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미아가 이전보다 더 야윈 것처럼 보였는데, 혹시 제대로 못 먹인 건…….”
“그럴 리가 있겠소, 부인!”
시두스 백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동시에 그는 제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이상한 낌새에, 백작 부인이 눈매를 가늘게 늘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디아센. 편지에 ‘빚을 다 갚게 되었으니 돌아오시오’라고 적었었지요? 저희 형편에 그 많은 빚을 한 번에 다 갚을 수는 없었을 텐데요.”
“그, 그렇지…….”
“게다가 당신이라면 그 돈으로 빚을 갚기보다는 미에나의 약값에 보탰을 게 분명한데.”
부드러운 빛깔의 갈색 눈동자가 어울리지 않게 서늘한 이채를 띠고서 제 남편을 고요히 응시했다.
시두스 백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서 우물쭈물 말을 늘어놓았다.
“그, 그게 사실은.”
“사실은?”
“미에나가 더는 연명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오.”
* * *
“에버딘 대공가가 시두스 가문을 후원하겠습니다.”
유스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제 막 새로운 찻주전자를 들고 오던 티나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고.
“예에?”
기껏해야 두 소년 소녀의 두근두근 티타임을 예상했을 한 방청객의 턱이 예상치 못한 후원 선언에 덜컥 빠지고 말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티나를 향해 손짓했다.
“수고했어, 티나. 주전자는 여기 두고 잠깐 비켜 주지 않을래?”
“아니, 그게…….”
“어머니 아버지께는 내가 나중에 말씀드릴게.”
저 발언을 보아하니 정말로 ‘나’에서 끝날 것 같지는 않네.
내 말에 티나는 몇 번 더 입을 덜컥대다가, 이내 어떻게든 이해한 얼굴로 걸음을 물렸다.
지난번 내가 ‘앞으로 시두스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세요’라고 했던 말을 용케 기억한 모양이었다.
굿 티나, 나이스 티나.
“후원이라면 어떤…….”
그렇게 티나가 완전히 정원을 벗어난 후, 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전자 끝을 바라보며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유스틴이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어받았다.
“적어도 시두스 가문의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지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뒷배는 있어 줘야겠죠.”
“실제로도 재정적인 지원이 들어올 테고요?”
“계약이 잘 이행된다면.”
후원의 형태를 띤 동업이군.
“에버딘 대공 전하의 승인을 받고 진행하는 후원 사업인가요?”
“후계자로서 이런 권한 하나쯤은 당연히 가지고 있죠. 그러기 위해 일하는 거니까요.”
“제가 실패하면 대공자님께서도 상당히 타격이 크시겠어요.”
“지금까지 나눈 대화만 되짚어 보더라도, 딱히 레이디가 실패할 것 같지는 않군요.”
“…….”
“저는 감이 좋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찾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유스틴이 제 찻잔에 따른 홍차를 음미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제 나이 또래답지 않게 서늘하고 무뚝뚝하면서도, 동시에 확신이 깃든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감을 뒷받침하기 위해 끊임없이 예습하고 복습하고, 분석하고 예측하죠.”
“그래 보이긴 하세요…….”
“하여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곧이어 그의 올곧은 은빛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나 또한 그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에버딘 대공가의 후원.
‘미에나 시두스’가 아닌 ‘시두스 가문’을 향한 후원인 만큼, 그 단위는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면,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도 좋은 인연이 이어질 수 있겠지.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두려울 정도로 혹하는 제안이었다.
들어 봐. 나는 그냥 저 녀석의 대가리……, 아니, 머리를 식혀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고.
근데 갑자기 후원? 여기서?
이건 거절하는 게 바보지.
하지만 시원하게 ‘가 보자고!’를 외치기엔 너무 대우가 좋단 말이야.
“그렇다면 정확한 후원 조건을 들어 봐야겠는데요.”
계약 전에 독소 조항이 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의뢰인님.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차를 홀짝이며 말하자, 유스틴이 역시나 웃는 얼굴로 답했다.
“정식 후원인 만큼 단발성인 계약으로 끝나지는 않겠지만.”
“…….”
“일단은 솜니움과 리넥스의 무역 협정이 무사히 체결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나는 그대로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나한테 그걸 맡기겠다고?
이 미친놈이?
봄의 시작을 알리는 가느다란 실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까르르 웃으며 이렇게 말했겠지.
어머, 얘, 쟤 좀 보렴.
