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저는 현실에서든 꿈에서든, 제가 한 번 본 건 쉬이 잊지 않습니다.”
“…….”
“하물며 갑자기 나타난, 이전에는 마주한 적 없는 이의 얼굴을 까먹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가 직접 겪은 일을 허황한 것으로 치부할 정도로 답답한 인간도 아닙니다.”
“우와, 대단하셔라.”
그렇게 사니까 과로하는 거 아니겠냐, 이 자식아.
“그러니 쓸데없는 인사치레니 모르는 척은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입니다.”
이윽고 유스틴이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내가 그의 증상을 들을 때 취했던, 바로 그 자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이 있어서 여기 온 것 같은데 말이죠.
나는 그의 입가에 다시금 수놓아진 미소를 눈에 담으며, 여전히 하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요, 대공자님. 저는 정말로 대공자님께서 하시는 말을 하나도 이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최근 시두스 가문의 이름으로 유통된 보석량이나 금화의 양을 고려하면, 결코 그쪽에 손해가 되는 제안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완료했습니다.”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이제 좀 제대로 대화할 생각이 들었나 보군요.”
유스틴이 한순간에 뒤바뀐 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심지어는 아까 전보다 조금 더 기뻐 보이는 듯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 저 미친 광기.
만약 내가 계속 부정했어도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제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 했겠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일이다.
“그전에 일단 정리하고 넘어갈 게 있어요.”
곧이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자, 유스틴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것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처음 그를 마주했던 꿈과는 완벽히 역전된 상황이었다.
별수 있겠어. 여기는 꿈이 아니고, 나는 자애로운 수면의 천사가 아니며,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유명한 대공가의 핏줄인데.
“꿈속의 사람이 저인 건 어떻게 확신하신 건가요?”
“모녀가 굉장히 닮았더군요. 사실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반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우리 엄마를 너무 많이 닮아서 생긴 문제로군. 아빠를 닮았으면 완전범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정리하고 넘어갈 건 이게 전부입니까?”
유전의 신비에 한탄하고 있을 때, 유스틴이 부드럽게 고개를 꺾으며 물었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서 눈동자를 한 번 굴렸다가 원위치시켰다.
아, 정리하려던 건 이게 아니고.
“우선, 제가 대공자님 꿈에 들어간 건 인정할게요.”
“꿈에 ‘들어갔다’라고 표현하는군요. 대충 원리는 알겠습니다.”
아니, 또 왜 여기서 원리를 따져?
잠깐 혼미해질 뻔한 정신을 제대로 붙잡은 뒤, 나는 다시 수줍음 가득 담긴 목소리로 화두를 던졌다.
“그래서 사실 이걸 제 쪽에서 먼저 말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싶지만요오…….”
“……왜 말투를 또 그렇게 하는지?”
유스틴이 진심으로 질색하며 물었다. 나는 헤헤 웃으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이유가 뭔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아시다시피 제가 꿈속에서 대공자님께 조금 무례를 저질렀잖아요.”
“아하, 그거.”
내 말에 유스틴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나의 사랑과★정의의 수면 홍보 천사 모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안 따지겠다고 했을 때 입 씻고 넘어갈 걸 그랬나. 아냐, 이런 건 미리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언젠가 후환이 되어 돌아오는 법.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방법이 조금 과격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공자님의 숙면을 위한 조치였을 뿐이구요오.”
“덕분에 제 일정이 상당히 꼬이긴 했지만요.”
나 아니었으면 너 그 상태로 몇 주는 더 누워 있다가 탈진했을걸, 인마.
“뭐, 그런 방법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회복되지는 않았을 테죠. 결과적으로는 이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서서도 따질 생각이 없다고 말한 거고요.”
내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욕을 눈치챈 건지, 유스틴이 슬쩍 입술 끝을 빼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꿈속에서 있었던 일은 앞으로 드릴 제안과 추후 이루어질 계약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오, 에헤헤.”
“그러니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명확한 의견 전달 감사합니다.”
역시 한두 번 일해 본 솜씨가 아니야.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중에 벌써 계약까지 운운하다니, 방심했다가는 홀라당 잡아먹히겠는걸. 조심해야겠어.
내가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든 말든, 유스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리는 제안은 당연히 추후 정식 계약으로 체결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공수표를 던지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그걸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군. 난 그냥 자네의 능구렁이 같은 언변에 혀를 내두른 것뿐인데.
나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고서 나긋하게 답했다.
“사실 계약 건에 관련해서는, 저보다는 저희 아버지와 상의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대공자님과는 달리 후계로 키워지지 않았으니까요.”
“후계로 키워지지 않았다는 건…….”
