 데리고 나올 수도 없고.]
[…….]
[그래도 네가 만약 첫 번째 길을 고른다면,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너를 가르칠 거야. 네가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그럼 당연히…….]
[하지만 네가 내게서 무언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너는 네 상황을 직접 마주할 수밖에 없어. 그건 아주아주 힘든 일이 될 거야.]
세상을 마주하게 된 대가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고통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나를 통해 기다림을 알고, 그에 따른 외로움을 배워 버린 것처럼.
제게 닥친 불행을 알고,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어쩌면 그렇게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지만.
[당장 네가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걸 알 테고, 그래서 더 괴로울 거야. 지금의 넌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조금만 지나도 분명 알게 될 거야. 어쩌면 이 모든 걸 알았을 때, 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어.]
그때는 내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마지막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킨 채 으름장을 놓듯 경고하자,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뜻을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어도 그 분위기만큼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금 숨을 들이쉬고서 이번에는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길은 네가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거야. 지금까지 지내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대로 사는 게 네게는 더 행복할 수도 있어.]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면 현실에 순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내가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 안에서 어떻게든 행복을 찾아가며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루스는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질 좋은 식사와 의무적이지만 모자라진 않은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대도 나는.
네가 이 우물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어.
때로는 아파하고 분노할지언정, 부당함을 알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
[선택은 네 몫이야.]
그리고 나는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를 알아 버렸고, 내 손을 잡았으니까.
[저, 저는.]
곧이어 루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미에나가 나를 계속 보러 왔으면 좋겠어요.]
[네가 무슨 길을 고르든 나는 계속 널 찾아올 거야. 그건 변하지 않아.]
[그, 그래도 저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어쩌면 망설이는 것처럼. 짧은 적막이 사위를 휩쓸었다.
저기서 ‘그래도’라는 말이 나온 순간, 이미 답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또 한 번 그에게 제안했다.
[만약 네가 첫 번째 길을 고르고 싶다면 말이야, 루스.]
[…….]
[내 앞에 나타나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