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고작 그걸로 무역 협정이 체결될 거라고 믿으시는 건 아니죠? 분명 무언가 조율이 되지 않아 체결이 미뤄지고 있는 걸 텐데요.”
“사실 리넥스와의 무역 협정은 이렇게까지 질질 끌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신문에도 드러난바, 세부적인 사항만 조율하면 되는 일이었죠.”
저번 월간 신문을 보면서 했던 생각을 그대로 읊어 주는군.
그때 보았던 기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틴이 유려하게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세부 논의 단계에서 리넥스 측이 돌연 마음을 바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기 시작한 거죠.”
대충 협정이 진행되는 것 같으니 드러눕고 떼쓰기 작전을 실행한 거로군.
리넥스가 이렇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당연히 이번 협정에서만큼은 리넥스가 갑이기 때문이겠고.
솜니움에서 자체 생산할 수 없으면서, 별다른 대체재가 없는 품목이 뭐가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요즘 제국 내 마정석 채굴량이 눈에 띄게 감소해 있었지.’
반대로 리넥스는 스스로 성국이라 칭할 만큼 신관을 자처한 치유 마법사의 보유 숫자도, 매장된 마정석의 양도 상당할 테고.
내 병을 치료해 보겠답시고 리넥스에서 친히 치료 사제도 데려와 본 적 있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막상 협상을 시작하고 보니 솜니움의 마정석 보유량이 리넥스 쪽의 예상보다 적었고, 이를 무기 삼아 강하게 나오기로 작정한 거군요.”
“품목을 얘기한 적은 없는데.”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이유로 댈 수는 없으니, 성국인 리넥스 측에서는 아마 신의 뜻을 걸고넘어졌을 테고요.”
그래서 유스틴이 머리를 싸매다 말고 쓰러졌다가 나한테 강제 휴식을 당하고, 빌어먹게도 내 능력을 알아 버려 다짜고짜 찾아온 것이다.
좋아, 좋아.
쟤가 왜 갑자기 날 찾아왔나 싶었는데,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오랜만에 빙빙 돌아가는 두뇌를 칭찬하고 있으려니, 별안간 앞쪽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 깨달은 모양새니, 설명할 필요는 덜었군요. 좋습니다.”
“아직 한다고는 안 했는데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거부감이 많이 줄었을 테죠. 레이디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여간 이 여우 같은 녀석.
나는 유스틴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또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신을 연기하는 정도라면 어렵지 않긴 해. 한 번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예상이 가고, 또 내가 그걸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니…….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쳐도 되나 싶네요. 하물며 성국인데.”
“글쎄요, 직접 신을 마주할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그네들의 축복이 되겠죠.”
“어찌 됐든 사기는 맞다는 소리를 우아하게 하시네요.”
내 말에 유스틴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제안을 거부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오만에 찬 웃음이었다.
보면 볼수록 웃기는 놈일세. 하지만 이번에도 당신이 옳았습니다.
“좋아요, 받아들일게요.”
끙끙 앓을 정도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문제를 해결할 동아줄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절실하겠어.
개인적으로 절실한 사람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을 싫어하는 건 또 아니라서.
나는 자연스레 떠올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구석으로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단순한 재정 지원이나 후원이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주고받을 수 있는 동업자예요.”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바라는 건 정보의 대칭성.
“제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물론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건 경고였다.
구라 치다가 걸리면 나한테 손모가지 날아가는 것이야.
“당연히 그래야죠. 애초에 그대는 속인다고 속아 넘어갈 상대도 아닌 것 같고.”
“에헤헤, 과찬이세요.”
“그밖에 더 원하는 건 없습니까?”
내 수줍은 연기를 깔끔하게 무시한 유스틴이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태도로 말을 건넸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말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앞으로는 제가 꿈에 나타나지 않아도, 꿈에서까지 일하려 하지 말고 좀 쉬세요.”
“갑자기?”
“동업자가 아픈 건 싫으니까요.”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네 꿈까지 찾아가서 감시하는 건 비효율적이잖냐.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네니, 유스틴은 잠깐 얼빠진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어벙한 표정이었다.
그러고서 그는 몇 번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그럼 저도 조건을 하나 걸죠.”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인재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기에 저희 가문은 인재가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고 있고요.”
“에버딘 가문의 후원 사업이야 유명하지요.”
“그리고 당신은 제가 본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인재입니다.”
“서두가 좀 기시네요……?”
사람 불안하게 비행기까지 띄우고.
“앞으로 시두스 가문은 에버딘의 후원을 받을 테고, 동업자로서 사업도 확장해 나갈 테니 재정적으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그러니―”
“그러니?”
“연명 치료, 받으세요.”
“…….”
“동업자가 아픈 건 싫으니까요.”
말을 마친 유스틴이 턱을 한 번 치켜세웠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제스처였다.
이 녀석 보게?
“이 역시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분명 맞는 말이고, 손해 볼 거 없는 제안이고,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수준이긴 한데.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물론 재수가 없다고 해서 안 받아들일 건 아니지만.
“좋아요.”
이 얘기 들으면 우리 아빠 좋아서 기절하는 거 아닌지 몰라.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리고서 불쑥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부터 저희 동업자 맞죠?”
“네, 맞습니다.”
“그럼 대공자님께서도 절 위해 뭐 하나만 해 주셨으면 하는데. 후원이 아니라, 사업적인 측면에서.”
갑작스러운 말에, 유스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외쳤다.
“경매에 좀 참여해 주세요!”
마침 잘 됐다, 요 녀석.
네가 바람잡이 역할 좀 해 줘라!
* * *
‘대체 왜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거니, 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