쟤 지금 헛소리한다!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솜니움과 리넥스의 무역 협정이 체결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두 번 말씀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퍽 유감스러운 태도로 말하자, 유스틴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에 따라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칼을 바라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저 미친놈한테 어디서부터 짚어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
“개인이 맡기에는 너무 국가적인 사안 같은데요. 하물며 시두스 가문은 이번 협정을 떠나, 외무 쪽으로는 아예 연관이 없고요.”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공자님께서는 아직 제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시고요. 그런 상황에서 대뜸 무역 협정이 체결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하시는 건…….”
암만 생각해도 저 사람 아직 다 안 나은 것 같은데. 없던 일로 하고 돌려보내야 하나?
아쉽지만 다음에 건강한 정신으로 다시 만나요, 우리…….
그에게 건네주려던 합격 목걸이를 거두고서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네던 찰나였다.
유스틴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타인의 꿈에 간섭할 수 있고, 그 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며 본인의 모습 역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아닙니까?”
“그으……건 맞지만요.”
세세하게 따지자면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 가능한 것들이긴 하지. 실제로 유스틴의 꿈에서 실컷 써먹었기도 하고.
나는 유스틴과 마주했던 지난 꿈들을 떠올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제 능력이 이번 무역 협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희 가문이 소유한 땅도 다 팔아 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수도에서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황실과 연이 닿은 건 아니라서요.”
“관직을 원하는 거라면…….”
“마음에도 없는 말씀 하지 마시고요.”
제아무리 황족의 피가 섞여 있는 대공가라고 해도, 그 정도의 권한이 주어진 건 아닐 텐데.
진심으로 질색하며 말하자, 유스틴이 다시 한번 무해하게 웃었다. 저 의뭉스러운 미소를 보건대, 아무래도 방금 건 슬쩍 흩뿌려 봤던 함정인 모양이었다.
도와달라고 하는 건 저쪽이면서 왜 자꾸 미끼랑 함정을 동시에 던지는 건지, 원.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대를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 좀 후회하고 있는데.
“이런 분이 왜 지금까지 능력을 숨기고 지냈는지 궁금할 정도로요.”
“어리고 아픈 사람한테 기대를 거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
“지금이야 제가 며칠 죽은 듯이 휴식을 취해서 이렇게 오래 대화가 가능한 거지,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열이 오르기 시작했을 거예요.”
누군가와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도 기력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체력이 요구된다.
걷고, 떠들고, 마시고 먹는 모든 일이 건강하다는 증거.
내게는 이마저도 사치였다.
“솔직히 전 대공자님처럼 머리가 잘 굴러가는 편이 아니고, 그래서 되도록 죽기 전까지 조용히 살다 가려고 했지만…….”
나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 이상 그 꿈은 이미 무너졌다고 봐야 옳겠지.
나는 말을 멈추고 유스틴 에버딘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스틴은 상체를 앞으로 조금 기울인 채 관찰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앙상하게 파인 뺨을, 아무리 빗질해도 윤기 하나 돌지 않는 푸석한 머리카락을, 핏기 없는 피부를.
그래. 열심히 봐라, 봐. 설마 본다고 닳겠냐.
“제가 그랬던 것처럼, 꿈에서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면 그나마 상태가 호전되는 편입니까?”
그 순간, 유스틴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기습적으로 물었다. 나는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레이디께서 병을 앓는 이유가 저처럼 꿈에서조차 휴식하지 않고 일하기 때문이라면…….”
“아뇨, 그건 아니에요. 물론 꿈에서 머리를 많이 쓰면 다음 날 조금 영향을 주긴 하지만, 제 능력과 병은 확실히 별개예요.”
이 빌어먹을 병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거라,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꿈에서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시간만 날릴 뿐 내 건강에는 차도가 없으리란 것.
“그렇다면…….”
“대공자님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거죠. 안 그래도 아픈 사람을 억지로 쥐어짠다는 죄책감은 안 지니셔도 되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게는 다행인 일이죠.”
곧이어 유스틴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한 번 어깨를 으쓱였다.
혹자는 무정하다 할 법한 발언이었지만, 사실 나였어도 저 정도 반응으로 끝났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진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따지자면 이제 막 결성된 무미건조한 비즈니스 파트너십이니까.
하물며 아직 제안을 받아들인 상태도 아니고.
“어쨌든, 아쉽지만 이번 협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네요.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레이디가 회의에 참석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회의 자체는 그대의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니까요.”
“그럼…….”
“당신은 그저 리넥스 외교단의 꿈에 들어가 연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제게 그랬던 것처럼요.
곧이어 유스틴이 바람에 스치는 한 떨기 여린 꽃잎처럼 푸스스 미소 지었다.
나는 그대로 입술을 오므렸다.
너는……, 무역 협정이 장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