“말 그대로예요. 저는 이 가문을 이어받을 수 없는 몸이니까.”
그렇다고 이 결정에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아버지는 내가 공부에 허우적댈 시간에 이 세상을 더 즐기기를 바랐을 뿐이다.
애초에 무언가를 진득하게 배울 체력도 없었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금까진 억지로 연명하고 있던 수준이었고, 최근엔 그 치료마저 멈췄으니까요.”
“그런…….”
“아, 연명 치료를 멈춘 건 제 의지예요. 아시잖아요, 시두스 가문의 상황.”
최근 시두스 가문의 자금 유통 현황까지 살펴보고 온 걸 보면, 나름대로 철저하게 조사했을 테니까.
내 생각과 다르지 않게, 유스틴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 안에 담긴 희미한 동정을 흘려 넘기며 앞에 놓인 찻잔을 톡 건드렸다.
“그러니 제게는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가 소중하고 의미 있어요. 굳이 대공자님의 꿈에 찾아간 이유도 이해하시겠죠.”
“시두스 백작 부인을 빨리 저택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였겠죠.”
“맞아요.”
내 상황까지 완벽히 이해했으니, 앞으로는 그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라도 내가 했던 행동을 책 잡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포석까지 모두 깔아 둔 후,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유스틴을 마주 바라보았다.
“대공자님의 제안은, 그리고 그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제게 올 이득은.”
“…….”
“제 시간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요?”
일회적인 보상. 사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렇게 급한 거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어찌 됐든 지난번 보물 상자를 손에 넣은 후로 급한 불은 완전히 꺼트렸으니까.
목표를 ‘가문의 가산을 내가 아프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잡는다면 아직 한참 모자란 수준은 맞지만.
“굳이 이곳까지 와 저를 만나려고 했던 건, 시두스 가문이 아닌 제 개인의 능력이 필요해서겠지요.”
“……맞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굳이 제 아버지와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이유도, 아마 영민하신 대공자님이라면 짐작하고 계실 테고요.”
보석과 금화는 당장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하다. 그러니 그건 내 구미를 당길 수 없다.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닌, 유스틴 에버딘이라는 것.
신분제를 막론하고, 당장 이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도 되는 사람은 그가 아닌 나라는 것.
그의 제안을 듣기 전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일은 바로 이거였다.
갑과 을을 명확히 합시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유스틴은 내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고서 자세를 바르게 했다. 내 요구에 맞춰 진심으로 협상에 응하겠다는 신호였다.
좋아. 아주 바른 태도야.
만족스럽게 정리된 상황에 부드럽게 미소 짓자, 유스틴이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각 가문의 재산 보유 현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지만, 자금 유통까지는 완전히 가릴 수 없죠. 특히나 저희 가문은 금융업도 겸하고 있고요.”
“여러 사람을 거치는 순간, 완전한 비밀은 없다 보는 게 맞기는 해요.”
“그런 의미에서, 완벽히 파산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던 시두스 가문의 최근 자금 흐름은 조금 예상외더군요.”
“와아, 대공자님께서 또 언제 그런 것까지 다 살펴보셨을까…….”
이 자식 분명 최근까지 앓아누워 있었을 텐데, 그새 시두스 가문의 자금 흐름을 파헤쳐 봤다고?
아무래도 내 자애의 수면 버프가 부족했던 모양이군.
현실에서도 저놈의 일 중독을 억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작 열 몇 살밖에 되지 않은 애가 왜 벌써부터 제 몸 깎아 일하고 싶어서 안달인 건지.
“그래도 다 망해 가는 가문에 이 정도까지 파고들어 이상함을 느낄 만한 이는 저 말고는 또 없을 겁니다.”
그사이 말을 마친 유스틴이 나를 안심시키듯 웃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자식아. 누가 다 망해 가는 가문을 그렇게까지 파고들겠냐.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일부러 조금조금 단계적으로 보물을 풀고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눈속임으로 남은 광산이라도 팔 걸 그랬나? 물론 폐광 직전인 비주류 광물 광산이 팔릴 일은 만무하지만.
“보통은 저희 가문이 또 불법 대출받았겠구나 하고 넘어갈 테니까요.”
“이번엔 그게 아니었겠죠.”
“최근에 운이 좋게도 돈이 들어올 일이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그 자금의 끝에 레이디가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핫, 과찬이세요.”
“다만 이래서야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시두스 가문의 이변을 알아차리겠죠.”
너는 그 정도로는 안 멈출 테니까.
나를 직시하는 유스틴의 은빛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옳았다.
그렇게 잠깐 눈빛을 주고받은 후, 유스틴이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에버딘 대공가가 시두스 가문을 후원하겠습니다.”